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금제 띠고리의 ‘낙랑인’, 중국인일까 한국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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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소장자료(41만3000여점) 가운데 유독 낙랑 관련 유물과 사진이 눈에 밟힙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사하고 촬영한 1만7000여점의 유물과 4053점에 이르는 유리건판 사진이 그것입니다. 그동안 국립중앙박물관이 관련 자료를 재검토한 뒤 특별전(‘낙랑’·2001)도 열고, 발굴보고서(<평양 정백리 8·13호분>·2002), <평양 석암리 9호분>·2018)도 펴냈는데요. 그 과정에서 흥미로운 명문 자료 하나를 읽어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알코올로 닦자 2000년 전 글씨가 그것이 평양 석암리 9호분 출토 노기(弩機·원거리용 화살 발사 장치)에 적힌 묵서명(‘조자릉 용·趙子陵 用’)이었습니다.

명문 발견은 극적이었습니다. 박물관 보존과학부가 2018년 <평양 석암리 9호분> 보고서를 펴낸 뒤 유물을 정리할 때인데요. 문제의 쇠뇌(쇠로 된 발사 장치가 달린 활)를 알코올로 닦는 과정에서 희미한 글씨를 본 겁니다. 예서(중국 한나라 시대의 서체)로 쓰인 ‘조자릉 용’이었습니다.

손환일 한국서화연구소장은 “‘조자릉 용’ 명문은 한나라 시대 생활 서체로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박물관 측은 “<후한서> 등 중국 사서에 ‘자릉’이라는 자를 쓰는 인물들이 여럿 보인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조자릉’은 한반도로 넘어온 중국 망명자이거나, 한나라가 낙랑군에 파견한 관리로 파악했습니다.

자연히 명문 노기의 소유자(혹은 사용자)는 ‘조자릉’일 가능성이 크겠네요. 박물관 측은 ‘석암리 9호분의 주인공=조자릉’이라는 결론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조자릉’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걸립니다.

기원후 1~2세기에 ‘조(趙)’와 같은 성을 썼다면 아무래도 중국인일 가능성이 크다는 선입관 때문입니다. 그럼 ‘조자릉 용’ 명문은 평양이 중국(한나라)이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낙랑군의 치소’임을 입증하는 예일까요.

‘왕(王)x’는 중국 ‘왕서방’ 이름? 시계를 1909년 9월로 돌려봅니다. 당시 통감부 고건축 담당 촉탁이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1868~1935)가 대동강 변의 고분을 발굴합니다. 발굴결과 고분의 무덤방에서 2점의 청동거울과 오수전 등이 쏟아져 나왔습니다(석암리 벽돌분).

두 달 뒤(11월) 이마니시 류(今西龍·1875~1932) 등이 이끄는 발굴단도 똑같은 형식의 무덤을 조사했습니다(석암리 을분). 이곳에서는 ‘왕(王)x’명 칠기 부품과 청동거울 등이 확인됐습니다. 두 발굴단은 고분 2곳 모두를 ‘고구려 고분’으로 판단했습니다.

2년 뒤(1911) 이마니시 류가 입장을 바꿉니다. 석암리 을분에서 나온 칠기 부품의 ‘왕(王)x’ 명문을 중국인인 ‘낙랑 왕씨’와 관련시킨 겁니다. ‘낙랑 왕씨’는 <후한서> ‘왕경’전에 등장하는 ‘왕경’ 가문을 가리키는데요.

<후한서>는 “왕경의 8대 조상인 왕중이 재북왕 흥거의 반란(기원전 177년)을 피해 동쪽 바다를 건너 낙랑 산중으로 피했다”고 했습니다. 이마니시는 <후한서>의 낙랑인 왕경이 바로 석암리 을분에 등장하는 ‘왕(王)x’라고 본 겁니다.

1916년 평양 석암리 9호분에서 출토된 순금제 띠고리. <평양 석암리 9호분> 보고서에는 7마리 용을 표현했다고 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큰 용 2마리, 작은 용 6마리 등 총 8마리로 보인다. 오른쪽 부분에서 얼굴을 밑으로 굽힌 듯한 큰 용 한마리가 표현돼 있음을 알 수 있다. / 이한상 대전대 교수 설명

1916년 평양 석암리 9호분에서 출토된 순금제 띠고리. <평양 석암리 9호분> 보고서에는 7마리 용을 표현했다고 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큰 용 2마리, 작은 용 6마리 등 총 8마리로 보인다. 오른쪽 부분에서 얼굴을 밑으로 굽힌 듯한 큰 용 한마리가 표현돼 있음을 알 수 있다. / 이한상 대전대 교수 설명

