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따갑도록 “아따, 행님요”를 외치던 배정남의 눈이 슬며시 풀리기 시작했다. 그런 배정남을 바라보는 차승원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분이 오셨네, 오셨어.”
유해진은 “체력을 한 번에 확 쓰지 말고 나눠 써라”고 조언하면서도 눈가에 안쓰러운 감정이 한가득이다. 결국 배정남에게 휴식을 권하는 형님들, 그리고 형님들의 권유를 마다않고 넙죽 받는 배정남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이 훈훈해졌다.

tvN 제공
나영석 PD의 신작 tvN <스페인 하숙>은 새로움보다 익숙함이 앞선 프로그램이다. 차승원, 유해진의 조합은 <삼시세끼>를 떠올리게 하고 낯선 곳을 찾는 이들에게 밥을 먹인다는 콘셉트는 <윤식당>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심지어 스페인은 <윤식당>의 두 번째 시즌을 촬영한 곳이다. 나영석 PD 자신도 “‘삼시세끼’+‘윤식당’이라는 댓글을 읽었는데 아주 다르다고 말하기 힘들다”고 고백했다. 나 PD의 말마따나 차승원, 유해진을 우주정거장에 데리고 간다고 해도 그들이 쉽게 변할 캐릭터도 아니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구성에 제작진이 회심의 카드로 투입한 배정남은 예상대로 ‘예능 만렙’의 재기를 보였다.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로 “행님요”를 속사포처럼 쏟아내지만 탄탄한 근육질 몸매와 달리 ‘연비’가 좋지 않은 것은 의외의 반전이다. 마늘 몇 개를 빻은 뒤 ‘당 떨어진’ 표정으로 눈이 풀려버리고 아침식사를 치우며 힘들다고 한숨을 내쉰다. 멘붕 속에서도 길을 찾고 할배들의 수발을 들던 <꽃보다 할배>의 이서진이나 누나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 갖은 구박을 받았던
<꽃보다 누나>의 이승기, 시키는 건 꾸역꾸역 다했던 <삼시세끼>의 옥택연, 손호준, 윤균상과는 확연히 차별화됐다. 영화 <극한직업> 속 인기 대사를 표절하자면 지금까지 이런 막내는 없었다.
<스페인 하숙>의 묘미는 단순히 배정남의 반전매력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를 배려하는 형님들의 모습에서 이제까지 우리 사회가 갓 입사한 막내에게 행했던 무언의 압력이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신호가 읽힌다. 막내는 회식 자리에서 선배들 컵의 물을 따르고 부지런히 수저를 챙기며 삼겹살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는 게 일종의 의무였다. 업무를 마쳐도 상사가 퇴근하지 않으면 눈치를 봐야 했고 집에 가고 싶어도 원치 않는 술자리에 끌려가곤 했다. 어쩌다 피곤에 절어 책상 앞에서 졸기라도 하면 “빠져가지고…”라는 힐난을 듣기 일쑤였다. <스페인 하숙>의 선배 차승원과 유해진은 촌스러운 구습에서 벗어나 막내를 하나의 성숙한 인격체로 대한다. 충분한 휴식시간을 보장하면 집중력 있게 자신의 일을 해내는 걸 알기 때문일 것이다. 아늑한 잠자리, 맛깔난 밥 한 끼만큼 따뜻한 선배들의 배려이자 자세다.
어디를 가나 세대 간 갈등이 첨예한 시기다. 직장마다 ‘요즘 애들’이라 불리는 90년대생들이 속속 입사하는 지금, 막내를 향한 차승원과 유해진의 배려를 선배들이 먼저 익힐 것을 권한다. 군기 잡기보다 후배들을 보듬는 선배가 훨씬 멋있어 보이는 세상이다.
<조은별 브릿지경제 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