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광화문 광장은 약자들에게 주어진 최후의 공간이다. 권력을 향해 삿대질만 해도 잡아가던 암흑의 시대가 있었지만 국민들은 뭉친 힘으로 마침내 비원의 공간을 확보했다.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광화문 광장에 섰다. 청와대 뒷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은 여전히 가슴팍을 파고든다. 모두가 촛불을 들어 나쁜 정권을 허물었지만 광장 구석에서는 오늘도 촛불을 켜는 사람들이 있다. 울고, 소리치고, 기도하고 있다. 먼 바다, 먼 땅에서 일어난 사건도 광화문 광장에서 최후의 의식을 치른다. 며칠 전에는 김용균 노동자의 영결식이 있었다. 세월호에서 숨진 학생들은 아직도 이곳에 머무르고 있다.
광화문은 조선시대 권력의 정문이었다. 권력을 지켜야 했기에 웅장했고, 권력의 위엄을 보여야 했기에 화려했다. 시국이 수상하면 광화문 앞에 백성들이 모였다. 왕들은 광화문 앞 민심이 궁금했다. 동학농민들의 함성이 누리를 덮을 때 무능한 군주 고종은 광화문이 무너지는 꿈을 꾸었다. 이에 놀라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겼다. 광화문 앞은 권력과 민심이 섞이는 최후의 공간이었다.
1876년 새해, 참판을 지낸 최익현이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 나타났다. 적들의 배가 출몰하고 민심이 흉흉할 때였다. 강화도에서 승전을 거둔 일본은 나라 문을 열라며 무력시위를 벌였다. 계속되는 협박에 왕과 대신들이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때 평민 신분의 최익현이 엎드려 왕에게 글을 올렸다. 이른바 지부상소(持斧上疏)였다.
“화친이란 상대편이 구걸하고 우리에게 힘이 있어 능히 그들을 제압할 수 있어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겁에 질려 화친을 요구한다면 지금 당장은 숨을 돌릴 수 있겠지만, 이후 그들의 끝없는 욕심을 무엇으로 채워주겠습니까.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첫째 이유입니다.”
최익현은 상소를 묵살하려면 도끼로 자신의 머리를 쳐달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 최익현은 그 도끼로 군주의 무능함과 대신들의 무사안일을 내려쳤다. 최익현을 처단하라는 대신들의 청이 빗발쳤지만 왕은 죽일 수 없었다. 고종은 최익현을 귀양 보내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그 도끼는 바로 백성들의 아우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최익현의 상소는 읍소가 아니라 호통이었다.

김택근
지금도 광화문 광장은 약자들에게 주어진 최후의 공간이다. 권력을 향해 삿대질만 해도 잡아가던 암흑의 시대가 있었지만 국민들은 뭉친 힘으로 마침내 비원의 공간을 확보했다. 천막이 즐비하고, 깃발이 나부끼며, 구호가 터져 나오는 광화문 광장은 얼마나 건강한가. 누구는 그만하면 됐다고 한다. 하지만 그만해서 될 일이 따로 있다. 그만할 수 없기에 광화문 광장을 찾은 것이다. 그들을 시민들이 품어주고 있다.
요즘 서울시가 이름도 억지스런 ‘광화문 재구조화 사업’을 추진한다고 한다. 몇 번 생각해도 서울시가 단독으로 추진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광화문 광장은 전국의 핏빛 사연들이 모여드는 국민의 광장이다. 또 광장의 촛불을 잊지 않고 있다는 대통령이 ‘광화문 옆 집무’ 약속을 깨버렸다. 돈이 많이 들고 안전에도 문제가 있다고 했다. 변명이 왜소하다. 집무실에서 세상 끝에 매달린 울음, 외침, 기도를 듣고 보았으면 좋았을 것을.
오늘도 광화문 광장에서 머물 곳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아까부터 온통 노란색 천으로 뒤덮인 차량이 광장 주변을 돌고 있다. 검은 글씨로 쓰인 고딕체 문구가 약간 허술하다. 대기업에서 막 쫓겨난 사람들 같다. 그들이 좋은 자리를 찾고 있었다.
<김택근 시인·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