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해외방랑기 ‘22km 곰마을 렌터카 일주’
처칠의 캐치프레이즈는 ‘전세계 북극곰의 수도·Polar Bear Capital of the World’다. 처칠역 입구에 커다랗게 간판이 붙어 있다. 세계 어디나 지방 관광 활성화를 위해 나름의 캐치프레이즈를 고안해 붙이고 있다.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나라 강원도 양구군의 ‘병영 추억의 고장’ (도대체 누가 다시 오고 싶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이었고, 개중 가장 현실을 반영한 캐치프레이즈는 처칠이었다. 바다 건너 스발바르 관광 정보를 공유하는 ‘스발바르 포럼’에서도 “정녕 북극곰이 보고 싶다면 캐나다 처칠로 가라”고 안내하고 있다.
아무렴 처칠엔 북극곰이 난무했다. 슈퍼마켓에서 파는 민트 사탕에도 북극곰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북극곰 입냄새도 박멸!’), 북극곰 출몰 주의 안내판(‘북극곰 떴다 하면 654-BEAR’)도 팔았다.
다만 북극곰만 없었다. 툰드라 버기를 타고 종일 찾아다닌 끝에 우리가 본 북극곰은 도합 두 마리였다. 눈에 핏발이 선 우리에게 가이드는 미안한 얼굴로 “이게 다 지구 온난화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무리 지구가 빠른 속도로 온난해져도 지난해 40마리이던 북극곰이 올해 2마리로 줄 수는 없다!
지정학적 이유로 개발된 처칠
진실을 향한 불타는 열망으로 우리는 직접 북극곰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일단 차부터 빌려야 했다. 북극곰의 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줄 무기도 없었고, 곰보다 빨리 뛸 자신도 없었다. 북극곰은 내키면 시속 50㎞로 뛸 수 있다. 나는 간신히 시속 5㎞로 걸을 수 있다. “차를 빌리고 싶다”고 하자 호스텔 주인이 어이없다는 듯 우리를 쳐다봤다. 북극곰 좇아갔다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 철없는 관광객이 또 있었다는 걸까. “너희들 말이야, 여기 도로를 다 합쳐봐야 22㎞밖에 안 된다는 건 알고 있는 거지?”
중고차 전문 탐락 렌터카엔 차 한 대가 남아 있었다. 주인은 코를 훌쩍이면서 싹싹하게 말했다. “북극곰 찾으러 가려는 거죠? 여기, 동네 쓰레기 매립장. ‘북극곰 식탁’이라고나 할까. 해질 때 가면 꼭 나와.” 숨길 것도 없었다. 도로도 없는 처칠에서 굳이 렌터카를 빌리는 관광객은 우리처럼 툰드라 버기에 한을 품은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기름은 이미 ‘만땅’이었다. 돌려줄 때 채워줄 필요도 없다. 뛰어봐야 벼룩, 달려봐야 22㎞니까.
‘론리 플래닛’ 캐나다편은 처칠에 북극곰 외에도 볼 것이 많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골프공 두 개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로켓 관제센터였던 폐건물이라든가, 시스템 변경으로 용도 폐기된 로켓 발사대라든가, 불발에 그친 미사일이라든가, 처칠 앞바다에서 좌초한 전함 같은 것들이었다. 압권은 ‘미스 피기’였다. 애칭까지 붙은 이 관광 어트랙션은 1979년 추락한 C46 수송기의 잔해다. 가까이 다가가면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비행기 부품도 볼 수 있다. 즉 추락한 뒤 아직까지 치우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보물찾기’를 하는 심정으로 마을 외곽에 흩어진 과학문명의 잔해를 찾아 다녔다. “오옷! 여기 날개 일부는 형체가 온전해!” “앗, 여기 유리처럼 반짝이는 것이 있어!” 망가진 부품 같은 걸 주워들고 기뻐하고 있자니, ‘미래소년 코난’에 나오는 코난과 라나라도 된 심정이었다. 핵전쟁으로 인류가 한 번 멸망한 뒤 새로 만들어진 과학문명 세계 귀퉁이에서 옛 문명의 잔해로 소꿉장난을 하는 소년소녀라고나 할까. 가뜩이나 을씨년스러운데, 날씨까지 한바탕 비라도 뿌릴 듯 흐려졌다.
