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스트럭-운명적인 만남, 당신도 믿으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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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두 소년 소녀의 이야기를 교차해서 보여주고 있다. 비슷한 모험과 고난을 겪은 소년 소녀가 도달하는 곳은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집채만한 운석 앞이다.

제목 원더스트럭

원제 Wonderstruck

원작 각본 브리언 셀즈닉

감독 토드 헤인즈

출연 오크스 페글리, 밀리센트 시몬스, 줄리안 무어, 미셸 윌리엄즈

상영시간 115분

CGV아트하우스/그린나래미디어(주)

CGV아트하우스/그린나래미디어(주)

미네소타의 한 호숫가. 소년은 악몽에 시달린다. 늑대에게 쫓기는 꿈이다. 깬 아이의 방 침대에는 스타스키 & 허치 포스터가 붙어 있다. 70년대 방영된 인기 형사물이다. 담배를 피는 어머니는 데이빗 보위의 싱글 <space oddity>를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듣는다. 저 노래가 70년대를 상징하는 노래던가. 나중에 회사로 돌아와 찾아보니 이 노래, 1969년에 첫 발매되었다. 앨범에 실린 것은 1973년이고. ‘생각보다 오래된 노래군.’ 이런 저런 상념이 스칠 때 1977년의 일이라고 자막이 뜨면서 시점을 못 박는다.

아버지를 찾는 소년, 어머니를 찾는 소녀

소년은 자신의 아버지가 궁금하다.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말을 하지 않는다. 대신 수수께끼와 같은 말을 한다. “시궁창 속에서도 우리 중 누군가는 별을 본다.” 비루한 삶에도 품위를 잃지 않은 소공녀 같은 삶을 말하는 건가. 그러던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죽는다. 소년은 어머니가 남긴 약간의 ‘단서’로 아버지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목적지는 뉴욕의 한 서점이다.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주인공은 소녀다. 소녀의 어머니는 유명 배우다. 소녀는 청각장애인이었다. 집안에 감금되다시피 하던 소녀는 어머니를 만나러 가출을 감행한다. 역시 목적지는 뉴욕이다.

영화는 두 소년 소녀의 이야기를 교차해서 보여주고 있다. 비슷한 모험과 고난을 겪은 소년 소녀가 도달하는 곳은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집채만한 운석 앞이다. 그런데 시차가 있다. 소녀의 모험이 벌어진 때는 1927년이다. 1927년의 세계는 흑백필름으로 표현하고 있다. 반면, 소년의 1977년은 총천연색 컬러다. 거리를 거니는 남녀들의 옷도, 머리도 컬러 과잉이다. 또렷한 대비다. 영화사(史)에 대한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1927년의 ‘의미’를 안다. 최초의 유성영화 <재즈싱어>가 첫 상영된 해다. 극장을 가는 것을 좋아했던 소녀에게 무성영화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다른 관객들에 비해 그녀의 장애는 두드러지는 조건이 아니었다. 영화에서는 그 찰나를 보여준다. 마지막 무성영화 상영이 끝나고 첫 유성영화 장비가 들어오면서 그녀는 가출을 감행한다.

그저 형태나 조건의 유사성만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아이들의 여정은 서로 삼투압된다. 소년이 아버지를 찾는 여정을 시작하려는 순간, 전화선을 타고온 번개는 아이의 귀를 먹게 한다. 소년 역시 청각장애의 상태가 된 채로 뉴욕으로 향하는 버스를 탄다. 우연히 들어가게 된 자연사박물관에서 소년은 자신을 압도하는 디오라마를 목격한다. 눈 쌓인 호숫가를 달리는 늑대들의 디오라마다. 악몽 속에 나오던 그 늑대들. 박물관의 이면, 학예연구사들의 공간에서 그리고 그는 그 디오라마가 제작된 장소가 자신이 태어나 자란 미네소타의 호숫가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디오라마를 매일같이 찾아오는 청각장애인 할머니. 흑백영화 속, 1927년의 그 소녀다.

