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을 구입한 뒤에는 비로소 작가의 이름도 알 수 있고 상세한 작품 설명도 볼 수 있다. 구매한 관객이 기대하고 예상했던 작품 의도와 부합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해 보는 것도 ‘블라인드’ 미술장터의 묘미인 셈이다.
길에서 우연히 맘에 드는 그림을 만났다. 몇 년 전 신입사원 시절 회사원 신모씨(32)는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서 이름 모를 작가가 늘어놓고 파는 미술작품 중 하나에 ‘꽂혔다’. 작품 값을 내고 품에 안고 돌아오는데 동료 직원들은 “유명한 작가야?” “그 그림이 그렇게 가치가 있어?”라는 질문을 해댔다. 사실 신씨도 작가가 누군지, 작품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전혀 몰랐다. 스스로를 미술 애호가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그저 좋아서 샀을 뿐이었는데, 그런 자신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눈빛이 당혹스러웠다.
작품가격 10만원~150만원
하지만 최근 방문한 한 아트페어에서 신씨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동질감을 느꼈다. ‘작가미술장터’라는 이름으로 작가와 관객 사이의 직거래가 이뤄지는 미술 아트페어를 비롯해 종래의 아트페어 형식을 벗어난 독특하고 개성 있는 미술장터가 늘고 있다. 아예 작품에 작가의 이름을 적어두지 않아 누구의 작품인지 모르게 전시해두는 것을 비롯해, 작품을 사면 열쇠를 받아 직접 보관공간에서 꺼내가는 식의 아트페어도 등장했다. 관심을 자극하고 대중과의 접점을 늘리는 쪽으로 아트페어도 변신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11월 15일 문을 연 미술장터 ‘블라인드 데이트’의 전시 갤러리에는 작가 정보가 나와 있지 않다. 전시 안내에 나와 있는 참여 작가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는 있지만 작품 설명에는 작가명이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에 관객들의 선택은 보다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취향의 작품을 고르는 데 더 집중할 수 있다. 작품을 구입한 뒤에는 비로소 작가의 이름도 알 수 있고 상세한 작품 설명도 볼 수 있다. 구매한 관객이 기대하고 예상했던 작품 의도와 부합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해 보는 것도 ‘블라인드’ 미술장터의 묘미인 셈이다.

미술장터 ‘블라인드 데이트’ 전시장을 찾은 관객들이 전시된 작품들을 둘러보고 있다./스페이스 윌링앤딜링 제공
아트페어의 문턱이 낮아진 데에는 작품의 가격도 일반적인 관객들이 납득할 만한 수준으로 낮아진 점이 적잖이 작용했다. ‘블라인드 데이트’의 작품 가격은 10만원대에서 시작해 가장 비싼 작품도 150만원 선이다. 미술시장 역시 다른 산업처럼 개척이 필요하다고 본 예술전문 기획자와 신진·중견작가들의 필요가 관객들의 발길을 끄는 미술장터를 여는 쪽으로 맞아떨어진 것이다. 참여 작가 78팀이 만든 200여점의 작품들은 기준 없이 뒤섞여 있다. 때문에 작가 입장에서는 더 인기를 끄는 작품의 스타일을 짐작할 수도 있다. 전시를 기획한 남서울예술인마을 관계자는 “늘 해오던 방식과는 다른 기법을 쓰거나 의외성을 가미한 작품을 일부러 내놓으며 작가에 대한 예상을 뒤집고 반응을 궁금해 하는 작가들도 있다”고 밝혔다.
작품을 투명한 정육면체 상자에 넣어 배열하는 식으로 전시하는 아트페어도 이색적이다. ‘팩(PACK) F/W 2017’은 작품을 구매하면 관객이 직접 가지고 갈 수 있게 정육면체 상자의 열쇠를 준다. 열쇠로 상자를 열고 작품을 ‘포장’해 간다는 점을 강조해 ‘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기존의 규모가 큰 미술 전시나 아트페어 대신 압축과 경량화를 추구해 보다 쉽게 작품을 구매하게 한다는 의도를 담았다. 관객이 가볍게 들고 갈 수 있을 정도로 작품의 크기도 작고, 그에 따라 작품을 담는 전시 모듈도 장소를 가리지 않고 펼칠 수 있다. 11월 29일부터 12월 17일까지 서울 마포구 상수동과 망원동, 성산동 세 곳의 전시장을 돌며 순차적으로 열린다.
카페나 작업실에서도 전시·판매
미술장터 ‘팩’에서는 다른 곳에서는 팔지 않는 작품들을 행사기간 동안 매일 구성을 달리해 전시하기 때문에 전시 당일이 아니면 살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총 18인의 예술가가 작가마다 20점 내외로 소량 제작한 작품들은 10만~50만원대의 가격으로 판매된다. 행사를 기획한 단체 리사익(Riverside Express)의 김윤익 대표는 “미술작품을 구매하고 소장하는 것이 특수한 소수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인식을 벗어나는 것이 목표”라며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한다는 취지로 행사를 서울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열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밝혔다.
기존의 틀을 벗어나는 방향은 전시 구성이나 방식에만 변화를 주는 데 국한되지 않는다. 전시와 판매가 이뤄지는 공간을 평범한 카페나 작가의 작업실로 옮기는 시도를 비롯해, 사진작품의 경우 관객이 작품을 고르면 그 자리에서 인화해주는 신속성도 새로운 모습이다. 11월 5일 폐막한 ‘퍼폼 2017’은 흔치 않게 퍼포먼스(행위예술) 장르의 작품을 판매해 눈길을 끌었다. 퍼포먼스(행위)와 영상 등 ‘시간기반예술’로 불리는 장르의 작품들을 축제 형식으로 선보인 것이다.
서울 아라리오뮤지엄과 퍼폼플레이스 등 5곳에서 동시 개최된 ‘퍼폼 2017’에서는 첫선을 보인 지난해보다 규모를 키워 공연 회차와 작품들을 2배로 늘렸다. 특성상 미술시장에서 소외되는 약점을 보완하고 작가와 관객들이 함께 고민을 나눌 수 있는 부대행사도 같이 열렸다. ‘퍼폼’ 미술장터에서 관객의 마음을 끌어 팔린 작품은 구매한 관객이 원하는 장소와 시간대에 방문해 공연된다. 당장은 일반적인 예술 소비자의 퍼포먼스 작품 수요가 크지 않은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기업이나 단체 등의 예술 관련 행사에 판매되는 경우가 많다.
작가미술장터라는 기획의 일환으로 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는 사업이지만, 행사에서 관 주도의 경직성이 발견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미술계에서는 장점으로 꼽는다. 작가들이 대중의 발길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갤러리들을 치열하게 고민한 뒤 찾은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직거래’라는 점을 강조해 비교적 낮아진 작품 가격에만 초점을 맞추는 일종의 ‘덤핑’에 대한 우려를 표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 미술평론가는 “그동안 화랑과 갤러리에서 작가 발굴에 힘쓰는 대신 작품 판매 중개에 더 치중한 문제점도 없지 않았기 때문에 분명 작가에게나 관객에게나 도움이 되는 새로운 시도로 읽힌다”면서도 “작가와 관객 사이에 기획업체라는 매개체가 전보다 더 부각되는 상황이 앞으로는 또 어떻게 시장에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도 고민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