인류를 멸망시킨 핵전쟁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은유한다면, 처칠은 과학문명의 귀퉁이가 맞았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북국의 이 작은 마을은 냉전시대 과학기지로 개발됐다. 처칠 앞바다인 허드슨만에서 직선으로 똑바로 배를 몰고 가면 러시아 최북단의 과학기지 무르만스크다. 북극을 가로지르는 말 그대로 ‘북극 항로’다. 그야말로 대단한 지정학적 위치다. 처칠이라는 마을 자체가 이 위치 때문에 만들어졌다. 캐나다 인디언들과 비버며 여우며 북극곰의 모피를 교역하던 유럽의 상인들이 유럽과 북미를 잇는 가장 빠른 루트로 처칠 뱃길에 주목했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일단 세계지도를 치우고 지구본을 꺼내야 한다. 지구본을 두 다리 사이에 끼고 위에서 내려다보면 보인다. 프랑스와 영국을 출발한 상선들이 북해를 지나, 그린란드를 스쳐, 캐나다 북부의 섬과 섬을 가로질러 허드슨만으로 쏙 들어오는 것이다. 지금의 처칠항에 교역센터가 만들어진 것은 1717년의 일이었다. 항구에는 이제 페인트가 벗겨진 건물 위로 나무 간판만 처량하게 삐걱거렸다. ‘경고용’인지 ‘관광용’인지 북극곰 경계 안내판이 앙증맞게 서 있었다.
그때 사이렌을 울리며 경찰차 한 대가 눈앞을 가로질렀다. 우리도 재빨리 싫다는 차를 달래 힘겹게 시동을 걸었다. 달려봐야 2차선 일직선 도로인데, 경찰차는 쏜살같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우리는 거대한 쓰레기 매립장 앞에 서 있었다. 쓰레기를 실은 트럭 한 대가 천천히 쓰레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재빨리 차 안을 훑어보고 콜라 캔이며 과자 봉지며 먹다 남은 빵이며를 주섬주섬 챙겼다. 물어보면 쓰레기 버리러 왔다고 할 참이었다. 20m쯤 차를 몰고 들어왔을까. 쓰레기 더미 위로 하얀 물체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북극곰이었다. 어미곰과 아기곰 두 마리. 곰 가족은 머리를 흔들며 쓰레기 더미를 헤치고 있었다.
쓰레기장은 ‘북극곰 식탁’
어미곰의 배는 멀리서도 홀쭉해 보였다. 북극곰은 물범을 먹고 살아야 하는데, 물범 사냥 출발 시기가 자꾸만 늦어지고 있다. 지구 온난화로 허드슨만이 얼어붙는 시점이 늦어지기 때문이다. 내륙 체류가 생각보다 길어지면서, 배가 고픈 북극곰들은 마을로 마을로 내려온다. 마을 입구의 쓰레기 매립장은 그들의 ‘식탁’이 됐다. 어미곰은 쓰레기 더미를 헤치다 말고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아기곰들이 제대로 따라오는지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천천히 북극곰을 향해 접근하던 인간 북극곰(여행 동행자)이 자동차의 시동을 껐다. 오른쪽 어깨에 카메라를 걸친 그가 훌쩍 차에서 뛰어내렸다.
“안돼! 돌아와!” 내 비명은 그러나 입모양뿐이었다. 소리를 질렀다간 북극곰이 놀라 도망가실 것 같고, 그대로 두고 보자니 신문 헤드라인 ‘신혼여행 왔다 과부로 돌아가’가 머릿속에서 번쩍거렸다. 발을 구르고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있는데, 쓰레기차 아저씨가 경적을 울렸다. 빵빵. 클락션 소리에 놀란 어미곰이 벌떡 일어났다. 잠시 우리를 빤히 쳐다보던 북극곰은 뒤로 돌아 겅중겅중 뛰기 시작했다. 플라스틱 덩어리를 힘겹게 빨던 아기곰 두 마리도 엄마곰을 따랐다. 매립지 언덕 위에 세워놓은 포클레인의 긴 그림자 너머로 곰 가족은 사라졌다. 가봐야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온 지구가 작정하고 뜨거워지고 있는데. 그 해 겨울엔 이따금씩 그 곰 가족의 안부가 궁금했다.
<글·사진 최명애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 glauk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