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를 실제 달리도록 만드는 만화 ‘달리기’
<달리기>는 독자를 달리기로 이끌지만, 동시에 달리기를 은유로 활용해 ‘삶’의 자세 또한 넌지시 일깨운다. 5㎞, 10㎞, 42.195㎞를 달려본 사람만이 아는 기분을 궁금하게 만들며 삶의 이런저런 경험을 시도하고 이어나가는 것을 거든다.
말과 사람이 경주를 한다고 생각해 보자. 누가 이길까? 아마 대부분이 의심의 여지없이 말이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이렇게 묻는다면 어떨까? 장거리 경주마와 마라토너 황영조가 42.195㎞를 달린다면? 이 경주의 승자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웹툰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이하 <달리기>, 저스툰, 돌배 작가)는 힘주어 말한다. 특히 날씨가 덥다면 신체적으로 열 배출 시스템이 잘 갖춰진 사람이 말보다 더 유리하다. “장거리 달리기 종목에서만큼은 호모 사피엔스가 1위입니다.” 본인 스스로 아마추어 마라토너이고, 장거리 달리기 관련 해외 논문까지 섭렵한 돌배 작가가 작품을 통해 보내는 전언이다.
<달리기>는 <샌프란시스코 화랑관>(네이버웹툰)으로 데뷔해 <계룡선녀전>(네이버웹툰)으로 확고한 이야기꾼의 입지를 다진 돌배 작가의 최근작이다. <달리기>는 연재 초반부터 본격 달리기 권장 웹툰으로 소문났다. 보고 나면 달리기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독자들이 입을 모아 말한다. 나도 글을 쓰기에 앞서 달리기를 하고야 말았다. 군 제대 후 10년 넘도록 달리기라곤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을 달리기로 이끌 만큼 <달리기>는 설득력이 상당하다. 앞서 말했듯 작가의 경험이나 다양한 참고문헌을 통한 지식에서 나오는 설득력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이야기 속에 제대로 녹아 있지 않았더라면 설득은 불가능하다.
이야기는 막 여자친구와 헤어진 태수로부터 시작한다. 실의에 빠져 있던 태수는 평소 달리기를 규칙적으로 하며 아마추어 마라토너로 살아가고 있는 오랜 친구 바람이 출전하는 마라톤 대회를 구경하러 간다. 바람의 달리는 모습과 대회 후 맛있는 식사를 하고선 행복감에 빠져 있는 바람의 모습에서 “진짜 행복한 사람들에게서만 보이는 후광을 발견하고” 태수는 결심한다. 달리기를 시작해 보기로. 과체중, 저질 체력, 게으름 이 모든 것에 대항해 “삶에 활력도 없는 회사원” 태수는 달리기를 시작한다. 이때 태수는 아직 달리기의 재미를 모르는 모든 독자들을 대변하는 존재다. 태수가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독자도 함께 달리기를 시작할 이유를 찾아나간다.
사람이 말보다 잘 달릴 수 있다
바람의 도움을 받아 처음 시작하는 달리기는 쉽지 않다. 휴일 아침 9시부터 달려야 하고,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도 아리송하다. 각자의 속도로 달리기 때문에 준비운동만 마친 후 바람은 먼저 달려가 버린다. 한 시간 후에 만나자는 얘기만 남기고. 태수는 “일단 한번 달려본다.” 잠시 기분이 좋았지만, 10분만 지나도 힘이 든다. 곧 더워지고, 목이 마른다. 그래서 들른 편의점에서 과자를 잔뜩 사서 폭식을 해버리고 만다. 운동하러 나왔는데 폭식을 한 것에 대해 자괴감과 실의에 빠져 있는 태수는 이내 달리기를 포기해 버릴 것처럼 읊조린다. “아무래도 난 달리기에 소질이 없는 것 같아.” 이에 바람이 반문한다. “소질이 있어야 달려?” “소질이 없으면 달리면 안 되는 거야?”

돌배 작가의 만화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의 한 장면. 저스툰
어린 시절 바람은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할머니의 ‘빠른 걸음’을 쫓아가느라 달려야 했던 바람이 할머니보다 더 빨리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무렵,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말았다. 할머니의 부재 속에서 “달리면 뭔가 생각이 없어”지고 “이상한 생각도 들지 않고 다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아서” 할머니와 함께 걷듯이 달렸던 바람이다. 그렇게 꾸준히 달려온 바람은 “왜 달리고 있냐”는 물음에 “그냥 달리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했던 포레스트 검프처럼 달리는 이유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마라톤보다 더 먼 거리를 달리는 울트라마라톤을 달리려는 꿈까지 품게 되었다.