1년 뒤인 1913년 낙랑토성에서는 ‘낙랑예관(樂浪禮官)’과 ‘낙랑태수장(樂浪太守長)’을 새긴 명문 기와와 봉니(문서류를 밀봉할 때 쓴 점토)가 잇따라 발견됩니다. 이어 평남 용강군 어을동에서 토성과 함께 ‘점제현 신사비’가 발견됩니다. 명문 내용 중 ‘점제’가 낙랑군에 속한 25개 현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 부각됐습니다.

눈·코·입에 항문까지 막았던 장례용품 일본학계는 ‘낙랑’이라는 단어에 ‘혹’했습니다. 낙랑이라면 한나라가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멸하고 세운 한사군 중 하나가 아닌가. 313년(미천왕 14)까지 무려 421년이나 한반도 서북쪽을 지배해왔던…. 뭐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런 탓이겠죠.

조선총독부는 1916년부터 5개년 계획으로 벌인 고적조사 사업에 ‘평양 일대의 낙랑고분 조사’를 0순위로 꼽았습니다.

“…단군의 건국설화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 후세에 견강부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반도 역사상 비교적 연대가 명백한 것은 한치군의 시기가 처음이다…. 그래서 한치군 유적부터….”(‘고적조사 개요’)

이중 석암리 9호분은 1916년 1차로 조사한 10기 중 1기였답니다. 이 조사가 시쳇말로 ‘대박발굴’이었습니다. 무덤 주인공이 묻힌 나무관 안에서 각종 장신구가 실제 착용한 그 모습, 그 위치대로 노출됐습니다.

칼 손잡이와 칼집 일부를 옥으로 장식한 ‘철제장검(일명 옥구검)’과 금장식철제모자환두소도(금장식 고리 자루가 달린 작은 어미칼 및 자식칼 세트)가 확인됐고요. 주인공의 가슴과 눈, 코, 입, 귀, 항문, 손 등에 삽입했거나 놓았던 장례용 옥(玉) 세트가 나왔습니다. 무엇보다 화려한 순금제 띠고리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덧널(나무곽)의 안쪽에서도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향을 피우는 박산로, 음식 조리용 취사기와 식기, 술을 담은 그릇 등 각종 청동 및 금속 용기가 8점 나왔고요. 옻칠한 소반(작은 밥상) 등 다양한 칠기 29점이 출토됐습니다.

출토유물은 총 100건 365점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군계일학은 순금제 띠고리였다 그중 군계일학은 ‘순금제 띠고리’(국보)였습니다. 얇은 금판을 두드려 표면에 용 문양을 표현한 후, 푸른색의 터키석과 붉은색의 안료로 장식해 만든 허리띠 장신구였습니다. 금의 순도는 순금(24K)에 가까운 22.8~23.8K였는데요.

조선총독부가 1916년 5개년 계획으로 시작한 조선고적사업의 1차 대상은 평양 일대의 낙랑고분 발굴이었다. 조선총독부는 “단군 건국설화는 믿을 수 없어서 대상에서 빼고 한반도 사상 연대가 확실한 역사는 한치군(한사군) 시대가 처음”이라면서 “따라서 이 시기를 1차연도 조사에 넣는다”고 못 박았다. / 국립중앙박물관 <평양 석암리 9호분>(2018) 보고서

조선총독부가 1916년 5개년 계획으로 시작한 조선고적사업의 1차 대상은 평양 일대의 낙랑고분 발굴이었다. 조선총독부는 “단군 건국설화는 믿을 수 없어서 대상에서 빼고 한반도 사상 연대가 확실한 역사는 한치군(한사군) 시대가 처음”이라면서 “따라서 이 시기를 1차연도 조사에 넣는다”고 못 박았다. / 국립중앙박물관 <평양 석암리 9호분>(2018) 보고서

금판 한장을 말발굽 형태로 제작했습니다. 테두리 부분을 높이 5㎜ 정도로 접어 입체감 있게 만들었죠. 바탕 금판의 두께는 0.3~0.7㎜, 표면을 장식한 금선의 두께는 0.2~1.1㎜입니다.

