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상’ 꿈꾸었던 청춘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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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 해체를 앞둔 1980년대 소련과 대공황 및 파시즘의 대두로 혼란스런 1930년대 영국. 얼핏 보기엔 정치적으로도 이념적으로도 전혀 다른 사회처럼 보이지만, 국가 혹은 이념을 위한 맹목적인 충성과 복종을 요구한다는 점에서는 별반 다를 바 없다고도 볼 수 있다. 줄리안 미첼 작, 김태한 연출의 연극 <어나더 컨트리>는 이 두 사회 양쪽에 속했으면서도 어느 곳에서도 마음을 붙이지 못한 채 ‘다른 세상’, 곧 어나더 컨트리를 꿈꾸었던 한 청춘의 씁쓸한 기억을 담은 작품이다.

로네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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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소련 해체 직전, 평생을 소련의 스파이로 일했던 영국 출신의 엘리트 관료 가이 베넷의 인터뷰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가문, 계급, 학력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었음에도 조국을 배신하고 공산주의 국가를 위해 일했던 이유를 묻자, 그는 회한에 찬 음성으로 자신의 학창시절을 떠올리기 시작하고,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1930년대 영국의 명문 기숙학교, 여기 모인 젊은이들은 엄격한 규율과 통제 속에 전통과 명예를 체득하고 실천하면서 미래의 영국 사회를 이끌어 갈 재목으로 자라고 있다. 이곳 기숙사에는 지도를 담당하는 선생이 따로 없다. 모든 일과와 행동은 학생들 스스로 만든 규칙과 규범에 의해 이루어지며, 이를 어길 시에는 규율부와 학생회의 회의를 통해 자체적으로 처벌받는다.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청년 가이 베넷은 엄격한 학교 시스템과 규율을 틈틈이 비웃고 무시하며 사소한 일탈들을 이어간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는 자신이 이 시스템에 속해 있고 이로 인해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음을 알기에, 가벼운 일탈 이상의 선을 넘지는 않는다. 가이는 사회 최고층이 되고 싶다는 야망을 품고 있으며, 프랑스 대사라는 명확한 꿈을 지니고 있는 청년이다.

<어나더 컨트리>는 이렇듯 전통과 명예를 중시하는 영국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기숙사 학생회 임원이었던 가이가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이러한 가치들의 허상과 위선을 깨닫고, 스스로 그 시스템을 나와 배신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기숙사 내 ‘공공의 적’인 파올로에 대항해 모두가 연대하는 것 같았지만, 실은 각자의 욕망과 이익을 위한 행동이었음을 알게 되면서 가이는 그토록 가치를 부여해온 전통과 명예가 실은 기득권을 위한 매우 정치적인 선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평생 적국 소련의 스파이로 살았다는 그의 회고는 그가 얼마나 영국 사회에 염증을 느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며, 또한 그의 동료이자 공산주의자로 늘 계급타파와 평등을 부르짖었던 친구 토미가 미친 영향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첫 장면에서 가이 베넷은 인터뷰 도중 자신이 스파이로 일했던 소비에트 연방과 공산주의 체제가 이미 무너졌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작가는 이를 통해 모두가 평등한 ‘지상낙원’을 약속했던 공산주의 역시 하나의 허구에 불과했음을 날카롭게 드러내고 있다. 결국 평생을 방황하며 가이가 꿈꾸었던 ‘다른 나라’, 어나더 컨트리는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8월 11일까지, 대학로 유니플렉스 1관.

<김주연 연극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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