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가야고분군 7곳.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주변국과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독특한 체계를 유지하며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된다”고 평가했다. / 가야고분군 세계유산추진단 제공
“1000년 전 김부식이 천대했던 ‘가야’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며칠 전 한국의 ‘가야고분군’이 제45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7개 가야고분군은 유곡리 및 두락리(전북 남원), 지산동(경북 고령), 대성동(경남 김해), 말이산(경남 함안), 교동 및 송현동(경남 창녕), 송학동(경남 고성), 옥전(경남 합천) 고분군입니다.
유네스코는 “주변국과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독특한 체계를 유지하며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OUV)’가 인정된다”고 평가했습니다.
천덕꾸러기에서 백조로?
이대목에서 저는 웃음이 나왔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동안 한국 역사에서 가야의 존재가 얼마나 무시당했습니까.
다른 예를 들 것도 없죠. 맨 처음 인용했지만, 김부식(1075~1151)이 편찬한 <삼국사기>만 봐도 그렇습니다. 고구려·백제·신라 등 3국의 역사만 기술하지 않았습니까. 가야사는 쏙 빼놓았죠. <사국사기>가 아닌 <삼국사기>가 된 겁니다.
완전히 뺀 것은 아닙니다. ‘신라본기’에만 종종 ‘가야국’ 이야기를 넣었습니다.
“기원후 77년(탈해왕 21) 가야와 황산진 전투를 벌였다”는 기사를 시작으로 “지원군을 보내 가야를 공격하는 포상 8국을 물리쳤다”(209), “가야가 왕자를 볼모로 보냈다”(212)는 기사가 보입니다.
또 “신라·백제·가야 연합군이 고구려 공격을 격퇴했다”(481), “가야국 왕이 혼인을 청했다(522)”, “법흥왕이 변방 순행 중 가야국 왕을 만났다”(524)는 내용도 있네요. 급기야 “532년(법흥왕 19) 금관국왕 김구해(김유신의 증조할아버지)가 항복했다”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이후 “554년(진흥왕 15)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가야 연합군을 무찔렀다”는 기사가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562년(진흥왕 23) 9월 배반한 가야를 토벌했다”는 가야의 멸망 소식을 전합니다.

7개 고분군에서 출토된 가야 유물들. 가야 제국은 각각의 문화와 전통을 나름대로 유지하며 성장했다. / 가야고분군 세계유산추진단 제공
<삼국사기> ‘잡지·지리’는 ‘김해소경’을 설명하면서 ‘금관국’의 역사를 요약 소개합니다.
“김해소경은 옛 금관국(가락국 혹은 가야)이다. 시조 수로왕~10대 구해왕에 이르렀고, 532년 항복해….”
<삼국사기> ‘열전·김유신’전은 “김유신의 12대조인 수로왕이 기원후 42년 가야를 건국하고, 후에 금관국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부연설명했습니다. 제법 구체적이죠. 금관가야만이 아닙니다.
‘대가야국’ 이야기도 <삼국사기> ‘잡지·지리’에 나옵니다.
“고령군은 본래 대가야국이 시조 이진아시왕에서 도설지왕까지 모두 16대 520년 이어졌던 곳이다. 진흥왕이 멸망시키고….”
가야는 왜 ‘따로국밥’을 지향했을까?
<삼국사기>에 따르면 10대 500년 이어간 금관국과 16대 520년 존속한 대가야가 분명히 존재했죠. 그쯤 되면 ‘금관국본기’, ‘대가야국본기’ 등은 아니더라도 ‘가야본기’쯤은 나와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요.
<삼국사기> 편찬자인 김부식은 왜 ‘가야’의 역사를 무시한 걸까요. 일반적인 설명은 이거죠.
가야는 멸망할 때까지 삼국과 같이 통일된 하나의 고대국가를 이룬 적이 없다는 겁니다.
12개(전기) 혹은 22개(후기)의 소국으로 느슨한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는 겁니다. 가야는 고대국가의 첫 번째 조건인 ‘강력한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했기에 ‘사국’ 대접받기에는 자격 미달이라는 겁니다.
가야는 왜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했을까요. 가야 제국은 소백산맥 및 지맥과 낙동강 및 그 지류로 형성된 작은 분지를 중심으로 성장했습니다. 비근한 예로 대가야는 고령 서북쪽에 가야산(1430m), 서쪽에 비계산(1126m)과 두무산(1038m) 등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죠. 이러한 분지로 형성돼 있으니 통일왕국의 길이 어려웠죠.
분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과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낙동강을 터전 삼아 살았습니다. 큰일이 생겼을 때 인근 소국과 연합해 대처하는 길을 모색했죠. 그렇게 10~20개 소국이 ‘각자도생’을 원칙으로 성장한 겁니다.
다양성의 가치가 평가됐다?
<삼국유사> ‘기이·가락국기’에 등장하는 김수로왕 탄생신화를 봅시다.
“서기후 42년 하늘에서 내려온 6개 알에서 태어난 사내아이 중 한 사람은 대가야의 왕이,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가야의 임금이 됐다”고 했죠. 그뿐 아니고요. 통일신라 최치원(857~?)은 <석이정전>에서 흥미로운 대가야 전설을 전합니다.
“가야산신이 천신과 사랑을 나눠 대가야왕인 뇌질주일과 금관국의 왕인 뇌질청예 등을 낳았다”는 겁니다. 대가야왕과 금관국왕이 형제라는 이야기죠.
그런 점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는 참 흥미롭습니다. ‘주변국과의 자율·수평적 관계’를 유지했고, 그것을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증거’여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가 인정된다는 거잖아요.
언제는 통일국가를 형성하지 못해 <삼국사기>에서도 ‘자격 미달’의 평가를 받았던 ‘가야’였는데….
이제는 자율성·다양성의 모델이라고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니….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습니다.

