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륵이 떠난 지 65년이 지난 오늘도 독일인들은 그의 책을 읽습니다. 독일의 대표적인 동양학자 볼프강 바우어(Wolfgang Leander Bauer)가 그의 제자이지요. 훌륭한 작가이자 선생이었던 그를 독일인들은 ‘완벽한 인간’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독일에서 베를린과 함부르크 다음으로 큰 도시 뮌헨. 이곳엔 이자르 강이 흐릅니다. 영국 런던을 가로지르는 템즈강과 프랑스 파리를 흐르는 센강의 낭만적인 풍경을 상상했다면 실망하기 쉽지만, 흐르는 물줄기의 위엄이 다릅니다. 독일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뮌헨 시내의 중심을 관통하는 강이기에, 건물과 도로는 강변에 바짝 다가서 있습니다. 지금은 시내 대부분의 운하가 복개됐지만, 뮌헨은 19세기까지만 해도 베니스와 같은 운하의 도시였어요. 운하의 총 길이는 70㎞에 달할 정도였다니, 도시를 관통하는 이자르 강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자르 강의 위엄을 느낄 수 있겠지요.
뮌헨의 휘장에는 수도승이 새겨져 있습니다. ‘수도승들의 공간’이라는 뜻의 무니헨(Munichen)에서 유래했다는 뮌헨(Munchen)은 수도승들이 힘을 모아 만든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문화와 경제의 중심지 뮌헨은 여유와 낭만이 넘칩니다. 독일의 다른 도시에 비해 물가는 무척 비싸지만, 뮌헨을 여행하고 나면 머물러 살고 싶은 유혹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뮌헨의 상징, 마리안느 광장의 뮌헨 시청사
‘수도승의 공간’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뮌헨
한국인들에게 뮌헨은 슈바빙의 전혜린 때문에 친숙하게 느껴지는 도시입니다. 전혜린의 흔적을 따라서 슈바빙을 걷고, 영국정원을 산책했다면, 다음은 이미륵(1899~1950)과 한스 숄(Hans Scholl, 1918~1943), 조피 숄(Sophie Scholl, 1921~1943) 남매와 함께 뮌헨대학교 거리를 걸을 차례입니다. 독일을 다녀간 사람이라면 숄 남매의 이름이 귀에 익을 것입니다. 독일에는 게슈비스터 숄 슐레(Geschwister scholl schule·숄 남매학교)라는 이름이 붙은 학교가 많습니다. 뮌헨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를 걸을 때도 한스 숄, 조피 숄 남매의 이름이 붙여진 광장이나 거리를 자주 만났을 것입니다.
숄 남매와 이 길을 걸으려면, 승리의 문 앞에서 걸음을 잠시 멈추십시오. 승리의 문을 통과하면, 뮌헨대 건물들이 도로 양쪽으로 펼쳐집니다. 우편의 뮌헨대 본관 앞 광장이 ‘숄 남매 광장’이고, 마주보는 광장이 ‘후버 교수 광장’입니다.
우리는 히틀러와 나치의 역사를 짚어봐야 합니다. 뮌헨은 1933년에 히틀러가 총리에 오르며 나치의 본거지가 됩니다. 나치는 첫 강제수용소를 도시 외곽 다하우에 건설했죠. 나치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 뮌헨을 개혁의 중심지로 삼았습니다. 나치당의 본부 건물도 뮌헨에 자리잡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반나치 비밀지하조직인 ‘백장미’라는 저항단체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곳이 백장미 결사대의 중심지였어요. 1943년 2월 17일, 뮌헨대 학생이던 한스 숄과 조피 숄 남매는 뮌헨대 광장에서 백장미의 반나치 유인물을 뿌렸습니다. 결국 남매는 2월 22일에 처형됐어요. 그때 뮌헨대 총장이던 후버 교수도 함께 처형됐습니다.

