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의 작가 윤태호는 우리가 타인을 설득하기 위한 삶을 끊임없이 살아왔고, 또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오늘도 자신과 타인을 함께 설득해 나가야 하기에 우리는 언제나 완전하지 못한 ‘미생’이다.
박사과정생 시절의 첫 논문은 완성하는 데 6개월 가까이 걸렸다. A4용지 20여쪽 분량의 논문을 쓰기 위해 내 앉은키만큼의 책을 읽었고, 1910년대에 나온 신문과 잡지 5년치를 꼼꼼히 훑었다. 연구실에서 밤을 새는 일도 많았다. 학과사무실의 소파 위에 누워 자고 있으면 다음날 아침에 대학원생 조교들이 와서 깨우곤 했다. 그러니까 논문이라는 글쓰기는 온전히 내 ‘노오력’의 산물이었다.
논문을 학회에 제출하기 전에 선배와 지도교수께 보이는 것이 관례였기에 완성된 논문을 들고 선배 교수의 연구실을 찾았다. 나는 학회 심사에서 ‘게재’ 판정을 받을 자신이 있었다. 선배가 이런 훌륭한 논문을 쓰다니 네가 무척 자랑스럽다, 하고 말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에 대해서도 미리 고민했다. 내가 믿었던 것은 아마도 연구실에서 보낸 나의 ‘시간’이었다. 논문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온 지 30분 만에 선배의 호출이 왔다. 그는 내 눈앞에 논문을 내밀었다. 첫 페이지의 어느 단어에 붉은 동그라미가 선명했다. 그의 첫마디는 “너는 너의 논문에 스스로 설득이 됐니?”였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당황스러웠다. 내가 대답하지 못하자 그는 “그 동그라미 쳐둔 단어에 대해 좀 설명해 줄 수 있겠니?” 하고 재차 물었다. 읽어 보았으나 그 개념과 의미에 대해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심지어 내가 왜 이런 단어와 문장을 썼을까, 나에게 다시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선배는 “너 스스로 설득이 안 된 논문에 무슨 가치가 있겠니?” 하고 말했고, 나는 “죄송합니다, 더 공부하겠습니다” 하고는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연구실에 돌아와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6개월의 시간이 부정당한 것 같아서 서글펐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다가 억지로라도 기분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 그날 나온 웹툰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논문을 쓰는 동안 웹툰을 보는 일은 거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날은 마침 <미생>의 연재날이었다. 주인공 ‘장그래’의 삶을 나에게 이입하며 대학원생의 시간을 억지로 버텨나가곤 했기에, 당시의 우울함을 이겨내기에 꼭 맞았다. 그의 대기업 인턴생활과 나의 대학원생 조교생활은 닮은 데가 많았다.

윤태호 작가의 만화 <미생>의 한 장면. / 다음웹툰
우리가 기획서나 보고서를 쓰는 이유
스크롤을 휙휙, 내리다가 어떤 대사와 맞닥뜨렸다. “기획서나 보고서를 쓰는 이유가 뭘까요?” 말하자면 ‘글쓰기의 이유’에 대해 누군가 묻고 있었다. 장그래의 상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1. 설득해야 하니까. 2. 여러 사람을 설득해야 하니까. 3. 계속 여러 사람을 설득해야 하니까.
‘설득’, 선배에게 불과 10분 전에 들었던 단어와 다시 한 번 마주했다. 이상한 날이었다. 그동안 그 누구도 글쓰기를 하는 이유에 대해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글쓰기를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행위를 왜 하고 있는가에 대해 자의로든 타의로든 사유해본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몹시 복잡한 심정으로, 이전보다 훨씬 천천히 스크롤을 내렸다.
연구실에서 ‘미생’을 보며 울었던 그날
장그래는 바둑을 두던 연습생 시절을 회상했다. 그는 자신이 둔 수에 대해 요즘 연구생들끼리 자주 두는 수입니다, 하고 설명한다. 그러자 지도교사는 “어차피 한 판의 바둑이라지만 바둑을 업으로 삼을 사람으로서 연구가 덜된 수를 실전에서, 그것도 연구생 리그에서 쓴다는 게 말이 되느냔 말이다. 너조차 설득이 안 된 수에 상대가 어떻게 반응하겠어?” 하고 묻는다. 그 부분에서 결국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한 편의 논문이라지만, 글쓰기를 업으로 삼겠다는 한 인간이 스스로 설득되지 않은 단어를, 문장을, 그 무엇을 써낸 것이 너무나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글쓰기는 온전히 설득의 행위였다. 내 인생의 가장 간절한 순간마다 ‘글쓰기’가 있었고, 그것은 타인을 설득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초등학생 시절의 반성문부터 시작해 대학 입학을 위한 논술, 진학이나 취업을 위한 자기소개서, 진급을 위한 기획서까지, 돌이켜보면 우리 모두는 설득을 위한 간절한 글쓰기를 해 왔다. 수업시간 중 학생들에게 ‘간절한 글쓰기’에 대해 물었더니 누군가는 ‘고소장’을 쓸 때가 가장 그러했노라고 답했다. 판사님을 설득하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고 해서 모두가 크게 웃었다. 어느 학생이 나에게 그러면 교수님은 어느 글쓰기가 가장 간절했습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퇴직한 아버지를 위해 썼던 편지”라고 답했다. 그간 못난 아들을 부양해온 아버지께 어떻게든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정말이지 간절하게 썼다.

윤태호 작가의 만화 <미생>의 한 장면. / 다음웹툰
“계속 여러 사람을 설득해야 하니까”라는 말은 우리의 삶이 설득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타인과 관계 맺고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언젠가는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한 간절한 글쓰기를 해야만 한다. 그것은 곧 타인의 처지에 깊이 공감하고, 그의 처지에서 사유하는 일과도 다르지 않다. 스스로 먼저 설득되어야 한다는 말 역시, 자기 자신이 더욱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설득해야 할 타인의 입장에 서 보는 일은 글쓰기의 핵심이 된다.
글쓰기는 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자기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주체로 두고 사유할 수 있는 실천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문자의 배열을 넘어 ‘소통’으로 우리를 이끈다. <미생>의 작가 윤태호는 우리가 타인을 설득하기 위한 삶을 끊임없이 살아왔고, 또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오늘도 자신과 타인을 함께 설득해 나가야 하기에 우리는 언제나 완전하지 못한 ‘미생’이다. 그래서 나는 ‘글쓰기’를 한다. 나의 온전히 못한 삶이 글쓰기를 통해 ‘완생’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얼마 전 <미생>의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연구실에서 <미생>을 보며 울었던 그날, 언젠가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게 된다면 <미생>의 39번째 에피소드를 반드시 함께 보고자 마음먹었다. 그리고 2013년에 첫 번째 제자들과 만난 이래 그 다짐을 계속해서 지켜오고 있다. 대학 강단뿐 아니라 그 어디에서든 ‘미생의 글쓰기’를 함께 나누려 한다. <미생>의 두 번째 이야기 역시 그러한 성찰을 제시하고 이어나갈 수 있는 좋은 작품이기를 기대한다.
<김민섭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