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최적의 감상을 위한 공연장의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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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세기경 만들어진 그리스 에피다우로스의 원형극장은 현대의 음향 전문가들도 감탄하게 할 만큼 음향효과가 뛰어나다. 최대 1만4000명이나 되는 관객들이 무대 위 배우와 악사들의 소리를 확성장치 없이 똑똑히 들을 수 있게 만들었다. 당대 건축가 폴리클레이토스 2세가 설계해 2단계에 걸쳐 지어진 이 극장은 무대를 중심으로 동심형의 반원을 이루는 55줄의 관객석 맨 뒷줄에서도 배우의 목소리를 또렷하게 들을 수 있어 그 비밀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증을 유발해왔다.

리모델링 후 재개관 예정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 및 객석 전경 / 국립극장 제공

리모델링 후 재개관 예정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 및 객석 전경 / 국립극장 제공

여러 세기 동안 두껍게 깔린 흙 속에 묻혀 있던 이 극장은 1881년부터 체계적인 발굴이 시작되면서 한 세기 가까이 지난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원형을 찾을 수 있게 복원됐다. 야외극장임에도 놀라운 음향효과를 간직한 점뿐 아니라 축조 당시의 원형이 완벽하게 보존된 점 역시 이목을 끌었다. 땅을 밟고 다져서 만든 무대에선 연극과 음악, 시 낭송 등 당시의 예술 공연이 이뤄져 마이크와 스피커 같은 음향장비가 전무하고 천장 없이 뚫린 야외극장을 지을 수밖에 없던 시대에 다목적 공연장으로서의 몫을 다한 셈이다.

총사업비 658억원 투입 대대적 개보수

극장 한가운데 놓인 돌을 중심으로 소리를 내면 극장 전역에 울려퍼지는 이 극장의 비밀은 후대의 공학자들이 규명해냈다. 니코 데클레르크 등 미국 조지아공대 연구진은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2층 구조의 관중석을 석회암으로 만든 덕에 현대의 음향기술로도 쉽지 않은 효과를 냈다고 밝혀냈다. 석회암으로 만든 객석과 계단은 몰려든 청중이 내는 웅성거리는 저주파 소음은 흡수하는 반면 무대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고주파 음성은 객석으로 반사한다.

인류는 이후 보다 발전한 기술을 이용해 다양한 형태의 공연장을 만들어왔다. 연극과 뮤지컬, 오페라 같은 실연예술을 비롯해 클래식과 재즈, 대중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 공연을 벌이는 공간까지 각각의 목적에 맞는 공연장을 만드는 능력은 그 문화권의 예술적 역량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정도다. 호주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나 미국 뉴욕의 카네기홀, 영국 런던의 로열 알버트홀 등 각국의 대표 공연장들은 최고의 기술과 미학을 바탕으로 무대에서 상연되는 공연 특성에 맞는 공간을 마련해온 대표적인 명소다.

국립극장의 대극장인 해오름극장이 3년여의 리모델링 기간을 거쳐 오는 6월 시범운영을 시작으로 재개관을 앞뒀다. ‘국립’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해오름극장의 리모델링에는 총사업비 658억원이 투입돼 쾌적한 관람환경을 갖춘 국내 대표 공연장으로서의 위상을 찾기 위한 각종 기술과 장비가 도입됐다. 1950년 창립한 국립극장은 1973년 10월 현재 위치인 서울 남산 자락으로 옮겨온 뒤 처음으로 대극장의 대대적 개보수를 단행했다. 남산 개관 당시로써는 최첨단 시설인 회전무대, 수동식 장치 봉 등을 갖춘 공연장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며 시설 또한 노후해 다양한 개성을 지닌 현대 공연 기법을 구현하기에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이번에 새롭게 단장한 공연장은 기존 1563석 규모에서 1221석의 중대형 규모로 바꿔 관람 집중도를 높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 기존 무대가 처음 만들어진 당시 가부키 상연을 염두에 두고 폭을 넓게 한 일본 국립극장을 모델로 한 탓에 가로 폭이 너무 넓다는 지적을 받아왔으나 이번 개보수로 무대 폭은 최대 17m로 줄이고, 객석 경사도는 높여 관객 집중도를 끌어올렸다. 무대 기계장치는 기존에 수동 혼합형으로 운영했던 23개 상부 장치 봉을 통합적으로 자동 운영되는 78개 장치 봉으로 변경해 섬세한 표현과 무대 전환이 가능하게 바뀌었다. 무대 바닥 역시 사용 빈도가 낮았던 대형 회전무대가 사라지고 오케스트라 연주단 등으로 전환이 용이한 승강무대 4개를 설치했다.

