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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아카데미도 진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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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미나리> 윤여정 수상 글로벌 시상식으로 거듭나

마르크스가 말했다. 인류의 역사는 진화한다. 그리고 할리우드의 아카데미도 진화한다. 말도 안 되는 농담 같은 얘기지만 적어도 하나는 맞다. 아카데미는 진화하고 있다. 그것도 빠르게.

배우 윤여정이 4월 25일(현지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 유니언 스테이션과 돌비극장에서 진행된 제93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 수상소감을 말하다가 얼굴을 감싸쥔 채 감격하고 있다. / AFP연합

배우 윤여정이 4월 25일(현지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 유니언 스테이션과 돌비극장에서 진행된 제93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 수상소감을 말하다가 얼굴을 감싸쥔 채 감격하고 있다. / AFP연합

보통 변증법에서 얘기하는 ‘양질전환의 법칙’이 일어나려면 중간에 한 번의 결절점·전환점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 그냥 질량만 늘어나서는 안 된다. 그것만으로는 다른 차원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아카데미는 지난 수십년간, 숱한 비난과 비판 속에서도 조금씩, 그리고 꾸준히 변화를 모색해왔다. 그것이 비록 자발적이든 외적 변화에 따른 것이든. 예컨대 처음에는 여성들이 나서서 이 와스프(WASP·화이트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백인 중산층)의 진영을 흔들었다. 그 초병에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캐스린 비글로 등이 있다. 여성과 더불어 아카데미 공격 대열에 나선 사람들은 흑인 감독과 배우들이다. 그 옛날의 시드니 포이티어를 시작으로 댄젤 워싱턴과 할 베리 그리고 투쟁의 선봉장 스파이크 리 등을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종교 쪽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문라이트>의 마허샬라 알리가 있다. <문라이트>는 인종과 종교 무엇보다 동성애자들, 성소수자들의 얘기를 다뤘다는 점에서 중층적 모순의 해결 지점이었다. 일종의 ‘약한 고리’ 이론이다. 이 영화가 2018년 <라라랜드>를 제치고 작품상을 수상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시상자로 나섰던 워런 비티가 처음에 <라라랜드>로 잘못 호명하는 촌극도 역설적으로는 극적인 모습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효과가 됐다.

지난해 <기생충>으로 지역주의 극복

흑인 이슬람 동성애 문제에 대한 의식전환을 미국사회에 던지고 요구하기 직전에 아카데미는 또 다른 ‘밑밥’을 깔기도 했다. 그 몇년 전후로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버드맨>, <레버넌트>)와 알폰소 쿠아론(<그래비티>), 길예르모 델 토로(<쉐이프 오브 워터>) 등 멕시코 감독들에게 작품상 감독상 개인상들을 쏟아준 것이다. 미국 내 히스패닉들이 당연히 환호할 일이었다. 실제로 미국에서, 그리고 전 세계에서 미국 내 히스패닉 문화에 대해 생각과 태도들의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자, 그러다가 아카데미는 한 번의 ‘빵때림’을 내리친다. 양질이 비로소 전환되는 순간이다. 봉준호의 <기생충>에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 4개를 몰아준 것이다. 할리우드가 그동안 극복하지 못했던 것은 지역주의다. 어쩌느니 저쩌느니 해도 미국의 국경 밖을 넘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이전에 봉준호에게서 아카데미는 로컬상에 불과할 뿐이라는 지적을 받았을 정도였다. 미국 국경 밖에는 칸과 베를린, 베네치아 등이 도사리고 있고 그 오랜 전통의 영화제에 명함도 못 내밀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아카데미는 그 문제를 봉준호를 선택함으로써 일거에 해결했다. 아카데미는 이제 명실공히 로컬에서 글로벌로 공간 이동을 해냈다. 봉준호는

<스타 트렉>의 커크 선장처럼 아카데미라는 스타 트렉의 크루들을 한꺼번에 스페이스를 이동시키는 위대한 일을 해냈다.

물론 아카데미의 이 같은 선택은 매우 정치적인 것이기도 했다. ‘트럼프 시대의 광기=이민자 탄압=백인 우월주의=온갖 차별정책’이야말로 그동안 미국이 추구했던 사회적 가치의 훼손을 가져왔다고 ‘미국 내 합리주의자들=문화예술인=할리우드’는 판단했다. 게다가 지난해는 미국 선거가 있는 해였다. 아카데미는 보란 듯이 반트럼프주의를 선포했고, 더욱더 보란 듯이 변방의 나라 한국의 감독에게 수상을 몰아줬다. 게다가 <기생충>은 트럼프가 제일 싫어하고 경계하는 계급문제, 특히 양극화문제를 건드리는 내용이었다. 이래저래 <기생충>은 아카데미의 선택에 중요한 기점 위에 서 있는 작품이 됐다. <기생충>의 수상은 그래서 매우 필연적이었다.

