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어떻게 돌아왔나, 사라진 ‘신라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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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산 가야산 계곡의 큰 바위에 새긴 마애삼존불을 흔히 ‘백제의 미소’라 하죠. 세분 부처님의 얼굴에 담긴 꾸밈없고 밝고 너그러운 미소가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신라의 미소’가 무엇인지도 아시죠. 바로 ‘얼굴무늬 수막새’입니다.

‘신라의 미소’라는 별명을 얻은 얼굴무늬 수막새. 1934년 처음 소개됐다가 38년 만인 1972년 기증 반환됐다./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신라의 미소’라는 별명을 얻은 얼굴무늬 수막새. 1934년 처음 소개됐다가 38년 만인 1972년 기증 반환됐다./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서산마애삼존불은 바위 벽면에 새겼기 때문에 누구도 가져갈 엄두를 낼 수 없었겠죠.

그러나 이 얼굴무늬 수막새는 동산이잖아요. 일제강점기에 한 일본인 의사의 수중에 들어간 뒤 행방불명됐다가 38년 만인 1972년 극적으로 기증 귀환했습니다. 올해가 ‘잃어버린 신라의 미소’를 되찾은 지 꼭 50주년 되는 해입니다. 이참에 얼굴무늬 수막새의 매력과 극적인 귀환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웃는 낯으로 악귀를 쫓는다? 왜 이 얼굴무늬 수막새를 ‘신라의 미소’라 할까요.

사실 해방 이후 경주 황룡사터 등에서 발굴한 대형 치미와 미륵사지 출토 기와 조각에서도 사람 얼굴 무늬가 보입니다.

기와는 지붕을 덮으려고 점토 등을 가마에서 구워 만든 건축재입니다. 옛사람들은 그렇게 기능적인 측면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건물의 윗부분에 있으면서 하늘과 땅 그리고 신과 인간의 세계를 구분 짓는 장치로 인식했습니다.

옛사람들은 하늘과 맞닿은 건축물의 경계선을 다양한 문양을 새긴 기와로 장식했는데요. 기와에 건축물의 위엄을 높이고 재앙을 피했으며, 복을 바라는 주술적인 의미를 담았습니다.

보통은 무서운 동물이나 도깨비 문양(귀면문) 기와를 주로 썼습니다. 건축물에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물리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죠. 특히 기왓골의 끝을 메워 보호하고 장식하는 수막새는 이러한 ‘벽사(?邪·사악한 기운을 뿌리침)’의 의미를 담아 더욱 험상궂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더러 사람 얼굴을 새긴 기와들도 보이기는 합니다.

이 ‘신라의 미소’ 수막새를 보십시오. 어디 ‘벽사’의 의미로 만든 것 같습니까. 저런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무슨 사악한 기운을 쫓는다는 말입니까. 이상하죠. 연구자들은 이게 바로 매력이라고 합니다. 도깨비 형상 및 동물무늬 기와는 눈을 부라리고 이빨을 드러내 병과 불행을 몰고 오는 악령을 막으려 하죠.

진짜 악귀라면 웬만한 도깨비나 동물 얼굴쯤은 얼마든지 깔아뭉갤 수 있다는 겁니다. 얼굴무늬 수막새는 이 점을 노립니다. 험상궂은 표정 대신 넉넉한 미소로 사악한 기운을 돌려보낸다는 거죠. ‘난 당신을 해코지할 생각이 없어. 오히려 환대하니 당신(악령)도 날 해치지 마’ 하고 온화한 웃음으로 맞이합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악귀도 경계를 풀며 ‘피식’거리며 물러날 수 있다는 거죠. 얼굴무늬 수막새에는 이렇게 신라인들의 기발한 해학이 녹아 있습니다.

비대칭 얼굴의 미소 수막새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볼까요. 진흙의 함유량이 일반 기와보다 많고 매우 단단합니다. 기본적으로는 사람 얼굴이 음각된 목제틀에 넣고 찍어냈을 텐데요. 다른 수막새와는 다소 다릅니다.

한가운데 얼굴면은 틀로 만든 흔적이 없고, 기와 장인이 자기 손끝으로 눌러 세부를 표현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반 기와와는 달리 양쪽 눈과 광대뼈가 비대칭을 이루죠. 왜 좌우 얼굴이 완전 대칭인 사람은 드물지 않습니까. 그러니 수막새의 얼굴은 매우 자연스럽고, 그래서 더욱 인간적이라는 겁니다. 튀어나온 눈과 큼직한 코, 도톰한 입술이 눈에 띄는데요. 무엇보다 위로 올린 입가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압권입니다. 덕분에 ‘신라의 미소’라는 수식어가 붙은 거죠.

누가 이 기와를 만들었을까요. 수막새에 제작자를 새기지 않았으니 특정할 수는 없겠지만, 뭔가 짚이는 건 있습니다.