각각의 용은 금선과 금알갱이로 눈, 코, 뿔 그리고 발가락 등을 표현했습니다. 중심 뼈대 부분은 금선과 굵은 금알갱이를 띠처럼 이어붙여 표현했습니다. 금알갱이의 지름은 0.3~1.6㎜에 불과합니다. 띠고리에 표현된 용은 몇마리일까요.

<평양 석암리 9호분> 보고서는 “얇은 금판을 작은 정으로 두들겨 7마리의 용을 표현했다”고 설명했는데요.

금공예 연구자인 이한상 대전대 교수가 이의를 제기하네요. “밑으로 급격하게 튼 얼굴이 보이지 않아 그렇지 오른쪽 부분에서 큰 용 한마리가 표현돼 있다”는 겁니다. 아닌 게 아니라 띠고리의 오른쪽 부분에 금알갱이로 뼈대를 표현한 큰 용의 몸통과 발톱이 보입니다. 숨어 있던 한마리가 나타났으니 모두 8마리가 되는 거네요.

또한 띠고리 표면에는 터키석을 끼운 물방울 모양의 알집 40개가 남아 있습니다. 현재 7개만 남아 있습니다. 또 하나의 핵심 유물은 ‘거섭(居攝) 3년명’ 옻칠 쟁반입니다. ‘거섭’은 전한의 마지막 군주인 유영(5~25·재위 6~8)의 연호(6~8년 사용)입니다. 석암리 9호분의 연대가 기원후 8년 무렵이라는 사실을 웅변해줍니다.

평양 석암리 9호분은 1916년 조선총독부가 1차로 조사한 고분 10기 중 하나였다. 석암리 9호분에서는 모두 100건 365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온 것으로 파악됐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평양 석암리 9호분은 1916년 조선총독부가 1차로 조사한 고분 10기 중 하나였다. 석암리 9호분에서는 모두 100건 365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온 것으로 파악됐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기부금까지 받아 낙랑고분에 집착 석암리 9호분의 발굴 성과가 전해지자 어떻게 됐을까요. 일제는 석암리 9호분 발굴과 1913년 조사된 낙랑토성까지의 발굴결과를 포함해 ‘평양 대동강 남안=낙랑군의 치소’로 비정했습니다.

그러자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한 일대에 ‘낙랑 광풍(狂風)’이 불어닥쳤습니다. 가뜩이나 한국 역사의 타율성과 정체성을 강조하려 했던 일제는 ‘옳다구나’ 싶었겠죠. 그때부터 ‘중국(한나라)의 지배를 받은 낙랑의 옛땅’을 파헤치는 데 혈안이 됩니다.

일제가 패망 직전인 1944년까지 ‘발굴조사’의 명목으로 파헤친 낙랑고분은 무려 93기에 이릅니다. 고비도 있었습니다.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의 여파에 따른 예산 절감 차원에서 조선총독부의 조직이 줄어들게 된 겁니다.

총독부를 대신한 건 바로 ‘조선고적연구회’라는 외곽 단체입니다. 연구회는 1931년 일본의 미쓰비시(三菱) 합자회사 사장인 이와사키 고야타(岩崎小彌太·1879~1945)의 찬조금(6000원)으로 시작했는데요. 해마다 민간기업과 도쿄(東京)제실박물관 등의 거액 자금 지원을 받아가면서까지 낙랑고분 등의 조사에 집착하게 됩니다.

한번 따져봐야겠죠. 낙랑 발굴을 주도한 세키노 다다시는 “조선은 예부터 중국 문화의 은혜를 입었고 그 침략을 받아 항상 복속해왔다”면서 “자연히 사대주의와 퇴영 고식주의(낡은 형식에 집착하는 낡아빠진 습성 등)에 빠져 국민의 원기도 없어졌다”(<조선의 건축과 예술>·1941)고 했습니다.

정체성과 타율성을 강조한 겁니다. ‘너희는 영원히 남의 나라 속국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과연 낙랑고분은 100% 중국 한나라의 문화를 대변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석암리 9호분의 덧널(나무곽)에서 출토된 철제장검(긴 칼) / 국립중앙박물관 <평양 석암리 9호분>(2018) 보고서