이번 <미나리>의 수상이라기보다는, 윤여정의 성취 역시 그 같은 맥락에서 판단할 수 있는 일이다. 아카데미가 보기에 지금 시점에서 미국은, 미국사람들은 한가지 태도를 확실하게 하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이고, 이민자들의 손에 의해 건국된 나라라는 것이다. 그 점을 잊어서는 안 되는데 현재 미국의 국가와 체제, 시스템이 자꾸 그 점을 방기하고 있다. 한가지 문제는 다른 또 한가지 문제를 낳고 이어 또 낳고 또 낳는 바람에 모순은 대개 중층적으로 겹겹이 쌓이게 마련이다. 지금의 미국사회는 반이(난)민, 인종, 종교, 성별, 계급, 계층, 코로나19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요즘엔 그 최첨단의 맨 앞단에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 문제가 깔려 있다고 본다. 무식한 미국 대중이 중국인이라고 대충 뭉뚱그리는 아시아인 전체가 지금, 때아닌 시대에 차별 폭력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는 이 점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으며 중국 여성 감독 클로이 자오와 한국 여배우 윤여정에게 스포트라이트를 가게 한 것은 그 같은 복합모순을 앞장서서 해결하겠다는, 그 해결의 프로파간다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셈이다. 이번 윤여정의 수상으로 아카데미는 아시아를 파트너로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를 확실하게 보여준 셈이며, 무엇보다 로컬영화상 시상식에서 글로벌 영화상 시상식으로 완벽하게 거듭났음을 선언한 셈이 됐다. 이제 아카데미에서 외국 영화가 수상 여부를 탐문할 곳은 국제영화상(과거 외국어영화상) 부문 하나만이 아니게 됐다. 로컬은 글로벌이 되고 글로벌은 로컬이 된다. 특수는 보편이 되고 보편은 특수가 된다. 다시 변증법이다.

미국 내 코리안 아메리칸 위상 높아져

그런 면에서 이번 <미나리> 수상에서 아까운 사람들은 두 사람이 더 있다. 정이삭과 스티븐 연이다. 이들은 각각 감독상·시나리오상과 남우주연배우상에 올랐지만 아깝게 탈락했다. 그럼에도 이들이 그 어렵다는 후보에 진출한 것을 보면 미국 내 코리안 아메리칸의 위상이 확실하고 확고하게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이제는 이들이 명실공히 할리우드의 주류가 될 것이다. 이는 더 나아가 할리우드가 세계 다양성의 주류, 주요 무대로서 존재감을 높일 것임을 시사하는 셈이다. 세계는 이제 섞이고, 그것도 마구마구 뒤섞여야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게 됐다. 이제 서로 오픈하지 않으면, 인종과 민족, 종교와 성적 취향, 피부 색깔에 대해 차별을 없애지 않으면, ‘먹고살 수가’ 없다. 소통하고 교역해야 한다. 무엇보다 인간 스스로 인간답게 살고 삶의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는 함께 연대해야 한다. 정이삭과 스티븐 연은 그 같은 세계적 유대감의 확대와 확장에 큰 역할을 해낼 것이다.

한국 영화의 성취는 한국사회의 역동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분석될 수 있다. 어쩌느니 저쩌느니 해도 한국사회는 조금씩이나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사회 민주화와 개방화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영화가 좋아질 수 없다. 그 역도 성립한다. 영화가 사회역사적 컨텍스트를 갖거나 가지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사회 민주화와 개방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이다. 또다시 변증법이다.

아카데미가 진화하고 있는 것은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다. 영화가 좋은 세상을 꿈꾸고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영화는 선함과 좋은 세상을 꿈꿔야 한다는 당위를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여정의 여우조연상 수상은 나무만으로 보려 하지 말고 숲으로 봐야 하는 대목이다.

마르크스가 살아 있었다면 자신의 저서의 개정판을 냈을 것이다. 그리고 문구를 수정했을 것이다. 인류는 진화한다. 그리고 아카데미도 진화한다, 라고.

<오동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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