신라시대에 활약한 소조(塑造·조형미술)의 대가인 ‘양지 스님’이 수상쩍습니다. 이 수막새를 발굴한 곳은 영묘사터(처음에는 흥륜사터라고 잘못 지목)였는데요. ‘영묘사’는 선덕여왕(재위 632~647)이 창건(635)한 절입니다.

이 영묘사에 각종 소상(塑像·흙으로 빚어 만든 형상)을 만든 조각가가 있었는데, 그분이 바로 양지(良志) 스님이었습니다. <삼국유사>는 “여러가지 기예에 통달한 양지는 영묘사의 장육삼존상과 천왕상, 벽돌탑의 기와 그리고 사천왕사 탑 밑의 팔부신장 등을 제작했다”(‘의해·양지사석’)라고 기록했습니다.

양지는 ‘조형미술 전문’ 조각가였음이 분명합니다. 실제로 영묘사터에서 출토한 얼굴무늬 수막새를 비롯해 사천왕사에서 확인한 녹유신장상 등이 양지 스님이나 혹은 그의 유파가 남긴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박일훈 전 국립경주박물관장과 주선자 오사카 긴타로, 소장자인 다나카 도시노부 등 3자가 주고받은 편지. 모두 10여차례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얼굴무늬 수막새 기증을 결정했다./허형욱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박일훈 전 국립경주박물관장 유족 제공

박일훈 전 국립경주박물관장과 주선자 오사카 긴타로, 소장자인 다나카 도시노부 등 3자가 주고받은 편지. 모두 10여차례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얼굴무늬 수막새 기증을 결정했다./허형욱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박일훈 전 국립경주박물관장 유족 제공

잃어버린 ‘신라의 미소’ 이렇게 소박하고 천진난만한 ‘신라의 미소’를 영영 잃어버릴 뻔했다고요, 어찌 된 일일까요.

193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죠. 그해 6월 1일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조선’ 229호에 흥미로운 글이 실립니다.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1877~1974년 이후 사망)라는 인물이 오사카 로쿠손(大坂六村)이라는 필명으로 쓴 글(‘신라의 가면와·假面瓦’)인데요. 기와의 사진을 곁들인 이 글은 “이 기와가 경주 야마구치(山口) 의원의 의사인 다나카 도시노부(田中敏信)가 구리하라(栗原) 골동품상에서 몇개월 전에 구입한 유물”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오사카는 “경주 출토의 신라 기와는 다종다양한 무늬가 수준급이라 자랑할 만하지만, 이런 가면와는 단 하나도 출토되지 않았다”면서 “이 와당의 출현은 신라 예술 연구상 귀중한 자료의 하나”라고 극찬했습니다. 오사카는 소장자인 다나카의 허락을 얻어 이 기와를 소개했노라고 마무리했습니다.

수막새의 소장자라는 다나카 도시노부(1905~1993)는 누구일까요. 1933년 오사카(大阪) 의대를 수석 졸업한 뒤 조선으로 건너와 경주군 공의(公醫)로 근무했는데요. 다나카가 근무한 야마구치 의원 건물은 현재의 화랑수련원 자리(경주 시내 동부동 경찰서 건너)였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사진엽서를 보면 병원의 ‘취미실’이라는 곳이 있고, 그곳에 신라 기와를 비롯한 많은 문화재를 진열된 모습이 보입니다. 다나카가 이 무렵 얼굴무늬 수막새를 비롯한 다수의 신라 기와를 수집했을 겁니다.

소장자인 다나카의 동의를 얻어 수막새를 소개한 오사카 긴타로가 누구인지도 궁금하네요. 1915~1930년 사이 경주공립보통학교(현재 계림초등학교)에서 교사-교장으로 근무했다가 정년 퇴임했고요. 이후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국립경주박물관 전신)에서 근무하면서 1938년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제3대 경주분관장을 지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지역에서 출토된 기와에 표현한 사람 얼굴무늬. 미소 짓는 얼굴을 새긴 기와는 ‘얼굴무늬 수막새’가 유일하다.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고구려 백제 신라 지역에서 출토된 기와에 표현한 사람 얼굴무늬. 미소 짓는 얼굴을 새긴 기와는 ‘얼굴무늬 수막새’가 유일하다.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이렇게 소개된 얼굴무늬 수막새는 3개월 뒤인 1934년 9월 고고학자인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1881~1938)와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1890~1983)의 보고서(<신라고와의 연구>·제13책)에도 도판과 설명문이 실렸습니다.

이후 얼굴무늬 수막새의 존재는 잊힙니다. 소장자인 다나카가 1940년 귀국한 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까지 필리핀 전선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했기 때문입니다. 이후의 행적을 까맣게 잊은 거죠.

96세 스승에게 들은 낭보 1972년 2월 15일 당시 박일훈 국립경주박물관장(1913~1975)이 나라(奈良) 시장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합니다. 박 관장은 1920년대 말 경주공립보통학교를 다녔거든요. 이때는 오사카 긴타로가 이 학교의 교사였으니 박일훈과는 스승·제자 사이였습니다. 이런 인연 때문에 박일훈은 스승이 관장으로 있던 경주분관(박물관)에서 근무했고요.