석암리 9호분의 덧널(나무곽)에서 출토된 철제장검(긴 칼) / 국립중앙박물관 <평양 석암리 9호분>(2018) 보고서

낙랑의 치소가 존재했다는 평양 대동강 남안의 고분들을 살펴볼까요. 한사군 설치 직후(기원전 1세기 무렵) 평양 일대의 무덤형식은 단순한 덧널(나무곽)무덤이었는데요. 기원전후에서 1세기 무렵부터 새로운 무덤이 등장합니다. 하나의 무덤 구덩이 속에 사각형 형태의 덧널(나무곽)을 만든 뒤 그 안에 다시 2개 이상의 나무관을 두는 다소 복잡한 무덤이었죠. 그래서 ‘귀틀묘’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가운데서도 ‘순금제 허리띠 장식’ 같은 국보급 유물이 쏟아진 ‘석암리 9호분’은 특히 심상치 않습니다. 기원후 8년 무렵에 조성한 이 고분 역시 귀틀묘인데요. 다른 귀틀묘와 견줘도 구조가 특이합니다. 무덤 구덩이 바닥에 돌을 깐 것은 물론이고요. 무덤 구덩이와 덧널 사이에도 냇돌을 채워넣었습니다.

고인돌, 즉 적석총이 전통적인 무덤형식인 고조선의 향기를 짙게 풍기고 있습니다. 또 보통 귀틀묘는 하나의 덧널 안에 나무관을 2개 이상 넣는 합장묘의 형태를 취하는데요. 석암리 9호분의 주인공은 한명뿐입니다.

물씬 풍기는 고조선의 향기 무덤 주인공의 신분이 지극히 높은 분이라는 얘기죠. 일본학자 이마니시 류는 석암리 을분에서 출토된 ‘왕(王)x’ 명문을 두고 뭐라 했습니까. <후한서> ‘왕경’전의 기록대로 ‘낙랑 왕씨’, 즉 한나라에서 망명한 인물(왕중)의 8대손(왕경)으로 보았죠.

그 말대로 설령 ‘왕x’이 ‘중국인=왕경’이라 칩시다. 그래도 8대, 즉 200년 이상 한반도에서 대를 이으며 살아온 인물(귀화인)을 중국인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또 같은 <후한서>는 “토인(土人)인 왕조가 낙랑태수를 죽이고 6년간(기원후 25~30) 낙랑군을 장악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토인(土人)’은 고조선계 재지(在地)세력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주인공의 가슴, 눈, 코, 입, 귀, 항문, 손에 삽입했거나 놓았던 장례용 옥(玉) 세트가 나왔다. / 국립중앙박물관 <평양 석암리 9호분>(2018) 보고서

주인공의 가슴, 눈, 코, 입, 귀, 항문, 손에 삽입했거나 놓았던 장례용 옥(玉) 세트가 나왔다. / 국립중앙박물관 <평양 석암리 9호분>(2018) 보고서

그렇다면 한때 낙랑태수를 자처한 ‘왕조’는 토착세력을 대표하는 고조선계 인물일 수 있습니다. 물론 ‘왕경’처럼 먼 옛날 한반도로 넘어와 완전히 고조선화한 인물일 수도 있겠죠. 어떤 경우든 ‘중국인’으로 단정해버리고 넘길 일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최근 석암리 9호분 유물(화살 발사 장치 부품)의 보존처리 과정에서 확인한 ‘조자릉’ 명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조(趙)씨=중국인’으로 해석하면 고조선의 체취가 나는 고분의 특성과 왕경 및 왕조 관련 역사 기록을 무시 혹은 오독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낙랑인이 중국인일까 국보인 ‘순금제 허리띠고리’는 어떨까요. 중국제를 굳이 대한민국 국보로 대접하는 것이 옳으냐는 의문이 생길 법하죠.

이 국보 허리띠와 비슷한 출토품이 평양의 낙랑고분 7기에서 나왔습니다. 2000년 전 이 땅에 터전을 잡고 살았던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받고 유행한 명품 허리띠였다는 겁니다. 그것이 중국제품이든, 고조선제품이든 국보의 대접을 받을 만합니다.

어떻습니까. 앞서 지적했듯이 덧널무덤에서 기원전후 귀틀무덤으로 바뀌는 와중에도 보이는 세형동검과 돌무덤의 전통, 정교하고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띠고리 문화는 무엇을 말해줄까요. ‘낙랑인=중국인’으로 도식화할 수 없는 증거가 됩니다.

그럼 낙랑과 낙랑문화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낙랑연구자인 오영찬 이화여대 교수는 “낙랑문화는 중국과 고조선 세력의 영향력이 교차하고 융합해 이룬 독특한 문화”라고 해석합니다. 이른바 ‘낙랑인’이라는 새로운 ‘종족집단(ethnic group)’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이제 ‘낙랑인’은 한국사의 당당한 주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겠네요.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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