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과 과학소설의 융합, 결과는?
환상소설과 공포소설 그리고 심지어 로맨스소설에도 나름대로 규칙이 있다. 추리소설에는 앞의 장르들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까다로운 규칙이 훨씬 더 많다. 개중에는 규칙을 넘어 금기에 가까운 것도 있다. S. S. 밴 다인의 ‘추리소설 작법 20원칙’의 일부를 보자.

<죽은 등산가의 호텔> 표지 / 현대문학
첫째, 범죄의 수수께끼는 엄격한 자연법칙에 따라 풀어야 한다. 점을 치거나 심령술(또는 최면술)을 사용하면 곤란하다. 둘째, 살인사건은 사고나 자살로 매듭지으면 안 된다. 끝까지 완주한 독자들에게 대체 무슨 짓인가. 셋째, 배후에 비밀결사나 대규모 범죄조직이 있다는 설정은 사절이다. 아무리 신출귀몰한 범행 같아도 배후에 큰 ‘빽’이 있다면 어려울 것도 없지 않겠는가. 이런 범인이 도주했다고 한들 가슴이 쫄깃쫄깃해지겠는가.
그런데 범인을 밝히는 이야기에 SF의 해법을 적용하면 어찌 될까. 위의 금기를 준수하되 추리소설답고 SF다울 수 있을까.
외딴 산장호텔에 휴양 온 중년 경찰 간부가 뜻밖의 시체를 발견한다. 전형적인 밀실 살인이다. 공교롭게도 눈사태가 일어나 오가는 길목이 하나뿐인 호텔에 용의자들(투숙객들)의 발이 묶인다. 머리 좋은 편은 아니나 우직한 이 경찰은 하나하나 증거를 확보해가지만 용의자들의 행적과 진술이 도움이 되기는커녕 혼란만 야기한다. 이를테면 모제스 부인이 죽은 걸 봤다는 시모네의 증언이 나오기 무섭게 그가 멀쩡하게 돌아다니거나 불청객으로 호텔에 들이닥친 루아르비크가 시체로 발견된 올라프를 보고 나서도 죽은 게 아니라며 우기는 식이다. 눈사태로 추가지원 요청도 어려우니 이 경찰은 왓슨(셜록 홈스의 조수)만도 못한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는다.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장편 <죽은 등산가의 호텔>은 4분의 3가량이 위와 같은 내용이다. 독자로선 대체 어떤 해결책 내지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하나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누구인가? 이들은 새로운 방식의 과학소설을 쓰려고 했지 전형적인 추리소설을 쓸 의도는 없었다. 그러니 두 장르 융합의 결과는 어땠을까. 앞서 말한 금기를 죄다 어겼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하겠다.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결말을 밝히진 않겠다. 다만 이 점은 분명히 해두겠다. 추리소설의 기조가 SF로 넘어가기가 무섭게 그간의 팽팽한 긴장이 삽시간에 와해됐다. 그 결과 추리소설이 용두사미가 되고 말았다. 과학소설로도 별로 독창적이지 않다. 차라리 SF로 풀더라도 시간여행(타임머신) 트릭을 썼다면 기존의 복잡한 플롯을 지탱하면서도 추리소설의 오라까지 웬만큼 간직했으련만 너무 뻔한 SF 클리셰에 의존하다 보니 솔직히 추리라 할 만한 걸 내세우기도 어렵다.
<죽은 등산가의 호텔>은 원래 정치색 짙은 이전 작품들로 인해 소비에트 당국의 눈총을 받던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경제적 곤궁함을 벗어날 겸 홀가분한 마음으로 쓴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오랜 기간 출간되지 못했다.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이전의 러시아소설은 정치색을 띠지 않아도 정치적으로 간주했다. 과학소설도 예외가 아니었다. 화성인을 만나도 계급투쟁을 잊지 말아야 했다. <아엘리타>(1922)의 망령이 여전히 선명한 시대였다.
<고장원 SF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