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아이들’의 엽기적인 살인 행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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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마치의 <배드 시드>(1954)에 등장하는 소녀 로다는 사악하기로는 추리소설 전반을 통틀어도 상위권에 속할 만한 인물이다. 로다의 나이는 불과 여덟 살.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얼굴을 가졌지만 그 뒤에는 욕망에 따라 그대로 행동하는 무서운 본능이 숨겨져 있다.

미국 대중영화 속설 중에 ‘절대로 어린이를 죽이는 장면은 넣지 말라’는 금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병이나 사고라면 몰라도 폭력으로 살해되는 장면을 보여주지 말라는 의미다. 기억을 더듬어 봐도 아이를 구하려다 죽는 장면은 부지기수로 보았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악당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모습을 본 일은 딱히 생각나지 않으니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속설 같다. 상업영화라면 관람등급에도 영향을 줄 만한 부분은 피할 테니 놀라운 현상은 아니다. 그런데 만약 천진난만한 어린이가 가해자로 등장한다면? 물론 어린이용 동화에서도 얼마든지 등장하는 개구쟁이나 말썽꾸러기가 아닌, 남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무서운 존재의 등장을 말한다.

총기 자유화 국가인 미국에서는 총기사고가 많이 벌어진다. 10월 중순 워싱턴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10월까지 3세 이하 아기가 일으킨 총기 오발사고는 확인된 것만도 43건에 달한다. 그 중에서 아기가 자기를 쏘아 숨진 것이 13건, 부상이 18건이다. 사람이 다치지 않은 사건은 신고되지 않았을 테니 이보다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총기 오발은 ‘우발적 사고’이지만, 조금 더 자란 어린이의 오발 중에는 어쩌면 ‘사고’가 아닌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명탐정들이라도 범죄자가 성인이 아닌 어린이라면 난감해지게 마련이다. 미성년자의 범죄는 추리소설에서 자주 나오는 소재는 아니다. 하지만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도 다룬 적이 있으니 꽤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명탐정 홈즈는 한 작품에서 새 엄마의 아기에게 관심이 쏠리자 앙심을 품은 열다섯 살 소년의 거듭된 살인미수 범죄를 밝혀낸 적이 있다. 집안에서 벌어진 일이고 미성년자였던 만큼 사법기관에 넘기는 대신 1년쯤 바닷가에서 보내라고 조언했지만, 경험 많은 홈즈조차 ‘인간의 얼굴에서 그토록 무서운 질투와 증오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소년의 증오심은 대단했다.

영화 <배드 시드>의 로다(패티 맥코맥 분)

영화 <배드 시드>의 로다(패티 맥코맥 분)

23명의 목숨을 빼앗은 연쇄살인범 소녀
또 미국의 유명 작가가 1930년대에 발표한 작품에서는 열세 살짜리 소년이 범죄를 저지른다. 소년은 다른 사람이 쓴 추리소설의 초고를 읽은 후 그것을 토대로 자신의 할머니를 살해한다. 그 진상을 알아낸 탐정은 끔찍한 집안환경에서 성장한 이 어린이에게 범죄에 대한 도덕적 관점을 물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빠진다. 하지만 그 소년이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살아간다면 사회에 위협적인 존재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극단적 방법을 선택한다.

윌리엄 마치의 <배드 시드>(1954)에 등장하는 소녀 로다는 사악하기로는 추리소설 전반을 통틀어도 상위권에 속할 만한 인물이다. 로다의 나이는 불과 여덟 살.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얼굴을 가졌지만 그 뒤에는 욕망에 따라 그대로 행동하는 무서운 본능이 숨겨져 있다. 영리하며 성숙된 사고력을 가졌지만 아이다운 죄의식이나 불안감은 전혀 없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반드시 차지해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도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다. 다만 이 무서운 소녀는 평범한 집안에 느닷없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독약, 도끼, 총 등을 사용해 무려 스물세 명이나 교묘하게 살해했던 외할머니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설정이 이어진다. 1950년대에 발표된 이 작품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대단한 충격을 주었다.