<삼국유사> ‘기이·가락국기’에 등장하는 김수로왕 탄생신화. “서기후 42년 하늘에서 내려온 6개 알에서 태어난 사내아이 중 한 사람은 대가야의 왕이,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가야의 임금이 됐다”고 했다. /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만년 2인자의 견제 때문?
각설하고요. 이번에 세계유산에 등재된 7개 고분군을 훑어보았는데요. 역시 최근 발굴성과가 두드러진 ‘경남 함안 말이산 고분군’에 눈이 가더군요. 함안은 가야연맹체 가운데서도 아라가야(안라국)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데요.
여러분은 가야 하면 전기(2~4세기 말)·후기(5세기 전반~6세기 중후반) 가야연맹체의 맹주국인 금관국과 대가야국 등 2개국만 아시죠. 하지만 전·후기를 통틀어 2인자로서 존재감을 과시한 나라가 있었는데요. 안라국입니다. 왜 2등은 기억해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그래서 잘 몰랐을 뿐 안라국의 위상도 만만치 않았답니다. 금관국과 대가야가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한 이유는 바로 2인자였던 안라국의 견제 때문이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임나일본부 찾겠다”고 큰소리 뻥뻥
말이산 고분군에는 1.9㎞ 정도 되는 구릉에 127기의 대형고분(지름 10~35m)이 조성돼 있습니다.
이렇게 즐비한 대형 고분 덕분에 함안은 일제강점기부터 주목을 끌었던 곳입니다. 일제가 이른바 ‘임나일본부’의 증거를 “여기서 찾겠다”고 혈안이 됐죠.
일본학자 구로이타 가쯔미(黑板勝美)는 “<일본서기>에 따르면 임나일본부는 분명 여기에 있다. 내 손으로 임나일본부를 찾겠다”(매일신보 1915년 7월 24일자)고 큰소리 뻥뻥 쳤습니다. 그러나 1910~1917년 4차례의 조사결과 구로이타의 장담은 헛소리로 판명됐죠.

아라가야 왕궁터로 추정되는 가야리에서는 높이 8.3m에 달하는 토성벽이 확인됐다. 잔존 성벽의 길이는 2㎞ 정도로 추정된다. /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막상 일본부라고 해도 조선풍인 것이 틀림없다. 조사결과 일본부의 자취가 사라져서 찾을 방법이 없는 게 유감이다.”
한마디로 임나일본부의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말갑옷, 별자리, 금동관, 청자 이후에도 일제가 뒤집어씌운 ‘임나일본부’의 악령이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죠.
그러던 중 1992년 6월 신문 배달 소년이 경남 함안 도항리 아파트 신축공사장에서 말갑옷을 발견했습니다. 동수묘, 삼실총, 쌍영총 등 고구려 고분벽화에 중무장한 기병이 타고 있던 것과 흡사한 말갑옷이었습니다.
2018년 말에는 아라가야 왕궁터로 추정되는 가야리에서 높이 8.3m에 달하는 토성벽(잔존길이 2㎞ 정도)이 확인됐습니다.
또 말이산 13호분에서는 전갈, 궁수자리 등 125개의 별자리가 새겨진 무덤 덮개돌이 확인됐습니다. 이중 6개의 별로 구성된 궁수자리는 ‘남두육성’이라도 하는데요. ‘북두칠성’이 하늘과 죽음을 의미한다면, ‘남두육성’은 땅과 생명을 뜻하죠.
이 고분에서는 중국제 모방품으로 추정되는 금동제 허리띠장식과 일본 최고위 무덤에서만 보이는 녹각제 칼손잡이 등도 출토됐습니다. 2021년 7월에도 말이산 45호분 출토 유물의 보존처리 과정에서 금동관(일부)을 찾아냈는데요.
이 금동관은 다소 거칠게 제작됐지만 두 마리의 봉황이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며 표현돼 있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아라가야만의 디자인입니다.