뮌헨대학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미륵.
히틀러에 반대 백장미단의 핵심 멤버
이쯤에서 2005년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영화 <조피 숄의 마지막 날들>(2005, 마크 로테문트 감독)이 떠오르는 사람도 있고, 쇼피의 큰 언니 잉게 숄이 쓴 책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 떠오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1942년, 뮌헨대 의과대생 한스 숄은 히틀러에게 속아서 진실을 알지 못하는 독일인의 양심과 정의를 일깨우기 위해 ‘백장미단’의 일원이 돼 등사기를 구입합니다. 알렉산더 슈모렐, 크리스토프 프롭스트와 함께 <백장미>라는 반정부 전단지를 인쇄하여 배포하기 시작하지요. 히틀러를 추종하는 독일 국민들의 양심과 정의를 일깨우는 내용이었습니다. 한스의 동생 조피는 우연히 전단을 읽게 됩니다. 전단에 적힌 생각과 문장은 매우 낯익었고, 함께해야 한다는 생각이 끓어오른 조피는 오빠 한스가 전단을 제작해 뿌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결국 조피는 한스의 걱정스런 만류에도 불구하고 백장미단의 핵심 멤버가 됩니다. 대학교가 희망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 한스는 여동생 조피와 함께 대학가 구석구석에 히틀러를 반대하는 전단지를 붙이고 뿌리는 과감하고 위험한 행동을 시작합니다.
드디어 뮌헨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공감과 행동의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1943년 1월, 뮌헨 지구 나치당 지도자 파울 기슬러가 연설을 하던 날, 뮌헨대 학생들이 기슬러에게 야유를 보내기 시작합니다. 그 때문에 백장미단은 게슈타포의 표적이 되고, 2월 18일에 백장미단 청년 14명은 체포되었습니다, 2월 22일 오후 5시, 그들 중 숄 남매와 크리스토프는 단두대에서 사형이 집행됩니다. 누구도 나치와 히틀러에 저항할 수 없도록 상징적인 처형을 감행한 것이었지요.

숄 남매 광장, 후버 교수 광장에는 의식 있는 학생들의 사회 참여적 행사가 자주 열린다. ‘교육을 받아라. 텐트캠프’ 등의 글씨가 플래카드에 쓰여 있다.
사형 집행의 순간까지 숄 남매를 주시하는 영화 <조피 숄의 마지막 날들>은 당당한 청년들의 모습을 클로즈업 합니다. 자식은 부모를 닮는 법. 단두대로 끌려가는 남매를 마주한 부모는 울지 않습니다. 남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일이 또다시 생긴다 해도 저는 똑같이 할 거예요.” 조피의 말에 부모는 답합니다. “네가 자랑스럽다.” “히틀러의 야욕을 독일 청년들이 막지 못하면 독일은 부끄러운 이름으로 남게 될 것이다.” 조피의 양심은 두려움과 공포를 이겼습니다. 크리스토프는 말합니다. “나는 죽음이 이렇게 쉬운 건지 몰랐다. 몇 분 후, 우리는 영원한 나라에서 다시 볼 것이다.” 형장에 도착한 한스는 단두대에 머리를 올려놓기 전에 감옥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칩니다.
“자유여, 영원하라!”
한스가 남긴 말은 오래도록 독일인들의 양심을 일깨우는 불씨가 됐습니다. 그들은 죽었지만, 그들의 희생은 양심과 정의를 위해 행동하는 열기를 독일 뮌헨에 전파시켰습니다. 사형을 집행한 간수들은 이후에 증언합니다. ‘그들은 거짓말같이 꿋꿋했고, 모든 죄수들이 그들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사형 집행은 몇 분 만에 끝났지만 큰 의미를 남겼다. 우리는 죽어가는 그들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눈을 감았다.’

숄 남매 거리
후버 교수를 소개하는 글을 쓴 이미륵
이들을 암묵적으로 지원했던 뮌헨대 총장 후버 교수도 이때 목숨을 잃습니다. 마주보고 있는 숄 남매 광장과 후버 교수 광장에 똑 같은 분수대가 있는 게 보이지요? 양심과 정의에 눈감지 못했던 그들의 정신은 오늘도 힘찬 분수의 물줄기로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후버 교수 광장을 바라보고 서 있으면, 한국인 이미륵이 광장 분수대 앞에 서서 이리오라고 손짓을 하는 듯한 환영이 보입니다. 이제 그와 함께 걸을 차례입니다. 독일의 곧은 정신이 뿌리내린 이곳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대한민국 사람, 이미륵을 만날 수 있습니다. 1999년에 방영된 수요기획에 출연한 후버 교수의 딸 바이스는 뮌헨대 백장미 기념관의 팸플릿에 후버 교수를 소개하는 글을 이미륵이 썼다는 증언을 했지요.
“백장미 사건으로 투옥, 사형당한 숄 남매를 이미륵 박사가 면회한 사실은 아직까지는 확인이 되지 않았지만, 이 사건과 관련해 투옥된 뮌헨대 총장 쿠르트 후버 박사를 면회 가서 식료품을 전하고 가족들을 찾아가서 남매의 교육문제를 상의하고 위로하신 건 사실입니다.”
당시 반나치 운동을 한 경우에는 그들의 가족과 접촉하는 것조차 감시 대상이 됐다고 합니다. 나치 독재정권이 악명을 떨치던 암흑의 시대에 독일 전 지역에 전단지를 뿌리며 독재국가에 저항했던 이들을 이미륵은 외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미륵, 그는 뜨거운 인간애를 실천한 사람이었고, 완전한 작가이자 굳건한 의지의 인간이었습니다.

