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연민의 함정에서 벗어나 쓴 자기 기록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나는 인터뷰를 해 타인의 삶에 대해 쓴다. 기록하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만나 강의를 하게 될 때도 있다. 늘 첫 시간에는 누구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쓰고 싶은지 묻는다. 기록의 주제는 다채롭다. 그중에 한두명은 엄마의 삶을 쓰고 싶어하는 딸일 때가 많다. 모든 기록이 어렵지만, 딸이 엄마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특히 더 어렵다고 말씀드린다. 대체로 친밀한 관계일수록 기록이 어렵다. 여러 감정과 사건이 얽혀 있는 관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의 한 장면 / 버프툰

<나의 살던 고향은>의 한 장면 / 버프툰

서로 대화를 시작하면 두 사람이 공유한 경험에 대해 기억이 서로 얼마나 다른지를 확인하게 된다. 기억은 감정을 소환한다. 소화되지 못한 감정들이 순식간에 들끓는다. 실은 그것이 기록을 간절히 원하게 된 이유다. 감정이 아니라 감정이 형성된 맥락을 잘 살펴야 한다. 그런 거리 두기는 타인과 나, 이 대화를 하는 두 사람 모두에게 존중을 가질 때 가능하다. 친밀한 관계는 그게 어렵다. 특히 엄마는 더 ‘만만하다’. 엄마라는 존재의 사회적 위치, 가족 안에서의 위치가 낮아서다. 그 위치성과 서로의 관계성을 성찰해야만 기록이 가능하다.

실은 모든 기록이 그렇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사실 중 하나는 과거의 어느 시점을 ‘그대로’ 재현해내는 기억이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어느 곳 어느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진실’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기억에 대해 쓰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기억이 늘 상황적이란 사실이다. 가령 때린 사람은 때린 기억을 잊는데, 맞은 사람은 잘 기억한다. 맞은 사람에게만 ‘별일’이라서다. 누군가의 삶에서 어떤 경험은 왜 ‘별일’이 되는가. 그 또한 그가 이 세계 속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모른다면 이해할 수 없다.

타인의 삶을 말하고자 한다면, 이 세상의 구조를 배워야 한다. 페미니즘, 인류학, 사회학 등 인간과 사회에 관해 말하는 학문에 기웃거려보기라도 해야 한다. 쓰는 ‘나’ 또한 세계의 일부임을 잊지 않아야만 한다. 자신이 무중력 상태에 있다고 가정하고, 세계를 ‘논평’하는 자의 위치에 놓는 글을 자꾸 쓰다 보면 타인의 삶에 대해 함부로 말하게 되기 쉽다. 며칠 전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김민식 피디의 ‘지식인의 진짜 책무’는 그렇게 하다 처참해진 글이다. 그에게 선우훈 작가의 <나의 살던 고향은>을 권한다.

이 작품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선우훈’이란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관한 자기 서사다. 자기 기록이 쉽게 빠지는 자기 연민의 함정에서 벗어나 내 세계를 기어이 새롭게 써내고 마는 다정하고 사려 깊은 이야기다. 아버지가 어릴 때 세상을 뜬 뒤, 작가는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서울에서 정읍으로 이주했다. 서울로 와 미대를 다니고, 만화가가 되고, 결혼 후 또 다른 가족을 꾸리기까지의 그의 삶이 연대기 순으로 펼쳐진다.

그를 둘러싼 친밀한 사람들과의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의미 있는 건 그가 ‘나’와 ‘타인들’의 세계 속 위치를 섬세히 살피는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다. 내가 약자일 뿐만 아니라 어떤 관계에서는 힘을 가진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순간을 풀어내는 방식이 흥미롭다. 하나하나 점을 찍어 그려낸 선우훈 작가 특유의 따뜻하고 반짝이는 그림처럼 그가 곱씹고 공들였을 사유의 시간에 존경을 보낸다.

<박희정 기록활동가>

만화로 본 세상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