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 밀매인> 마약을 둘러싼 연쇄살인, 형사들의 활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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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는 가히 경찰소설의 교과서 격인 작품이다. 그것도 꽤나 방대한 교재. 1956년 <경찰 혐오자>로 시작한 시리즈는 2005년 작가 에드 맥베인이 사망하기까지 55권의 책으로 가상의 도시 아이솔라에서 분투하는 87분서 형사들의 활약을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작품마다 시리즈의 주역인 스티브 카렐라 형사만이 아니라 동료 형사인 마이어 마이어, 버트 클링, 코튼 호스, 아서 브라운 등이 번갈아 전면에 나서면서 형사 개개인의 개성과 다채로운 시각이 돋보이는 흥미로운 군상극을 이루는 게 특징이다. 더욱이 여러 형사의 특별한 면면이 개별 사건에 깊숙이 개입하는 것은 물론이고, 경찰 정보원을 비롯한 다양한 주변 인물과 아이솔라의 뒷골목까지 차례로 포섭함으로써 가상 도시에 약동하는 생명력마저 불어넣었다.

에드 맥베인의 <마약 밀매인> 한국어판 표지 / 피니스아프리카에

에드 맥베인의 <마약 밀매인> 한국어판 표지 / 피니스아프리카에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인 <마약 밀매인>은 87분서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는 초기 대표작 중 하나다. 빈민가 지하실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한 것으로 보이는 10대 소년의 사체가 발견된다. 사망한 소년은 푸에르토리코 이민자로 이 근방에서 가장 유명한 마약 판매상으로 밝혀진다. 그리고 그의 사인 또한 교살이 아닌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상한 일이다. 목에 감긴 밧줄은 숨을 거둔 뒤 감긴 게 분명하고, 소년의 사체 옆에 떡하니 놓여 있는 주사기에는 그의 것이 아닌 다른 이의 지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즉 범인은 마약 과용으로 인한 자살 혹은 사고사로 충분히 위장할 수 있는 범행을 굳이 타살 정황이 보이도록 애써 꾸며놓은 것이다. 카렐라 형사는 마약 구매자들을 통해 용의자를 압축하고 곧 ‘곤조’라는 별명의 마약 밀매인을 찾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다. 한편 피터 번스 반장은 주사기에 남은 지문이 자기 아들의 것임을 알리는 의문의 협박 전화를 받고 내내 갈등한다.

사건은 이내 연쇄살인으로 치닫고, 수사를 거듭하며 어둠을 향해 계속 침잠하는 카렐라 형사의 눈은 시종 도시 언저리를 응시한다. 일찌감치 마약에 중독된 10대만이 아니라 돈 몇 푼에 몸을 팔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이민자 여성들, 그리고 이들에게 기생하는 온갖 인간들. 심지어 결말에 이르러서는 이 밑바닥 인생들을 이용해 살인도 불사했던 범인의 진짜 의도가 드러나는데 그 살해 동기가 너무나도 미약해 더더욱 묵직한 충격을 안긴다. 물론 이와 동시에 로저 하빌랜드 형사가 용의자를 윽박지르며 심문하는, 위트 넘치는 장면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중 하나다. 87분서 시리즈는 각자의 영역에서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는 경찰 관계자들을 통해 한 명의 명탐정만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현대 범죄와 이에 대응하는 시스템의 면면을 요소요소에 흥미롭고도 치밀하게 그려낸다.

게다가 <마약 밀매인>은 시리즈의 분기점이 될 만한 선택으로도 큰 의미를 가진다. 원래 에드 맥베인은 범인의 총에 맞아 생사의 기로에 선 카렐라 형사에게 죽음을 선사하고 이후부터는 다른 인물을 앞세우려 했다. 하지만 편집자의 완강한 만류로 그는 ‘부활’했고, 이후 카렐라 형사는 묵묵히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는 대표적인 민완 형사이자 도시의 소영웅으로 자리매김했다. 당연히 경찰소설의 역사적 정점으로 가는 길 또한 이 결단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이 틀림없다.

<강상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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