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성당에서 다함께 부른 ‘아침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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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앞 광장에서, 종로에서, 명동성당에서 그 노래 ‘아침이슬’을 숱하게 불렀다. 그때의 일이 선명하다. 6월 10일을 전후로 대도시는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 되었고 명동성당은 민주화운동, 학생운동의 성지이자 농성장이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시골에서 서울로 이사를 와서 무슨 까닭인지 모를 한 달가량의 어정쩡한 공백을 거친 후, 4월 즈음에 미아리의 꽤 근사한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전학을 간 지 며칠이 되지 않은 때에 생긴 일 때문에 요즘도 어떤 자리에서 누가 노래라도 시키면 주눅부터 드는 약한 트라우마를 나는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약간의 사연이 있다.

전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음악시간에 담임선생님은 급우들 모두에게 합창을 지도했다. 난생 처음 듣는 노래들이었다. 계명도 모르고 가사도 몰랐다. 나는 물고기처럼 입만 벙긋벙긋했다. 삼월 삼짇날 전만 해도 경북 순흥 산골짜기에서 책보에 꽁보리밥 도시락을 들고 학교를 가던 시골아이가 청명 한식을 지나 대도시의 학교 창가에 앉아 처음 듣는 노래를 따라 부르자니, 창피했다. 일주일에 두 번인가 있는 음악시간이 조금 괴로웠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이 서울 명동성당 앞에 모여 집회를 기다리고 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이 서울 명동성당 앞에 모여 집회를 기다리고 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동요를 부르는 방식이 그때는 따로 있어서, 아이들은 두 손을 배꼽에 모은 채 입을 하마처럼 크게 벌리거나 뽀뽀하듯이 예쁘장하게 오므렸으며 고개를 좌우로 살짝 흔들었다. 그것을 따라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동요들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에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나는 하나도 모르는 노래였다.

짝이 있었다. 예쁜 아이, 곱게 차려 입고 등교하는 아이, 전학 온 첫 날 그 아이 옆에 앉았을 때 깜짝 놀라면서 멀찍이 비켜 앉던 아이. 그러나 착한 아이. 그 친구가 노랫말을 몇 개 적어줬다. 그 친구 덕분에 노래 몇 개를 조금은 따라 부를 수 있었다.

‘애국가’의 장엄함과 ‘아침이슬’의 비극성

하여간 그 이후 내가 거친 청소년기를 보내고, 학교 밖으로 뛰쳐나오고, 거리에서 20대를 다 보내면서, 세상의 온갖 노래를 다 찾아 들으면서 유독 멀리하는 게 있으니 ‘맑고 고운’ 노래들이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밥 딜런을 가리켜 한 말, “세상의 모든 선의를 비웃는 것이 바로 가장 밥 딜런다운 것”이라고 한 말이 생각난다. 그러니까 나는 그런 음악들을 찾아 들었던 것이다.

조용필의 거의 모든 노래를 좋아하고 일부러 찾아 듣지만 ‘여행을 떠나요’는 스스로 내켜서 들어본 일이 없다. 70·80년대의 이른바 ‘대학생의 추억과 낭만’이 깃들어 있다는 그 무슨 포크 음악이란 나의 플레이 리스트에 단 한 번도 기록된 적이 없으며, 내 공부의 주제 중 하나인 ‘신과 작별한 유한한 존재는 지독히도 고통스러울 때 어디를 향하여 기도를 드린단 말인가’ 하는 점과 연관해서도 말러나 브람스의 침통한 가곡은 들을지언정 ‘영성’ 가득한 노래는 차마 싱거워서 첫 소절이 나오기 전에 끄곤 했다.

예외가 있다면 ‘아침이슬’이다. 이 곡을 처음 들은 것은 고1 때인데, 이미 이 곡은 전설이 되어 대도시의 거리와 골목으로 짙은 안개처럼 다 스며든 다음이어서 내가 그때 그 노래를 처음 들었다는 게 별로 대단한 일도 못 되는 일이다. ‘대학가의 추억과 낭만’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노래임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이 장엄하고 숭고하고 벅찬 노래에 대하여 음악평론가 강헌은 “1987년 6월 10일, 한국 젊은이들의 이성을 하나로 묶어주고 모든 시민의 정치적 열망을 한자리에 모이게 한 구호는 ‘호헌철폐 독재타도’였지만, 그 모든 사람들의 뜨거운 심장을 고동치게 한 것은 ‘애국가’와 ‘아침이슬’이었다. ‘애국가’의 장엄함과 ‘아침이슬’의 영웅적인 비극성은 일체감이라는 강력한 주술을 수행하며 한국 현대사의 새 장을 기술하는 붉은 잉크가 되었다”고 썼다.

