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처음부터 후자로 기운 심증을 입증하는 방향으로 몰고 간다.
제목 암살자들(Assassins)
제작연도 2020
제작국 미국
상영시간 104분
장르 다큐멘터리, 스릴러
감독 라이언 화이트
출연 시티 아이샤, 도안 티 흐엉, 하디 아즈미, 안나 파이필드 외
개봉 2021년 8월 12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수입/공동배급 ㈜더쿱
배급 ㈜왓챠
김정남 암살사건. 2017년 2월 13일 벌어진 일이다. 감독이 2명의 여인에 대해 판단하는 것처럼 기자의 취재와 보도도 거대한 체스판의 말과 같은 것이었을까.
영화는 김정남 피살의 여성 실행자인 시티 아이샤(29·인도네시아)와 도안 티 흐엉(33·베트남)의 행적에 초점을 맞춘다. 두 사람은 신경작용제 VX를 손에 묻혀 김정남의 뒤로 접근, 눈과 얼굴에 가스를 바른 뒤 유유히 공항을 빠져나갔다. 머지않아 두 사람은 말레이시아 경찰 당국에 잡혔다. 그 사이에 두 사람에게 살인을 사주한 북한사람들은 떠났고, 말레이시아에 거주하던 북한인 화학자는 당국에 잡혔으나 곧 석방돼 북한으로 돌아갔다. 사건을 기획한 교사범들은 떠났고, 아무것도 모르는 실행자들만 감옥에 남았다.
실행자만 남은 21세기판 완전범죄
말레이시아 사법 당국이 주목한 것은 이들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실행자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하는 행동이 특정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인지 알면서도 살인에 가담한 것인지를 가리는 일이었다. 애초 말레이시아 검찰 당국은 이들도 자신의 손에 묻은 물질이 과거 프랭크(frank) 비디오, 몰래카메라를 찍을 때 사람들에게 바르던 베이비로션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의심했다. 그렇게 재판이 진행되는 와중에 시티 아이샤는 검찰이 재판을 포기하면서 먼저 석방됐고, 시간이 더 지난 후 도안 티 흐엉도 석방돼 베트남으로 돌아갔다. 결국 ‘김정남 사망’이라는 사건은 남았지만 범인은 없는, 영화 포스터에 적힌 홍보사의 표현대로 ‘21세기판 완전범죄’가 일어난 것이다.
감독이 파고들어간 것은 이 ‘완전범죄’의 속살이다. 무죄를 받아내려는 변호인 전략대로, 이 사건은 철저히 정치적인 것이며, 정치적인 암살이다. 두 여성은 자신들 앞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는지 알지도 못하는 채 북한인 ‘보스’가 시키는 대로 더 그럴듯하게 몰래카메라 연기를 하려 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이 사건에 대해 잘 알 만한 전문가들을 거의 접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자는 사건이 일어나기 이틀 전 출고된 기사에서 박근혜와 김정일을 잇는 ‘가교’로 김정남-장성택 라인을 밝히는 기사를 썼다.
기자 역시 선댄스에서 이 영화가 상영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독의 개인 SNS 계정을 찾아 영화 내용에 대해 문의하려고 했지만 연결은 되지 않았다. 시사회가 끝나고 화상으로 진행되던 감독과의 대화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감독은 이 영화를 찍으면서 혹시 있을지 모르는 북한 에이전트의 공격을 당할까봐 무척 걱정했다고 한다.
잘 만든 다큐멘터리와 기사의 공통점
잘 만든 다큐멘터리는 잘 쓴 기사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팩트를 제시한다. 영화는 북한인 ‘보스’와 여인들이 나눈 채팅 메시지, 미공개 CCTV 자료 속 사건과 관련된 4명의 북한인의 동선 등의 ‘새로운 사실’들을 공개한다. 사건 뒤 출옥한 두 ‘암살자’들의 인터뷰도 여태까지 여러 매체의 인터뷰보다 그들의 관점과 심경을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김정남과 김정은의 관계, 김정남의 마지막 행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CIA 요원과 관련된 부분은 충분한 취재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정남과 관련된 이야기는 2004년부터 북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다는 애나 파이필드 전 워싱턴포스트 베이징 지국장의 인터뷰로 퉁친다. 감독은 장성택의 처형과 함께 김정남 암살을 김정은의 공포통치 예로 제시하고 있다. 수령절대체제를 형성하고 있는 북한의 특이한 권력관계에 대해서는 감독이 잘 모르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철저한 정보통제사회다.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유명한 은막 스타였다 갑자기 사라진 성혜림과의 사이에서 김정남을 낳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조차 거의 없는데 하물며 그의 암살로 잠재적인 경쟁자를 제거했다는데 누가 동의할까. 적어도 북한 권력 주변부에서는.
살인도구로 사용된 여성들이 ‘훈련된 암살자들일까 아니면 북한에 이용당한 순진한 하수인들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영화는 처음부터 후자로 기운 심증을 입증하는 방향으로 몰고 간다. 그러다 보니 긴장은 풀리고 내러티브는 느슨해진다. ‘세상이 분홍빛인 줄 알았다’는 출소한 도안의 후회처럼 비정한 권력게임에 휘말린 개인의 이야기만 사건의 교훈으로 남기기엔 너무나 아쉬운 소재다.
기사를 쓰다 보면 안다. ‘아, 이건 특종이구나!’ 하는 것을. 김정남과 국내 인사들의 교류를 담은 편지를 입수해 분석하면서도 느꼈던 경험이다. 특종은 주관적인 느낌이나 주장만으로 성립하는 건 아니다. 기자사회에서 특종이란, 다른 매체가 해당 보도를 인용하면서 받아 보도하는 경우다. 개인적으로도 처음으로 경험하는 세계적인 특종이었다. 중국의 CCTV, 일본의 주요방송과 CNN까지 ‘주간경향발 보도’를 인용했으니까. 일본 방송은 기자를 찾아와 김정남의 편지들과 취재 경위를 취재해갔다(사진).
1년 넘게 준비한 기사였지만 보도 시점을 결정한 것은 기자였다. 비록 김정남 암살계획이 이전부터 수립·계획돼 있었겠지만, 그 ‘스탠딩 오더’에 기자의 기사가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일 것이다. 주말, 인터넷을 통해 공개된 기사를 보면서 사건의 실행자들이 “아, 저 반동분자가 남조선의 박근혜 역도와도 내통하고 있었다고? 이거 안 되겠구만” 하고 자신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장면을 상상하곤 했다. 영화를 보면서도 살인이 기사와 무관하게 실행됐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역설적이었다.
영화의 완성도에 대한 아쉬움을 기사 본문에서 언급했지만, 적어도 김정남과 교류하고 있던 인사들, 예컨대 그와 대화한 내용으로 책을 펴낸 고미 요지 정도는 접촉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당시 기사를 쓰면서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고미 요지와 접촉해 김정남 e메일들의 진위를 검증했다. 영화의 말미 크레딧에 감독이 고미 요지의 책을 참고했다는 자막이 나오는데, 영어이름 철자가 틀려 고미 요기(yogi)로 표기하고 있다. 앞서 고용희의 경우 한국어자막 오류지만, 이 경우는 영화 자체의 자막 오류다. 사건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 어디에 쏠려 있는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