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기념해야 할 인물로 앨런 튜링을 맨 앞자리에 놓고 싶다. 오늘날 인류는 그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음에도 고마워하기는커녕 그의 고국인 영국조차 죄인으로 만들어 죽음으로 내몰더니 지금껏 사면조차 하지 않고 있어서다.
튜링은 24살에 현대 컴퓨터의 기본 설계도라고 할 수 있는 ‘튜링 기계’를 고안한 천재 수학자다. 오늘날의 모든 컴퓨터는 튜링 기계가 제시한 이론체계에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세계 최초의 연산 컴퓨터인 ‘콜로서스’를 만들고 독일군의 암호체계 ‘에니그마’를 해독, 연합국의 승리에 크게 기여한 공로도 놀랍다.

‘튜링의 해’ 홈페이지(http://www.mathcomp.leeds.ac.uk/turing2012/) 로고 화면 중의 하나.
천재의 죽음은 어이없다. 동성애자라는 게 드러나 화학적 거세형을 당하고, 2년 후 불과 41세의 나이에 외로운 주검으로 발견됐다. 여성 호르몬 투여의 부작용으로 유방이 생기고 정신적으로 황폐해지자 청산가리를 주사한 독사과를 먹고 자살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애플의 로고인 한 입 베어 문 사과는 그에 대한 추모의 뜻이 담긴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공식적으로 애플 측은 이를 부인하지만)
2012년은 튜링의 탄생 100주년이다. ‘튜링의 해’를 맞아 그를 기리는 네티즌들이 활발한 추모활동을 벌이고 있다. 튜링을 단죄한 영국의 행위에 대해 2009년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의 사과를 받아낸 바 있는 이들은 이번에는 온라인 청원을 통해 공식 사면을 추진하고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영국 우정공사가 2월 발행 특별우표에 담을 ‘위대한 영국인 10명’ 속에 그를 포함시킨 것이다. 우표 가운데서도 특히 까다롭게 발행하는 것이 인물우표다. 오랜 우정 역사를 가진 영국은 인물우표 발행에 보수적이었다. 국왕 말고는 처음 우표에 등장한 인물이 윈스턴 처칠 전 총리였을 정도다. 특히 미국은 철저하게 살아 있는 인물을 배제했다. 이런 정책이 올해 비로소 바뀌었는데 그 배경에는 미국 우정공사의 만성적인 재정적자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도 인물우표는 잘 발행하지 않는 편이다. 금년도 우표 발행계획에도 인물우표는 없다. 굳이 꼽자면 11월에 발행할 ‘신라 박혁거세 특별우표’가 있는데, 인물우표라기보다는 ‘우리 문화 정체성 바로세우기’ 일환의 테마우표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우정사업본부는 이미 단군왕검(2008년), 금와왕(2009년), 주몽(2010년), 대조영(2011년) 특별우표를 발행한 바 있다.
가장 최근의 인물우표로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우표’(2010년), ‘윤봉길 의사 탄신 100주년 기념우표’(2008년), ‘제17대 대통령 취임 기념우표’(2008년) 등을 꼽을 수 있다. 현직 대통령에 대해서는 1988년 노태우 전 대통령부터 취임 때 1회에 한하여 우표로 발행하는 게 관례가 됐다. 다만 김대중 전 대통령 우표는 노벨평화상 수상 기념까지 포함해 2회 발행됐다.
우표에 가장 많이 등장한 대통령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1980년 11대 대통령 취임을 시작으로 외국 순방 때마다 해당 국가의 원수와 동반으로 우표에 등장한 것이 무려 33회에 이른다. 그 다음은 21종의 우표에 등장한 박정희 전 대통령, 9종이 발행된 이승만 전 대통령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김대중 전 대통령 우표가 2회, 최규하·노태우·김영삼·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 우표가 1회씩 각각 발행됐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유일하게 윤보선 전 대통령은 우표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인물우표 발행과 관련한 명확한 규정 같은 건 없다. 우정사업본부 우표팀 관계자는 “관례적으로 생존 인물을 주제로 한 우표는 발행하지 않는다”며 “다만 취임하는 대통령에 한해서 예외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정치적·종교적 논쟁이 있는 소재나 종교단체, 일반 개인을 기념하는 우표는 발행하지 않는 것이 내부 원칙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영국의 튜링처럼 올해 우표로 기념할 만한 인물이 어디 없을까.
<신동호 선임기자 hud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