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녀장의 시대>·<형사 박미옥> 등 화제…이연실 이야기장수 대표
승합차에서 내린 경찰이 권총을 들고 주위를 살핀다. 앞 좌석에는 또 다른 경찰이 벽돌만 한 무전기를 들고 어딘가와 교신 중이다. 흡사 1990년대 영화 포스터 같은, 단박에 눈길을 끄는 책 표지다. 지난 5월 3일 출간돼 화제를 모으고 있는 <형사 박미옥>(박미옥·이야기장수)이다. 탈옥수 신창원, 연쇄살인범 정남규 사건 등 굵직한 사건 수사를 도맡았던 박미옥 전 경정의 33년 경찰 인생이 담겼다.
일주일 후인 5월 10일 또 다른 책 <나는 왜 이렇게 웃긴가>(이반지하·이야기장수)가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이토록 자신감 넘치는 제목이라면 책을 펼쳐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책은 주로 성소수자가 직면한 한국사회의 현실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책 제목처럼 예상치 못한 독보적인 웃음을 선사한다. 출간한 지 며칠 만에 중쇄를 찍었다.
이야기장수는 지난해 3월에 문을 연 1년 남짓한 출판사다. 문학동네 임프린트지만 대표가 회계·재무를 제외한 모든 일을 담당하는 1인 출판사에 가깝다. 이연실 이야기장수 대표는 주변에서 ‘간헐적 수면’을 하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주목할 만한 책들을 쏟아내고 있다. 지난해에 출간해 베스트셀러가 됐던 <가녀장의 시대>(이슬아)는 얼마 전 드라마 판권 계약도 마쳤다. 이연실 대표는 “출판사 이름대로 이야기 장수가 꿈”이라며 “드라마나 영화는 몇백만, 많으면 1000만명 이상이 본다. 궁극적으로 드라마·영화 등 파급력이 큰 제작사들이 달려들 만한 이야기들을 출판하는 ‘이야기 회사’로 성장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지난 5월 23일 합정동 한 카페에서 이연실 대표를 만났다.
-<가녀장의 시대>를 비롯해 최근 출간한 <형사 박미옥>, <나는 왜 이렇게 웃긴가> 등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처음 이야기장수를 시작할 때 세운 목표가 있다. 2년차에는 에세이 분야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이야기장수 책 2권을 올리겠다는 목표였다. <형사 박미옥>과 <나는 왜 이렇게 웃긴가>가 최근 나란히 10위 안에 들었다. 단기적인 목표는 이룬 셈이다. 오늘 또 기념할 만한 공식발표가 있었는데, <가녀장의 시대>가 제작사 하이그라운드와 계약을 맺고 곧 드라마로 선보일 예정이다. 이슬아 작가가 직접 극본을 써서 내년 방송을 목표로 준비 중이다. 사실 <가녀장의 시대>의 드라마화는 이슬아 작가와 나의 목표이자 계획이었다. 우리끼리 농담으로 제작사로부터 드라마 제안이 오지 않으면 직접 책을 들고 제작사를 찾아다니자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책이 나오자마자 드라마 제작사에서 문의가 쇄도했다.
<가녀장의 시대> 책 한 권을 두고 여러 제작사가 다양한 장르로 제안을 해왔다. ‘정말 이들은 선수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형사 박미옥>도 출간되자마자 여러 제작사로부터 많은 문의가 오고 있다.”
-<형사 박미옥>이 출간되면서 박미옥 전 경정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어떻게 출간하게 됐나.