브라이언 커피(본명 딘 쿤츠)의 <어둠의 소리> 표지

브라이언 커피(본명 딘 쿤츠)의 <어둠의 소리> 표지

딘 쿤츠가 브라이언 커피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어둠의 소리>(1980)에서도 무서운 아이가 등장한다. 내성적이고 집에서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14세 소년 콜린은 같은 반에서 인기 있는 로이와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절친한 사이가 된다. 그런데 로이는 “뭘 죽여 본 일 있어?”라고 묻기 시작하면서 뭔가를 죽인다는 이야기를 거듭한다. 콜린이 농담을 하거나 자신의 담력을 시험하는 것으로 여기자, 로이는 사람을 죽인 이야기까지 한다. 그리고 함께 사고를 칠 계획을 꾸몄다가 콜린이 거절하여 실패로 돌아가자 로이는 자신을 배반했다고 생각하고 콜린을 죽이려 한다. 콜린은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얌전해 보이는 로이를 위험한 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과거에 로이가 친구를 여러 명 죽였다는 사실(모두 사고로 처리되었다)을 알게 된 콜린은 자기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자기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영화 <방황하는 칼날> 포스터

영화 <방황하는 칼날> 포스터

이웃 일본에서도 미성년자의 범죄를 다룬 작품이 종종 출간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영화로 제작된 바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황하는 칼날>(2004)에서는 불량 청소년에 의해 딸을 잃은 아버지가 자기 손으로 범인을 처치하겠다고 결심한다. 범인이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처벌 받을 가능성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법은 범죄자를 구해준다.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갱생할 기회를 주고 증오하는 사람의 시선에서 범죄자를 숨겨준다. 그 기간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짧다. 한 사람의 인생을 빼앗았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자는 인생을 빼앗기지 않는다. 더구나 미성년자인 경우, 어쩌면 교도소에도 가지 않을지 모른다.”(<방황하는 칼날> 이선희 옮김, 바움)

가노 료이치 <제물의 야회> 표지

가노 료이치 <제물의 야회> 표지

겉으로는 얌전해 보이는 살인자 소년
가노 료이치의 <제물의 야회>(2007)에서는 ‘범죄 피해자 가족의 모임’에 참가한 두 명의 여성이 살해되는데, 강력한 용의자로 그 모임에 패널로 참가했던 변호사가 지목된다. 그는 19년 전인 14세의 나이에 동급생의 머리를 잘라 학교 교문 위에 올려놓았던 엽기적 사건을 저질렀던 경력이 있는 무서운 인물이다. 그러나 그에게서 과거의 범죄에 대한 뉘우침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몇 년 동안 소년원에 들어가 있다가 옛 일이 세탁되고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변호사라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살인범이 변호사가 되었다면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놀랍게도 실제로 비슷한 사례가 있다. 1969년, 14세 소년이 동급생을 살해했다. 그러나 범인은 정신장애자로 판정되어 갱생 교육을 받은 뒤 소년원에서 퇴소한다. 소년법에 따라 그의 과거는 사라지고 이름조차 공개가 금지되어 있다. ‘깨끗해진’ 그는 명문대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반면 피해자 가족은 완전히 무너졌지만 범인에게서 진솔한 사과조차 받은 일이 없다.(<내 아들이 죽었습니다> 오쿠노 슈지, 웅진지식하우스) 실제 인물이 소설에서처럼 다 자란 후에 무슨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야기는 없지만, 제삼자의 입장에서도 분통이 터지는 현실이다.

한때 이런 사건은 소설이나 영화, 혹은 외국에서나 일어난다고 생각했었지만, 얼마 전 발생한 아파트 벽돌 투척 사건이나 도시가스 보일러실 방화사건 등 초등학생이 벌인 사건을 보면 결코 남의 나라 일만은 아니다. 때로는 소설보다 현실이 훨씬 무서울 때가 있다. 그게 잦아져서 더욱 겁이 난다.

<박광규 추리소설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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