이런 바람과 아직은 초보지만 달리기 일기를 블로그에 올려가며 달리기에 재미를 붙여가던 태수에게 마치 만화 <원피스>에서처럼 동료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청소년의 일상에 재미를 못 붙이던 애늙은이 고3 훈모가 첫 동료다. 훈모 역시 태수처럼 바람의 달리는 모습을 보고 달리기를 시작해 재미를 붙였다. 같은 동네를 달리는 태수의 블로그도 즐겨 보던 참이었다. 셋은 의기투합해 매 주말 함께 각자의 달리기를 하며 우정을 쌓아간다. 훈모를 좋아하는 숙이도 처음엔 바람을 시기했지만, 이내 셋과 함께 달리게 된다. 또 레이스에 수차례 참여하는 동안 페이스메이커(일정한 시간대로 완주할 수 있도록 속도를 맞춰주는 보조 레이서) 이진과도 친해진다. 스포츠용품 회사원인 태수는 사내 코치의 지도도 받게 되고, 달리기 블로그가 마케팅부의 눈에 띄어 스카우트되기도 한다. 이는 곧 바람과 태수의 달리기에 대한 용품 및 의료 지원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동료와 지원을 얻어가며 바람의 꿈 울트라마라톤은 태수의 꿈으로 이어진다. 5㎞ 레이스로 시작해 10㎞, 하프 마라톤, 풀코스 마라톤까지 완주할 수 있게 된 태수는 더 이상 예전의 과체중 직장인이 아니다. 하지만 <달리기>는 이런 변화를 결과로만 보여준다. 다이어트를 위한, 건강을 위한 달리기가 아니다. <달리기>의 주인공들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달리기를 목적으로 하여 달린다. 시작의 계기는 조금씩 달랐다 하더라도, 결국 달리기가 좋아서 달리는 것이다. <달리기>에서 체중감량과 여타 이득은 달리기의 결과 주어지는 선물로서만 묘사된다. 이 선물들은 목적이 뒤바뀌는 부작용 없이, 독자들을 달리기로 이끈다.
또한 이야기 속에 적절하게 논문과 경험을 활용한 지식을 배치하여 달리기 초심자에게 필요한 정보를 전달한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이어나가기 위해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이야기 안에서 제공하기 때문에 마치 태수가 친구 바람에게 배우듯 달리기를 배워나갈 수 있다. 알면 알수록 달리러 나가고 싶어지는 기분을 <달리기>의 독자라면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알면 알수록 달리러 나가고 싶다
이렇게 <달리기>는 독자를 달리기로 이끌지만, 동시에 달리기를 은유로 활용해 ‘삶’의 자세 또한 넌지시 일깨운다. 5㎞를 달린 사람만이 아는 기분, 10㎞, 42.195㎞를 달려본 사람만이 아는 기분을 궁금하게 만들며 삶의 이런저런 경험을 시도하고 이어나가는 것을 거든다. 경쟁사회의 경쟁적 스포츠가 아닌, 나의 경험세계를 넓혀 나가는 생활체육을 이야기하며 거꾸로 삶의 방식에 대해 새로이 환기하도록 돕는다. 자기계발이 유행이 된 지 이미 오래인 세계이지만, 달리기가 목적이기에 달리듯 삶이 목적이기에 조금씩 나아가며 사는 삶을 <달리기>는 따뜻한 이야기를 통해 설파한다. 그것은 각자의 달리기로 완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진 삶이다.
그래서 이 만화는 그저 ‘본격 달리기 권장 웹툰’만이 아니다. 달리기를 권장하며 삶도 권장한다. 태수와 바람이 달리며 사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면, 그것을 ‘나’의 모습으로 만들 수도 있다. 특히 그냥 달리기가 아니라, 장거리 달리기이기에 더욱 그렇다. 먼 거리를 한 번 달려보자고 손짓하는 이 만화 덕에 ‘나’는 달리기도 삶도 새로이 시도해 볼 수 있다. 소질이 있든 없든, 홀로 또 함께, 저 멀리, 힘겹지만 즐겁게. 그래서 이 만화를 보고 나면 알게 된다. 달리기든 삶이든, 달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조익상 만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