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네임드>-다가올 미래는 ‘지금, 여기’의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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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네임드>에서 구태여 ‘지금/여기’로 인식되는 전반부를 학교로 그린 까닭은, 굴종과 체념, 이기주의와 성적(돈)이 오직 하나의 가치로 숭배되는 교육이 지속되면 결국 ‘다가올/여기’의 비극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기 위해서다.

이 만화의 특성상 한두 단어만 가지고도 아무것도 모르고 작품 보기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실망감을 줄 수 있다.(스포일러에 대한 경고다)

어느 날 단기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주인공이 대한민국 제1명문 사립고에 전학을 가게 된다. 주인공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깨어나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지점들을 계속 따라가 전학 가게 될 학교에 도착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어린 시절 자신이 좋아한 이지은을 닮은 또 다른 이지은을 만나 같이 학교에 가게 된다. 학생들은 전학생에게 아무 관심이 없고 자리에 앉아 공부만 한다. 지은이의 말에 따르면 “엄마들에겐 최고의 명문고겠지만, 아이들에겐 지옥과도 같은 곳”이다. 명문고에 실력으로 온 학생들은 한 반에 29번까지, 30번은 기여입학생이다.

몇 반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안내를 못 받은 전학생은 아무도 없는 복도를 헤매다 담배를 문 안경남을 만난다. 안경남은 대뜸 “너도 희한한 증상이 있나 보네?”라고 말한다. 안경남은 전학생을 옥상으로 데려가 사춘기 때부터 자신의 모습이 ‘흑백’으로 보였다고 말한다. 병원에서는 사물이 흑백으로 보이는 ‘단색 색맹’이라 진단하고 안경을 쓰라는 처방을 내렸지만, 모든 사물이 흑백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자기 모습만 흑백으로 보인다. 그런데 안경남의 눈에 전학생도 흑백으로 보였다고 한다. 예전에 흑백으로 보이는 학생이 두 명 있었는데, 30번 기여입학생과 이지은이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30번 학생이 일주일 전에 터널에서 실종되었다. 구 30번이 사라지자, 새로운 기여입학생으로 전학생이 온 것이다. 전학생은 그렇게 자신의 반(8반)과 번호(30번)를 알게 된다.

문지현 작가의 만화 <노네임드>의 한 장면 / 네이버 웹툰

문지현 작가의 만화 <노네임드>의 한 장면 / 네이버 웹툰

사라진 구 30번 학생을 쫓는 아이들
초반 도입부를 보면 현실을 고발하는 만화처럼 느껴진다. 공부에만 몰두하는 학생들, 따돌림, 성적순, 감옥 같은 학교 같은 설정들 때문이다. 독자들은 장르의 틀을 통해 만화와 조우한다. 장르의 틀 안에서는 ‘이름 없는 아이들의 이야기’라는 부제도 청소년의 현실에 대한 비유처럼 보인다. 전학생은 실종된 구 30번 학생의 반에 들어가, 구 30번 학생의 자리에 앉는다. 그러자 이지은에게서 문자가 온다. 야외 중앙휴게실에서 이지은을 만나자, 이지은은 구 30번 학생이 단기기억상실증을 극복하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메모를 했으니 그 메모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한다. 이지은, 전학생, 안경남은 팀을 이루어 여러 단서를 남기고 터널 속으로 들어가 사라진 구 30번 학생의 흔적을 쫓는다. 그 과정에서 학생과 선생의 문제는 물론 재단과 교직원의 부조리도 보여준다. 존재하지 않는 30번 학생의 아이디 M20830(2학년 8반 30번)이 등장하기도 하고, M20830을 검색하자 보안등급이 올라가 1급 계정(교장의 계정)을 요구하기도 한다. 게다가 행정실 직원들은 모두 실종된 상태다. 미스터리 장르의 법칙들이 들어오고, 이야기는 점차 하드보일드해진다.

여기까지가 도입부다. <노네임드>는 5부작으로 구성되어 있고, 지금 소개한 도입부는 1부의 전반부에 불과하다. 우리는 대중문화를 접할 때 장르의 틀을 통해 바라보는 경향이 있으니, 명쾌하게 장르부터 정리하자. <노네임드>는 SF다. 도입부는 ‘지금/여기’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처럼 보이지만, 실은 처럼 추리와 미스터리의 컨벤션을 활용한 SF다. 이를 위해 작가는 의도적으로 시대를 인지하지 못하게 하지만, 슬쩍 16화 소제목을 ‘2310AD’라고 적어 작품의 배경이 24세기라는 걸 드러낸다. 그러나 <노네임드>에서 시대는 큰 의미가 없다. 구태여 24세기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인류가 마주해야 할, 개연성 있는 미래이기 때문이다. 독자가 시즌 1에서 시즌 5까지 전체를 독파하다 보면, 어느 지점에서 1화부터 깔아놓은 복선들이 차근차근 맞아들어가며 SF, 그것도 인류 대종말 이후를 그린 포스트아포칼립스 장르라는 골로 도착한다.

구조적으로 볼 때 <노네임드>는 학교라는 익숙한 공간을 통해 ‘지금/여기’를 보여주는 전반부와 인류가 종말과 마주하는 ‘다가올/여기’의 후반부로 구분된다. 작품에서 그린 시대의 순서로 보면 ‘다가올/여기’가 과거이고, ‘지금/여기’가 현재지만, 독자들에게는 ‘지금/여기’가 계속되어 ‘다가올/여기’가 된다고 읽히기도 한다. <노네임드>에서 구태여 ‘지금/여기’로 인식되는 전반부를 학교로 그린 까닭은 굴종과 체념, 이기주의와 성적(돈)이 오직 하나의 가치로 숭배되는 교육이 지속되면 결국 ‘다가올/여기’의 비극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기 위해서다. 문지현 작가는 2015 제2회 SF어워드 후보작 작가 인터뷰에서 “그 끝에 이런 어둡고 암울한 미래가 다가올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작가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설명했다.

2015 SF어워드 만화부문 최우수작
<노네임드>는 한국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매력의 만화인데, 비유하자면 작품을 놓고 독자와 작가가 바둑을 두듯 한 수 한 수가 놓여져 전체 작품이 완성된다. <노네임드>는 독자의 꽤나 적극적 개입을 요구하는데, 작가가 깔아놓은 복선의 끈을 붙잡고 여러 장르의 특징을 종합해 나가며 저변에 깔린 진짜 장르와 마주하도록 한다. 이를 위해 작가는 상징적이고 단순한 작화를 선택한다. 그림이 주는 정서적 일치를 의도적으로 배제하다 보니 연재 초기 독자들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지적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작가의 의도적 전략이다.

<노네임드>는 독자들과 지적 대국을 하며 한 수 한 수를 완성해 나간다. 거대한 세계의 비밀에 접근해 나가다 보면, 애초에 보여준 상황이나 상징 혹은 대사들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복잡한 복선이 좀 더 감성적으로 다가가고, 즉각적으로 이해되는 웹툰 시대에 <노네임드>가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노네임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간다면(흔히 정주행이라고 한다) 누구라도 작가와 마주하고 한 수 한 수 완성해 나가는 <노네임드>의 매력에 쉽게 빠질 것이다. 2015년 10월 30일 국립과천과학관에서 개최된 2015 SF어워드 만화부문에서 <노네임드>가 최우수작으로 선정되었다. 안타까운 건 <노네임드>의 특성상 책으로 읽으면 만화의 재미에 쉽게 빠질 수 있을 듯한데, 여전히 단행본은 발매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박인하 만화평론가·청강문화산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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