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분도 채 안 되는 소품에서도 바흐는 4개의 길을 엇갈리며 서로 닮아가는 푸가의 비범한 변주를 보여주는데,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를 음악에 오버랩한다면 푸가의 진행이라고 할 만하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를 봤다. 같이 본 사람이 말했다. “이젠 좀 정상적인 사람들이 나오는, 정상적인 영화를 보고 싶다.” 그 순간은 동의했다. 새봄에 본 새 영화들은 다 일그러지고 파탄 나는 영화들이었다.
나는 박찬욱 감독이 흩뿌려놓은 이미지와 대사들 중에서 그가 여러 편의 자기 영화에서 반복하는 말, 즉 ‘이야기’에 관한 단서를 찾고자 했다. <친절한 금자씨>는, 이제야 아 그런가 하고 깨닫게 된 독자도 있겠지만, 늙은 ‘제니’가 이제는 죽어버린 자기 엄마 ‘이금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구조다. 이야기! 그렇다. 그래서 이야기가 파편적이고 플래시백의 연속이고 툭 툭 끊어진다.
그 영화의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은 성우 김세원의 목소리다. 이에 대하여 영화평론가 정성일과 대담을 하면서 박찬욱 감독은 “금자는 이미 늙어 죽은 지 오래이고 늙은 제니가 자기 딸이나 손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기분이라면 역시 늙은 여자 목소리여야 되고. 그리고 너무 감상에 빠지지 않는, 담담하게, 마치 자기 엄마 얘기가 아닌 것처럼 그렇게 들려주지만, 마지막에 그것이 엄마에 대한 ‘얘기’라는 게 밝혀졌을 때, 앞에서 담담하게 했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이 찡해질 만한 그런 목소리”(2005년 8월 <씨네21> 516호)를 위해 성우 김세원씨를 캐스팅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올드보이>도 어쩌면 ‘이야기’에 관한 영화다. 영화의 초반, 어떤 사나이가 15년 만에 아파트 옥상으로 ‘석방’된다. 저 멀리 또 다른 사내가 있다. 그는 막 뛰어내려 죽으려고 하는 참이다. 석방된 자는 떨어지려는 자를 붙들고 말한다. “조금 있다가 죽어라.” 왜?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붙잡고 조금 있다 죽으라고 명령하는가. 자기의 ‘이야기’, 15년 동안 갇혀 있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다.

쇼스타코비치 현악 4중주 15번 앨범과 쇼스타코비치.
네 명의 인물이 교차하며 변주되는 얘기
<아가씨>의 마지막 대목에서도 ‘이야기’에 대한 강박이 보인다. 하정우의 실패한 계략을 듣던 조진웅이 ‘이야기’를 재촉하면서 말한다. “이야기는 과정이 생명이 아닌가, 이 사람아.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래?” 이야기! 그렇다. 어떤 점에서 <아가씨>는, 그리고 영화에서 충분히 ‘알 만한 사람’인 박찬욱 감독의 많은 영화들은 ‘이야기’, 즉 “어떤 자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야기할까?” 하는 이야기다.
이를, 손석희가 뉴스에서 묻는다. “요즘 영화가 보통 2시간이 넘어간다. 감독들이 그만큼 옛날에 비해서 할 이야기가 많아진 것일까?” 이에 박찬욱 감독은 “어떤 경우는 그럴 수도 있고, 또 어떤 경우는 경제적으로 압축적으로 말하는 법을 잘 못 배워서 그럴 수도” 있는데, 이번 영화 <아가씨>의 경우는 “친절하게 얘기하느라고, 주인공이 넷이나 되니까 그 사람들 얘기를 하나하나 보살피느라고 길어졌다“고 대답했다.
친절하게?
그는 덧붙여 말하기를 “반복하면서도 변화를 주고 거기에 유머를 더한다든가 새로운 뉘앙스, 또는 다른 시각에서 본다든가, 반복은 반복이되 변주되는, 그러면서 발전되는” 구조를 선택함으로써 “플롯을 못 따라오는 사람은 안 생기도록, 그렇게 친절하게, 그 덕분에 영화가 재미없다는 사람은 있어도 못 따라가겠다는 사람은 없는” 작업을 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바흐의 이야기 방식을 빌린 것인가. 바로크 시대의 정교한 변주 양식, 푸가 말이다. 공교롭게도 <아가씨>는 네 명의 인물이 교차하며 변주되는 이야기인데, 푸가 양식 또한 대체로 그러하다. 바흐의 현묘한 푸가 양식을 최대한 단순하게 압축하여 들려주는 일명 ‘리틀 푸가’ BWV 578번 푸가를 들어보면 기본적으로 2성 진행인데, 2성이 각각 두 갈래로 뻗어가면서 4개의 길이 펼쳐진다.