낭만적인 ‘기적’ 벌어지는 우연의 일치

싱크로니시티(synchronicity). 정신분석학자 칼 융이 내놓은 개념이다. 쉽게 말해 의미있는 우연의 일치를 말한다. 오늘날엔 심리과학적인 개념이라기보다도 낭만적인, 유사과학적 개념 정도로 폄하되지만 우리는 안다. 생각보다 그런 일, 종종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소년을 자연사박물관까지 인도하는 흑인 친구도, 노상강도를 만나 무일푼인 소년이 아버지가 남긴 메모가 언급하는 서점을 찾아 기적적으로 자신의 혈육과 상봉하는 것도 현실세계에서는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이지만, 또 그런 일이 간혹 가다 일어나는 것도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닌가. 그리고 그런 낭만적인 ‘기적’이 가능한 도시가 바로 뉴욕이라고 영화는 설파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기적’을 주장하는 영화 또 한 편을 알고 있다. <첨밀밀>. 대륙을 떠나 홍콩으로 각자 건너온 남녀. 좋아하는 가수가 등려군이었다는 점에서 급속도로 가까워지지만, 각자 엇갈리는 사랑과 이별로 떠났던 주인공들이 ‘우연이면서도 운명적으로’ 다시 재회하게 되는 장소가 등려군의 죽음 소식을 들은 뉴욕이었다. 에필로그에서 영화는 전지적 시점에서 처음 이들이 홍콩으로 떠나는 기차를 타고 있었을 때, 전혀 모르면서도 서로 머리를 기대고 자고 있었다며 예정된 ‘운명’을 보여주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엽기적인 그녀>(2001)의 전지현과 차태현도 곽재용 감독의 후속작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2004)에서 전철역에서 우연히 조우했던 것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영화 속 이야기이지만 운명이라는 거, 진짜로 있는 걸로 믿고 싶다. 이것도 이젠 필자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다는 증거이리라.

1977년 뉴욕 대정전 사태가 인용되는 방식

아직 답해지지 않은 질문이 있다. 운명적인 사랑의 주인공인 소년의 엄마가 소중하게 간직한 경구, “시궁창 속에서도 우리 중 누군가는 별을 본다”는 어떻게 실현되었을까.

1977년 7월 13일 뉴욕 대정전 사태 때 맨해튼가의 모습. | Sorora Mystica

1977년 7월 13일 뉴욕 대정전 사태 때 맨해튼가의 모습. | Sorora Mystica

실제 역사 속 1977년 뉴욕에선 무슨 일이 있었을까. 기록은 이렇게 말한다. 이 해 7월 13일 밤, 뉴욕시와 북동부 교외지역에서는 대정전 사태가 벌어졌다.

정전은 25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 암흑천지는 사람들의 어떤 동물적 본능을 일깨웠다. 수많은 약탈과 방화가 일어났다. 고 리영희 선생은 <우상과 이성>에서 이 사건과 바로 전 해인 1976년 중국 탕산 대지진 때 중국사람들이 보여줬던 모습을 대비해 ‘사회주의 도덕’의 우월성을 설파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안다. 리영희 선생이 칭송했던 그 ‘문화대혁명’이 실은 허구이며 진실을 은폐한 것이라는 것을. ‘동물적 자본주의 정글에 맞선 사회주의 도덕’이라는 게 유신독재의 대안체제를 꿈꾸던 지식인의 ‘상상 속 바람(wishful thinking)’에 불과했다는 것 말이다.

영화의 절정부에서 이 뉴욕 정전사태가 인용된다. 상투적인 비난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할머니의 손을 잡고, 새로 사귀게 된 친구와 박물관 옥상에 올라선 주인공 소년은 뉴욕의 밤거리를 내려다본다. ‘24시간 꺼지지 않는 불야성’이라는 일상이 갑작스레 깨진 그 자리에서 그동안 화려한 조명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밤하늘의 별빛이 떠오른다. 하늘을 가로질러 떨어지는 유성도. 인생에서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특별한 순간’을 그들은 경험했다. 직유다. ‘시궁창 같은 상황에서도 밤하늘의 빛나는 별’을 본 것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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