“나는 박미옥 반장님(이하 호칭 생략)이라고 부르는데,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이런 분이 있다고 처음 소개해줘 알게 됐다. 박미옥 반장이 퇴직하고 제주도에 내려간 이후여서 일단 제주도로 찾아갔다. 사실 내려갈 때만 해도 ‘어떤 분이길래’라는 호기심이 더 많았다. 만나고 나니 책을 꼭 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 확신을 갖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박미옥 반장 집에는 사람들이 많이 놀러오는데, 놀러온 손님들은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꼭 울게 된다. 박미옥 반장은 제주도이고 또 집에 책이 많다 보니 공간이 주는 힘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나는 이건 전적으로 박미옥 반장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이 분이 사람들에게 해주는 말이 너무 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분을 꼭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벌써 2년 전이다. 인물 자체가 매력적이다 보니 처음에는 전문작가에게 맡겨 빨리 출간하는 형식을 생각했는데, 박 반장은 절대 그렇게는 책을 안 쓰겠다고 했다. 그렇게 직접 한줄 한줄 천천히 써서 만든 책이다. 어떤 부분은 너무 수사보고서 같다고 피드백을 주기도 했는데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엎어 새로 써서 보내주곤 했다.”
-이반지하 작가의 첫 책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문학동네), 이슬아 작가의 첫 책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문학동네)도 이연실 대표가 만들었다. 어떻게 이들의 첫 책을 출간하게 됐나.
“이반지하 작가는 김하나 작가의 SNS를 보다가 발견했다. 김하나 작가가 ‘요즘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천재적이고 가장 웃기는 사람’이라고 소개해 궁금해서 찾아봤다. 당시 팟캐스트에서 방송을 하고 있었다. 들어봤는데 정말 너무 웃겼다.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웃기는 것과는 묘하게 다른 유머였다. 나를 놀리고 세상을 놀리고 이성애자의 세계를 놀리는데 그 놀림이 기억에 남았다. 또 정말 똑똑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만나서 책을 내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책은 3개월 만에 380쪽을 썼는데, 너무 잘 써서 짜릿했던 기억이 난다. 이슬아 작가는 출판계 관계자 등 여럿이 모인 술자리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당시에는 이슬아 작가를 잘 모를 때였는데, 만화 그리는 사람으로만 소개받았다. 그날 이슬아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굉장히 인상적이어서 한 매체에 연재한 만화를 찾아보게 됐다. 이슬아 작가가 누드모델을 할 때, 이슬아 작가 어머니와 있었던 에피소드를 보고 이 이야기는 꼭 책으로 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첫 책은 <일간 이슬아>로 독립출판물이었고,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는 상업출판으로의 첫 책이다. 좋은 필자를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보는 수밖에 없다.”
-문학동네 편집자 시절부터 에세이를 주로 출판했고, 그중 많은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좋은 에세이의 기준이 있다면.
“유일한 이야기, 전에 없던 새로운 이야기다. 투고 원고가 많이 들어오는데 제일 많은 종류가 퇴사하고 여행한 이야기다. 자신한테는 너무 특별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문장이 유려하지 않더라도 자기 삶에 ‘코어(중심)’가 있는 사람들이 좋은 에세이를 쓴다. 자기 자아에 휩싸여 어쩔 줄 몰라 하는 글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담담한 시선에서 더 좋은 에세이가 나온다고 본다. 최근에는 <대화의 밀도>(류재언·라이프레코드)가 정말 좋았다. 내 인생에 남은 대화 한 마디에서 출발하는 에세이다. 짤막한데 아주 담백하다. 또 6070 여성의 일 이야기를 기록한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경향신문 젠더기획팀·휴머니스트)도 정말 좋았다. 제가 정말 책을 내고 싶은 분들은 그런 분들이다. 저에게 본인이 돈이 많다며 책을 내달라고 하는 분들도 있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가지 않는다. 반면 그 책에 나오는 어머니들은 책을 낼 생각도 없고 책 내는 일에 관심도 없을 테지만, 그런 분들의 삶은 꼭 글자로 남겨두어야만 할 것 같다. 강연할 때 그 책을 언론사에서 낸 책 중에 모범이라고 소개하곤 한다. 기자들의 글이 딱딱한 경우가 많다. 그 책은 재미있게 잘 접근했다고 생각한다.”