목적지는 같되 그 과정이 엇비슷하면서도 현묘하게 엇갈리는 4개의 길을 따라 연주자는 양손을 다시 4등분하여 4개의 자아가 4개의 길을 교차하고 엇갈리고 부딪치고 어긋나고 뒤섞이면서 달려간다. 4분도 채 안 되는 소품에서도 바흐는 4개의 길을 엇갈리며 서로 닮아가는 푸가의 비범한 변주를 보여주는데,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를 음악에 오버랩한다면 푸가의 진행이라고 할 만하다.

영화 <아가씨> 포스터
아닌 게 아니라, 한국의 대표적인 영화감독이자 일급의 사진가이며 안목 높은 음악광이기도 한 박찬욱은 앞서 말한 정성일과의 대담에서 바흐를 언급한다. “바흐가 예술적 자의식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의무적으로 매주 칸타타를 쓰고 그랬지만, 은밀히 작품 속에 자신 이름의 스펠링을 딴 음을 새겨넣고 그러는 식의 자의식도 있는 사람인데, 쉬지 않고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바흐, 거기에 가장 끌린다. 근면한 사람으로서.”
“이젠 좀 정상적인 영화를 보고 싶다”
내 생각에, 그러나 나는 박찬욱 감독이 바흐의 푸가, 즉 모든 요소들이 견제와 균형을 이뤄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 목소리를 내되 궁극으로는 조화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그런 작품을 너무 일찍 만들지는 않았으면 한다. 예컨대 박찬욱의 푸가는 바흐를 지향하기보다는 쇼스타코비치를 변주하는 방향으로 연주되어야 한다.
쇼스타코비치는 체인스모커였고 술을 많이 마셨다. 1955년에는 한쪽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했고, 1958년에는 뇌졸중에 걸려 오른팔을 사용하기 어려워진다. 그는 피아노 연주를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 정권 아래에서 그는 예전과 같은 직접적 검열이나 압박을 더 이상 당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국가 음악가’ 같은 거창한 타이틀을 목에 걸고 다니는 늙은 광대처럼 지내지는 않았다. 1975년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쇼스타코비치는 끝없이 자기를 되돌아보는, 되새김질하는, 험한 시대를 어쩌면 요령껏 잘 살아남았다는 자책을 버리지 않았다.
오늘날의 러시아 음악을 대표하는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1997년도 다큐멘터리 <스탈린에 저항한 쇼스타코비치>에서 “쇼스타코비치가 독재자 스탈린에 저항한 작곡가이며, 스탈린의 지속적인 탄압이 쇼스타코비치를 더욱 위대한 작곡가로 만들었다”고 말했지만, 과연 탄압에 저항한 작곡인가, 하고 그는 끝없이 자문하였고, 고통스런 자답의 음악을 마지막 순간까지 썼다.
그 증거가 30여분 동안 아다지오로 지속되는, 한 숨 같은, 넉 대의 악기 곧 4개로 분열된 자아가 끝없이 스치고 엇갈리고 할퀴고 어루만지는 현악 4중주 15번이다.
‘독립 예술영화’가 아니라 막대한 제작비가 들어가는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지평 위에서 작업하는 감독에게 강력하게 주문해도 될지 모르지만, 박찬욱 감독은 ‘친절한 영화’보다는 좀 더 불친절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친절한 영화는 그의 권리이지만 불친절한 영화 또한 그의 의무다. 굳이 영화관 바깥의 화탕지옥 같은 세상을 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이미 그는 다 아는 자이며 그가 말한 “친절한 영화”, “대중영화” 같은 말들은 일종의 러시아식 ‘유로지비’(성스러운 바보) 같은 말이기도 하다. <아가씨>를 박찬욱 감독은 짐짓 “친절한 영화”라고 했지만, 전반적으로 그러한 영화이면서도, 파국이 없지 않고 기이한 장면이 없지 않으며 어딘가 뒤틀린 대사가 없지 않다. 유로지비의 감각이다.
그래서 오히려 예리한 눈으로 꿰뚫어보는 관객은 감독의 공식 인터뷰와 달리 “이제는 좀 정상적인 영화를 보고 싶다”는 말로, 스크린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감독의 복화술을 독한 것이다. 그러니 더 불친절해도 무방하다. 영화 속 대사로 말한다면 “이야기는 과정이 생명이 아닌가,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래?”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