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자식살해’로 변주되는 전통에 천착](https://img.khan.co.kr/newsmaker/1206/20161220_81.jpg)
한국 구전서사의 부친살해
김영희 지음·월인·1만6000원
때가 되면 자식은 독립하고 부모는 자식을 놓아주어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이들이 경제, 도덕, 건강 등을 이유로 부모를 떠나지 않고 자식을 놓지 않는다. 이유는 저마다 다르지만 그 아래 깔린 심리는 똑같다. 분리되는 것, 불안전한 자신을 확인하기가 두려운 것이다. 부모에게 자식은 자신의 존재 증명이며 또 다른 자기다. 그래서 자식이 자신의 말을 거역하고 떠나려 할 때 부모는 자기 존재가 부정당하는 고통을 느낀다. 한편, 아이에게 부모는 안전과 안락을 제공하는 울타리다. 자식은 그들과의 동일시를 통해 자기 존재를 확보한다. 그러나 부모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언제든 버려질 수 있기에 그 존재는 위태로우며 그래서 자식은 독립을, 자신이 주인인 새 세계를 꿈꾼다.
세계의 수많은 신화와 동화에 ‘부친살해’ ‘자식살해’라는 패륜의 주제가 거듭해서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부친살해’는 프로이트가 말했듯 문명의 원천이며, (가부장제에서) 사회적 주체로 서기 위한 하나의 통과의례다. ‘부친살해’ 없이는 심리적 주체의 독립은 물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갈 역사적 주체의 등장도 불가능하다. 이 점에서 한국의 전통서사에 ‘부친살해’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국문학자 김영희의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한국 구전서사의 부친살해>라는 보기 드문 저작에서 그는 ‘부친살해’보다 ‘자식살해’가 더 자주 발견되는 한국의 서사 전통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천착한다. 그에 따르면, 한국 신화에는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나 오이디푸스처럼 아버지를 부정한 아들이 없다. 나라를 세운 주몽, 불법(佛法)을 세운 아도는 아비 없는 자식으로서 ‘부친살해’가 아니라 ‘부친탐색’에 나선다. 그들은 어머니를 떠나 아버지의 세계로 가서 정체성을 인정받고 권력을 위임받는다. 때문에 “그들의 세계는 아버지의 후광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자식의 분리는 수동적인 미완의 것으로 남는다.
반면, 아버지의 분리는 ‘자식살해’라는 능동적인 모습을 띤다. 구전서사에는 부모를 위해 아이를 죽이는 수많은 효행담이 등장한다. 개중엔 실수로 손자를 삶아먹은 시부모를 감싸 효부상을 받은 며느리 이야기도 있다. ‘효’를 내세워 엽기적인 자식살해를 옹호하고 권장하기까지 하는 이 이야기들은 기존 질서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는데, 저자는 ‘부친살해’ 서사가 “공동체의 미래 주체를 만드는” 것과 달리 ‘자식살해’는 “공동체의 과거에 고착된 주체를 생산”한다고 지적한다. 비범한 능력을 가진 아이를 부모와 공동체가 집단 살해하는 ‘아기장수’ 설화는 이 수구적 주체들이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얼마나 가혹하게 억압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오늘의 욕된 현실은 몰상식한 ‘아버지의 딸’이 낳은 파행이 아니라 ‘부친살해’를 통해 미래 주체를 만들지 못한 오랜 과거의 복수다. 만약 이번에도 아버지를 죽이는 철저한 부정과 반성을 이루지 못하고 또 다른 아버지의 이름에 기댄다면, 그가 아무리 자애롭고 훌륭하다 해도 새로운 주체는 서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어버이는 루쉰이 그랬듯 “청년들아, 나를 딛고 올라가라”고 자신을 내주어야 할 것이며, 자식된 자는 그들을 사뿐히 즈려 밟고 나아가야 한다. 한국사 최초의 ‘부친살해’, 그것이 지금 우리의 과제이고 희망이다.
<김이경 소설가·독서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