2019년 경남 함안 말이산 고분군 45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의 복원 모습. 봉황 두 마리가 마주 보고 있는 아라가야 특유의 독창적인 디자인이다. / 이한상 대전대 교수 복원·경남 함안군 제공
말이산 75호분에서는 중국제 청자가 수습됐습니다. 5세기 중국 남조(유송·420~479)에서 제작된 연꽃무늬 청자그릇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충남 천안 용원리와 서울 풍납토성 등 전국 각지에서 출토된 청자그릇과 쌍둥이라 할 만큼 깊은 친연관계를 보였답니다. 청자를 매개로 5세기 동북아시아에서 활발한 네트워크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얘기죠.
안라인수병의 정체
이런 발굴성과를 계기로 아라가야와 관련된 문헌 기록이 재해석됐습니다.
<삼국사기>의 안라국(아라가야) 관련 기사(209)가 눈에 띕니다. “신라가 ‘포상 8국의 전쟁’에 지원군을 보냈다”는 기사인데요. 지금까지 ‘포상 8국의 전쟁’은 안라의 배후지원 아래 골포(마산), 칠포(칠원), 고사포(고성), 사물국(사천) 등 8국이 가라(금관가야)를 공격한 사건으로 해석됐습니다. 지금은 그러나 거꾸로 안라, 즉 아라가야가 포상 8국의 공격을 받은 사건이라는 견해가 부각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맞든 안라국의 위상이 만만치 않았다는 사실의 증거가 돼줍니다.
또 하나 주목을 받는 기록이 있습니다. 바로 ‘광개토대왕 비문’의 고구려 남정(400) 기사 중 ‘안라인수병(安羅人戌兵)’ 문구입니다. ‘고구려 남정기사’는 광개토대왕이 5만 대군을 파견해 신라를 공격한 왜를 쫓아냈다는 내용인데요.
그동안 ‘안라인수병’의 실체를 두고 설왕설래했는데요. 요즘 ‘안라’를 ‘안라국(아라가야) 별동대’ 혹은 ‘안라국 수비대’로 해석하는 견해가 만만치 않습니다. 안라국이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올 정도로 유력한 세력이었다는 얘기입니다.

1992년 신문 배달 소년이 경남 함안 아파트 공사장에서 기적적으로 찾아낸 말갑옷과 둥근고리큰칼. 아라가야 수장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2018년 함안 말이산 13호분에서는 전갈자리와 궁수자리(남두육성) 등 125개의 별자리가 새겨진 무덤 덮개돌이 확인됐다. /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제공
1인자를 꿈꾸는 만년 2인자
최근에는 아라가야의 위상을 영원한 2인자에서 1인자로 올리려는 시도도 엿보입니다. 즉 <남제서> ‘동남이열전·가라’조는 “(479년) 가라왕 하지가 남제에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자 ‘보국장군 본국왕’에 제수했다”고 했는데요. 지금까지는 남제의 작위를 받은 ‘가라왕 하지=대가야왕’이라는 해석이 통설이었습니다.
최근 5세기 후반(479) 중국제 청자가 말이산 고분에서 출토되자 새로운 해석이 나왔습니다. <남제서>의 ‘가라왕 하지’는 대가야왕이 아니라 다름 아닌 아라가야 왕을 가리킨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야 제국이 안라를 형(兄) 혹은 아버지(父)로 여겨 오로지 안라의 뜻을 따른다”는 <일본서기> ‘흠명기·544’조도 인용됐습니다. 또 <일본서기>에 따르면 529년 남부 가야 제국이 안라국을 중심으로 자구책을 모색하고, 이에 안라가 백제·신라·왜의 사신을 초빙해 새롭게 조성한 고당(高堂)에서 국제회의를 주도합니다. 신라가 대가야와 결혼동맹을 맺고 탁기탄(경남 밀양)을 멸망시키는 등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려 한 겁니다.
최후의 몸부림 이 무렵(540년대) 가야연맹은 대가야(북부)와 안라(남부) 등 남북 이원체제로 굳어졌는데요. 안라국은 541년과 544년 두 차례에 걸쳐 6~7개 소국 대표를 이끌고 백제의 사비(부여)에서 1·2차 국제 회담을 엽니다.
그러나 두 차례 사비회의는 결렬되고 맙니다. 554년 백제·가야·왜 연합군이 신라와의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이 전사하는 등 대패하게 됩니다. 이때 가야연맹 제국도 더는 회복할 수 없는 치명타를 입게 됐고요. 막판 선봉에 섰던 안라국은 가야 제국 중 가장 먼저 신라에 투항합니다(560). 그후 2년 뒤, 대가야가 멸망함으로써 가야의 500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여하간 이번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가야역사가 새롭게 부각될 것 같은데요. 솔직하게 말해 가야에 대한 연구가 일천한 상태에서 세계유산에 등재된 감이 있어요. 예를 들면 전북 남원 유곡리·두락리 지역을 왜 가야 영역으로 묶는지 의아해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세계유산 등재를 가야사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할 것 같네요.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Ikh074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