-<형사 박미옥>, <가녀장의 시대> 등 이야기장수의 표지 디자인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형사 박미옥> 표지를 보더니 출판계 한 선배가 ‘이연실표 출판의 극치’라고 표현했다. 보통 1인 출판사들은 북 디자인에 외주를 맡긴다. 나는 임프린트이다 보니 내 성향을 잘 아는 문학동네 디자이너들이 작업을 해줬다. 또 대표가 되니 표지에 내 취향을 더 많이 담을 수 있었다. <형사 박미옥> 표지를 만들 때 박미옥 반장에게 과거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다. 강력반장이나 마약수사팀장할 때 활약을 담은 멋있는 사진이 많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사진이 별로 없었다. 범인 잡으러 다니느라 사진 찍을 겨를이 없었던 거다. 마침 경찰청 홍보용 사진으로 찍은 게 한 장 남아 있었는데, 보자마자 ‘이게 표지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사 박미옥>과 <가녀장의 시대>는 표지 디자인에 히어로물 느낌이 나기를 바랐다. 두 권 모두 내가 너무 자신 있게 내세우는 여성 작가들이었기 때문에 표지만 봐도 ‘다 죽었어’라는 느낌이 나왔으면 싶었다. 정확하게 구현됐다고 본다. 나는 ‘표지는 액자’라는 말을 좋아한다. 책 표지에는 어떤 한순간이 강력하게 담겨 있어 사람들이 그 책을 그냥 갖고만 다녀도 신나는 느낌이 든다면 좋겠다.”
-문학동네 편집자에서 임프린트 대표로 전환하면서 두려움은 없었나.
“출판사 편집자 평균 정년이 40세다. 이후 관리자로 가거나 1인 출판사를 내는데 모두 내 길은 아닌 것 같았다. 40대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문학동네 편집자로서는 실패해도 다시 하면 되지만, 임프린트는 정확하게 목표한 만큼 매출을 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책을 만들어도 수익을 내지 못하면 그 임프린트는 접어야 한다. 40대를 앞두고 고민을 하고 있는데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절벽에 설 때가 있는데, 그때 대부분은 안 떨어지려고 절벽에 대롱대롱 매달린다. 그냥 몸을 한 번 확 날려봐라. 허공에 날려보면 그 밑에 풀밭이 펼쳐져 있을 때가 있다’라면서 ‘나도 그랬고, 너도 그럴 만한 내공이 되니까 몸을 날려도 된다. 그러면 내가 너 풀밭이 돼줄게’라고 했다. 서 이사장과는 <영초 언니>(서명숙·문학동네)를 출간하면서 알게 됐고, 최근에는 <흡연 여성 잔혹사>(서명숙·이야기장수)를 만들기도 했다. 이야기장수의 명예고문으로 모실 정도로 인연이 깊다. 지금도 힘이 많이 돼 준다. 서 이사장의 말대로 몸을 날려보니 지금까지 쌓아온 만큼 또 날게 된다는 걸 알았다.”
-앞으로의 계획은.
“종합출판사를 목표로 한다. 지난해에는 에세이를 주로 출간했지만, 올해는 다양한 장르의 책을 선보일 예정이다. 가장 큰 목표는 출판사 이름 ‘이야기장수’대로 ‘이야기 회사’가 되는 일이다. 종이책만 파는 게 아니라 제작사와 같은 ‘이야기 사냥꾼’들이 달려올 만한 그런 이야기를 쌓아나가려고 한다. 요즘은 책을 1만 부 팔면 많이 팔렸다고들 한다. 드라마나 영화는 몇백만, 많으면 1000만명 이상이 본다. 궁극적으로 드라마·영화 등 파급력이 큰 제작사들이 달려들 만한 이야기를 출판하는 ‘이야기 회사’로 성장하고 싶다. 요새 종이책 시장이 점점 작아져 작가들에게 인세를 줄 때 가끔 슬프다. 작가들은 정말 몇 개월 내지 몇 년에 걸쳐 글을 쓰는데, 너무 적은 금액이 작가들에게 가다 보니 ‘어떻게 먹고 사나’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영상 세계의 글값은 종이매체보다 훨씬 높다. ‘판권 파는 작가’가 되게끔 해주고 싶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