박일훈 관장은 일본 방문 길에 옛 스승을 찾았습니다. 오사카는 당시 96세의 고령이었답니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주로 1930년대에 공유했던 신라 문화 이야기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이때 박일훈 관장의 뇌리에 얼굴무늬 수막새가 떠올랐습니다.

“참! 예전에 선생님이 소개한 인면문와당(얼굴무늬 수막새), 지금 어디 있나요?”

96세 노령의 오사카가 뜻밖의 대답을 했습니다. “(소장자인) 다나카가 지금 기타큐슈(北九州)에서 개업의사로 일하고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뜻밖의 말을 들은 박일훈 관장의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선생님이 그 와당을 경주박물관으로 기증하도록 주선하면 어떻겠습니까. 그 와당은 단 한개뿐인 귀중한 자료인데 개인이 소장하면 바로 사장(死藏)이 되잖습니까. 그러니 곧 신축할 경주박물관에 기증한다면 제자리를 찾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갑자기 조바심이 난 박 관장은 96세 스승에게 매달렸습니다.

박일훈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이 얼굴무늬 수막새를 살펴보고 있다. /박일훈 관장 유족 제공

박일훈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이 얼굴무늬 수막새를 살펴보고 있다. /박일훈 관장 유족 제공

“만약 기증한다면 신축 경주박물관의 개설기념으로 진열할 수 있습니다. 제 개인으로 봐서도 내년(1973년)이면 정년퇴직인데, 최후의 업적으로 남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정년퇴임의 업적으로 삼겠다”는 제자의 간곡한 부탁에 오사카는 결국 “알았네. 내가 다나카에게 (기증을 권유하는) 편지를 써보겠네” 약속했습니다. 박 관장은 다나카가 이 얼굴무늬 수막새를 100엔에 구입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요. 1930년대 기와집 한채 값이 1000원 정도였거든요. 깨진 기와를 거금을 들여 샀다는 얘기를 듣고 박 관장은 ‘기증 반환은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에 사실상 체념하고 귀국했다고 합니다.

신라를 대표하는 얼굴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귀국한 박일훈 관장에게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는데요.

“다나카가 기증 의사를 밝혔다”는 오사카의 편지를 받은 겁니다. 이후 박일훈 관장-오사카 긴타로-다나카 도시노부 등 3자가 10여차례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기증을 결정했습니다. 결국 1972년 10월 14일 경주를 방문한 다나카 부부가 이 수막새를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다나카는 기증서에서 “보는 이의 마음 깊이 감명을 주는 기와를 작업한 와공의 절절한 정성을 생각할 때 느끼는 바가 있어 신라의 국토에 안주(安住)의 땅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고 기증 이유를 밝혔습니다.

잊힌, 아니 영영 잃어버릴 수 있었던 ‘신라의 미소’를 그렇게 되찾았습니다. 이 미소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물건을 팔아야 하는 글로벌 기업의 심볼마크가 됐는데요. 얼굴무늬 수막새를 ‘과거의 얼굴’로, 그것에 영감을 얻어 제정한 심벌마크를 ‘미래의 얼굴’로 디자인했습니다. 기업의 얼굴인 ‘CI(Corporate Identity)’는 디자인이나 미학의 측면에서도 고객의 시선을 끄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요. 1400년이나 묵은, 고리타분한 구시대의 유물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물건을 팔아야 하는 글로벌 기업의 CI에 깊은 영감을 주었던 거죠. 그뿐이 아니죠. 1998년 열린 경주 엑스포의 공식 심벌마크도 ‘얼굴무늬 수막새’였습니다.

지금도 경주와 신라를 대표하는 상징 얼굴이 바로 얼굴무늬 수막새입니다. 경주 시내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얼굴무늬 수막새를 새긴 이미지 홍보물이 걸려 있죠.

돌이켜보면 1973년 정년 퇴임을 앞둔 박일훈 관장으로서도 얼굴무늬 수막새의 귀환은 그야말로 마지막 업적이 됐습니다.

박 관장뿐이 아니죠. 사실 일제의 강제병합이 없었다면 이 땅의 수많은 문화유산이 일본으로 건너갈 이유가 없었죠. 일본인의 원죄를 고려한다 해도 오사카와 다나카는 그래도 말년에 한국을 위해 ‘기증 반환’이라는 선물을 안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사카는 96세 고령임에도 기증을 위해 다리를 놓아줬고, 다나카는 내주지 않아도 될 소장품을 선뜻 내놓았으니까요.

특히 오사카 긴타로는 초등학교 교장 시절인 1921년 대서소를 운영했던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를 도와 금관총을 무단발굴하는 잘못을 저질렀거든요. 이때의 금관총 발굴은 전문가도 아닌 아마추어끼리 졸속으로 끝냈다 해서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요. 오사카로서는 그나마 말년에 수막새의 기증을 위해 다리를 놓은 것으로 조금이나마 용서를 구했다고나 할까요.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o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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