그랬다. 나도 그해 6월, 시청앞 광장에서, 종로에서, 명동성당에서 그 노래 ‘아침이슬’을 숱하게 불렀다. 그때의 일이 선명하다. 6월 10일을 전후로 대도시는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 되었고, 명동성당은 민주화운동·학생운동의 성지이자 농성장이 되었다. 그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아서 단체 깃발이 수도 없이 펄럭이는 곳으로 따라가기는 가되, 정작 그 수많은 깃발 어디에도 합류하지 못하여 인도에 어정쩡하게 서 있기만 했던 나는 그야말로 ‘민주시민’의 한 명이었다. 거리의 장삼이사들이 한순간 ‘민주시민’으로 호명되던 때였다.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던 지도부들이 복잡한 상황 속에서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리고는 철수를 단행했을 때 이에 반대하여 또 수십 명이, 그리고 하룻밤 지나서는 수백 명이 다시 명동성당으로 들어갔는데, 나도 그때 어쩌다가 그 근처를 배회하던 중에 걷다 보니 본당 앞마당이었다. 지금이야 다들 회고하기를 그때 모두가 ‘떨쳐 일어난’ 것 같지만 꽤 많은 신도들과 몇 명의 종교인과 명동을 오가는 시민 중 일부는 ‘다 끝났는데 왜 또?’ 하는 불편한 시선이 적지 않았다.

‘민주시민’으로 기억되는 사람들

그런 시선을 일단 무시하고, 오합지졸처럼 모여들었다가 점점 강고한 ‘민주시민’이 된 사람들은 몇날 며칠을 또 버텼다. 자유발언 시간에 누군가가 “제 이름은 문부식입니다”라고 말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다들 일어나서 박수와 함성으로 “문, 부, 식”이라고 외쳤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항쟁 와중이었고, 1982년 3월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투옥된 문부식은 1988년 12월에나 석방되었다. 동명이인이었던 것이다. 그럴 정도로 산만한 풍경이었다.

그런 중에 하루는 경찰이 무자비하게 치고들어온다고 하고 계엄령이 내려진다고 하는 풍문이 도는 바람에, 성당 앞 구멍가게의 공중전화에 수십 명이 서 있기도 했다.

그리고 결연한 순간.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조직된 세력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노래들이 산만하게 흩어졌다. 군가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다가 ‘아침이슬’을 다시 부르게 되었다. 그 노래를 부르기 위하여 다들 일어섰고, 예닐곱 명씩 둥그렇게 하여 어깨동무를 하고 부르게 되었다.

우연히도 나와 함께 어깨동무를 한 사람들은 나처럼 무소속의 ‘민주시민’들이었다. 점퍼 차림이 대부분이었고 한눈에도 이 대도시의 명멸하는 불빛에 주눅든 사람들이었다. 두세 사람이 노래를 이끌었다. “긴 밤 지새우고……”, 아뿔싸, 그들 중 일부는 ‘아침이슬’의 가사를 잘 몰랐다. “긴 밤 지새우고”까지만 불렀고 그 다음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입만 벙긋벙긋했다. 어떤 사람이 노랫말을 한 템포 앞에서 크게 일러줬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아마도 본능적인 감각이었을 것이다. 이 노래는 모두의 노래이지만 또한 일부의 노래이기도 하다는 것을. 어떤 운명의 행로에 의하여 여기까지 왔지만 이 노래를 자기 노래로, 거침없이, 끝까지, 한 글자도 안 틀리고 목청껏 부르는 학생들과는 달리 자신은 조금 다른 결을 따라 여기로 왔다는 것을. 그래서 부르기 어색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6월항쟁 30주년을 맞아 여러 언론 매체에서, 또 수많은 SNS에서 그날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기록을 본다. 나는 그것을 순정하게 신뢰하여 묵직한 마음으로 읽는다. 또한 동시에 어쩌다가 ‘민주시민’이 되어 그날 그곳에 있었으되 온전히 자기의 자리라고 여기지는 못하였고, 그래서 그 이후로도 온전히 그날을 ‘중심적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그날의 몇날 며칠을 자기의 행로를 중심으로 기억하기에는 차마 어색한 사람들, 그렇게 늘 가장자리에 서 있어서 그저 ‘민주시민’으로 기억되는 사람들, 그 때문인지 그날의 ‘아침이슬’을 따라 부르지 않았던 사람들도 있었음을, 나는 기억하고 싶다.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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