슈바빙에서 걸어내려오면 만나는 승리의 문(Siegestor)을 지나면, 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뮌헨 대학교 건물들이 있다.
이미륵이 떠난 지 65년이 지난 오늘도 독일인들은 그의 책을 읽습니다. 독일의 대표적인 동양학자 볼프강 바우어(Wolfgang Leander Bauer)가 그의 제자이지요. 훌륭한 작가이자 선생이었던 그를 독일인들은 ‘완벽한 인간’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해마다 뮌헨에 가면, 독일이 사랑한 한국인 소설가 이미륵과 함께 그가 독일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문 뮌헨의 뮌헨대 거리를 걸으며 그를 추억합니다.
이미륵은 황해도 해주 대지주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한학을 배웠으며, 조혼해 1남1녀를 두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의 가장이 된 그는 어머니의 권유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지만, 그의 운명은 3·1 만세운동에 가담하면서 급변합니다. 3·1운동 직후 일본 경찰을 피해서 고향으로 도망쳐 온 아들에게 어머니는 단호히 말합니다.
“우리가 다시 못 만나는 한이 있더라도 슬퍼마라…. 내 아들아. 이젠 너 혼자 가거라.”
일본 경찰이 수배령을 내리자 안중근의 사촌 안봉근의 권유로 이미륵은 아내와 어머니, 1남1녀를 남겨둔 채 압록강을 건너 1920년에 독일로 망명했습니다.

후버 교수 광장
독일 문학계에 파란 일으킨 한국 작가
뷔르츠부르크대 의학부와 하이델베르크대 의학부를 거쳐서 뮌헨대 생물학부 동물학과로 전학해 1928년 뮌헨대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독일어를 한 글자도 모르던 청년이 8년 만에 이룬 학문적 결실은 믿기 어려울 정도이지요. 이미륵은 독일어로 작품이나 논문을 발표해 한국을 독일에 소개한 최초의 한국 작가이자 교수였습니다. 1948년부터는 뮌헨대 동양학부에서 한학 및 한국학을 가르쳤습니다.
1946년에 <압록강은 흐른다, Der Yalu fließt>를 출간했을 때에는 초판이 매진되며 ‘독일 소설가 이미륵’으로 이름을 알립니다. 독일인이 모르는 신비한 동양의 작은 나라의 이야기가 발표되자, 독일 문학평론가들의 서평이 100편 넘게 쏟아졌다고 해요. ‘올해의 가장 훌륭한 책’으로 <압록강은 흐른다>를 꼽기도 했습니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독일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문학성을 높게 평가 받았으며, 당시 책을 펴낸 독일의 저명한 출판사 중 하나인 피퍼출판사의 사장은 자신의 자서전에 ‘<압록강이 흐른다>는 내가 발간한 책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책 중 하나였습니다’라는 문장을 남깁니다.
<압록강은 흐른다> 전반에는 어릴 적 황해도 고향의 토속적인 풍경과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 녹아 있습니다. 꿀을 훔쳐 먹은 일, 이웃 아이들과 달밤에 벌이는 싸움박질…. 동양의 나라 한국의 독특한 문화와 서정적인 세계는 독일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동양의 정서가 물씬 풍겨나는 미지의 나라 한국의 이야기는 마치 환상 동화 같다는 평을 받았지요.
1946년, 전후 독일 문학계에 신선한 파란을 일으키며 나타난 한국인 이미륵은 독일어로 당시 조선의 이야기를 소설로 썼고, 독일인이 읽어도 아름다운 문체와 환상 동화 같은 동양의 이야기로 독일 문단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독일 문학가들의 눈에도 그의 문장은 어법이 정확하고 수려했기에, 동양인이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쓴 소설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지요. 독일 본대학교 한국학과 교수인 후베 박사는 과거 한국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외국인이 이러한 업적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한·독 문화교류에 큰 상징이 될 만한 분이다. 그의 문장들은 복잡하지 않고, 간단하고 흐름이 매끄럽다. 단어 선택도 아주 적당하고, 단순하지 않고 재미있다. 내가 한국말로 소설을 쓴다면 죽을 때까지 노력해도 그렇게 쓰지 못할 것이다. 감탄할 수밖에 없다”며 이미륵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대한민국은 평생을 타국 독일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던 그의 외로운 죽음을 오래도록 알지 못했습니다. 이미륵은 뮌헨 서쪽 그래펠핑 신묘지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이제 그래펠핑으로 떠날 시간입니다. 그 곳에 가면 숄 남매와 후버 교수도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그들에게 술 한 잔 올려야겠습니다.
<박상미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