리모델링 방향을 선택할 때부터 중점적인 관심을 받은 음향 문제 역시 구조를 개선하고 첨단 음향장비를 갖춰 해결하고자 했다. 특히 중점을 둔 부분은 건축음향을 얼마나 개선하느냐에 관한 내용이었다. 별도의 음향장치 없이 무대 위 공연자들의 자연 음을 얼마나 듣기 편하게 전달하는지가 관건이었던 셈이다. 기존에 1.35초로 고정됐던 건축음향 잔향 시간(연주 후 소리가 실내에 머무는 시간)을 1.65초까지 확보할 수 있게 된 변화가 대표적이다. 객석 내벽에 설치된 48개의 음향제어 장치인 ‘어쿠스틱 배너’는 가변형이어서 공연의 성격에 따라 잔향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

오페라나 클래식, 뮤지컬 공연도 고려

공연장의 음질 개선은 공연장 건물의 기본적 구조와 형태에도 크게 영향을 받는 만큼 음향 전문가들에게도 사실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문제다. 특히 해오름극장은 오페라나 클래식, 연극 같은 특정 장르 하나만을 위한 공연장이 아니라 다목적 공연장이란 성격 때문에 모든 장르의 공연자와 관객을 모두 만족시키기는 어려운 근본적인 한계도 있다. 일반적으로 울림이 큰 대형 파이프오르간을 쓰는 종교음악 연주 시엔 최적 잔향 시간이 3초대로 가장 길게 요구되고, 오케스트라 연주는 2초대 이상, 실내악은 1.3~1.6초 선으로 음악의 특성에 따라서도 요건이 달라진다.

게다가 국립극장 상주단체는 국립국악관현악단, 국립무용단, 국립창극단 등으로 서로 다른 성격의 단체들이 같은 무대를 공유한다. 국악이라도 사람의 육성이 중요한 판소리 공연에선 자연음향이, 각각의 공연마다 음향에 초점을 맞춰야 할 지점이 천차만별인 무용과 창극 공연에선 전기음향과의 조화가 중요한 것이다. 이에 따라 해오름극장은 총 132대 스피커를 동원한 ‘몰입형 입체음향 시스템’을 국내 공연장 최초로 도입해 어느 한 장르의 특성에 음향효과가 치우쳐 관람경험을 해칠 가능성을 최대한 막는 데 주력했다. 지영 국립극장 책임음향감독은 “큰 소리에도 귀가 쏘거나 아프지 않은 특징이 있다”며 “관객의 위치에 따라 소리의 선명도가 달라지는 전통적인 스테레오 시스템보다 객석 어느 위치나 균형 있는 음향을 제공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해오름극장은 국악과 창극 등 전통적인 성격이 강한 공연이 주로 무대에 오른다는 특성이 있다. 이와 달리 오페라나 클래식, 뮤지컬 등에 특화된 국내의 다른 공연장 중에서도 음향을 포함한 공연설비가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 있는 곳도 많다. 장르별 공연장을 따로 둔 예술의전당에선 콘서트홀과 오페라극장, IBK챔버홀을 각 공연 분야에 맞게 운영한다. 웅장한 오케스트라 연주를 위해 2초 이상의 잔향이 필요한 음악홀의 경우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잔향 시간은 2.6초로, 세계적인 음악홀인 미국 보스턴 심포니홀의 2.52초,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의 2.59초, 오스트리아 빈의 무지크페어아인잘 2.49초와 비슷하게 유지되고 있다.

공연의 종류에 따라 궁합이 잘 맞는다고 평가되는 공연장들 역시 따로 있다. 금호아트홀은 클래식 실내악 연주나 독주회 등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악기가 배치될 때 필요한 짧은 잔향 시간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고양아람누리 역시 ‘슈박스’ 형태로 건축된 덕에 소리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지향성이 좋아 연주자들 사이에서 공연하기 좋은 연주장으로 꼽힌다. 뮤지컬은 선명한 음향을 위해 1초 안팎의 잔향 시간을 유지해야 한다는 요건 못지않게 배우들의 연기를 눈으로 봐야 하는 시각적 효과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기준에 잘 맞는 LG아트센터, 블루스퀘어, 디큐브아트센터 등 대형 공연장들도 고급 설비를 잘 갖춰 호평을 받는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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