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미술관’ 꿈꾸는 배순훈 국립현대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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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세계경영은 우리 것을 세계에 알리는 일”

[신동호가 만난 사람] ‘세계적 미술관’ 꿈꾸는 배순훈 국립현대미술관장

배순훈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인터뷰하려던 참에 엉뚱하게도 46년 전의 신문 기사를 접하게 됐다. 송철원 현대사기록연구원 이사장이 보여 준 것으로, 거기에 배 관장의 미래와 관련된 글이 실려 있었다. 눈이 번쩍 뜨여 그것을 속주머니에 넣었다.

이번 인터뷰는 기업인 출신이 미술관 경영을 어떻게 하는지 들어보려는 것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국립 미술관으로서, 순수미술을 발전시키고 국민의 문화·예술 혜택을 넓히기 위해 만든 국가기관이다. 한국 미술의 상징이자 센터가 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국립현대미술관장은 고도의 예술적 감수성과 전문성이 요구되는 자리인데, 합리성이 몸에 밴 최고경영자(CEO) 출신이 어떻게 일을 해 나가는지 궁금했다.

또 다른 궁금증은 배 관장 개인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학자, CEO, 관료 등 다양한 영역에서 선명한 이력을 남겼다. 카이스트(KAIST) 부총장, 대우전자 회장,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것쯤은 웬만한 사람이면 다 기억할 것이다. 대중적 인지도가 높고 정년이 무기한인 카이스트 특훈교수인 데다 지금도 기업으로부터 경영컨설팅 요청이 많은 상황에서 굳이 국립현대미술관장 자리를 탐한(?) 까닭이 뭘까. 더욱이 장관까지 지낸 마당에 그보다 낮은 실장급 자리를 말이다. 취임 당시의 ‘미래세대에 대한 봉사’라는 공식 답변만으로는 쉬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

두 가지 궁금증을 갖고 배 관장을 만났다. 폭설 때문에 예정된 인터뷰가 하루 미뤄진 1월 5일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았다. 눈은 치워졌지만 혹한으로 얼어붙은 길이다 보니 더 멀어 보였다. 눈 속에 파묻힌 미술관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쥐덫> 무대처럼 바깥과 두절돼 고립된 세계처럼 느껴졌다.

취임한 지 거의 1년이 됐습니다. 일을 해 보니 처음 생각한 것과 다른 점이 있습니까.
“저는 미술관이 창의적인 데 기여하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도 창의적이지 않아요. 오히려 관료적이에요. 작가들이나 미술계도 밥그릇을 놓고 싸움하는 것처럼 보이고요. 미술에 대한 인프라스트럭처가 잘 안 돼 있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외국으로 나간다는 걸 이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미술계의 풍토가 예상 외로 배타적인 게 많다는 걸 알았습니다.”

예상 밖인 것은 오히려 배 관장의 답변이었다. 첫마디부터 미술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감 없이 드러냈기 때문이다. 배 관장이 솔직한 사람이든지 미술관의 관료화와 미술계의 배타적 풍토가 그만큼 심각하든지 둘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아니 둘 다일지도 모른다.

왜 그렇게 됐다고 봅니까.
“중요한 것은 세계에서 아시아 미술이 뜨는데 거기에 한국 미술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일본 미술은 이렇고, 중국 미술은 저렇고, 한국 미술은 어떻다는 얘기가 나와야 해요. 그럴 만한 나라 규모나 경제 수준이 됐습니다. 그런데 일본이나 중국 얘기는 있는데 한국 얘기는 없어요. 우리는 이런 걸 추구한다는 컨센서스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닌가 생각해요.”

국립현대미술관이 서울시립미술관과 같은 공립 미술관에 비해 더 관료적이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국립 미술관에 재정 투입이 더 많기 때문이에요. 정부가 지원을 많이 한 것이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게 아니냐는 거죠. 그래서 정부에서 특수법인화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고요. 이제까지는 책임운영 기관이었는데 특수법인화해서 완전히 책임을 지게 하자는 거지요.”

국립현대미술관은 2006년 기관장을 공개 채용해 일정 부분 자율권과 책임을 부여하는 책임운영 기관으로 전환했다. 특수법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부가 투자하고 공익을 추구하되 회사 형태를 취한다. 내부적으로는 신분 불안, 외부적으로는 상업화 우려 때문에 반대가 있지만 문화체육관광부가 강하게 추진하고 있다.

특수법인화가 언제쯤 이뤄질 것으로 봅니까.
“원래는 올해 말에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7월이면 가능하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어요. 굉장히 빨리 진행되고 있습니다.”

특수법인이 되면 어떤 점이 좋다고 생각합니까.
“특수법인화를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인사를 좀 더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고, 반대하는 쪽은 예산이 준다는 것이지요. 예산은 장관도 안 줄인다고 하고, 공공 서비스의 수요가 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줄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특수법인화하는 게 아주 장점이 많죠. 아무래도 가장 큰 부분은 인사지요.”

특수법인화와 맞물려 국립현대미술관에 있어 또 하나의 큰 현안은 서울 종로구 소격동 옛 국군기무사령부 부지에 계획된 서울관 건립이다. 2012년 완공 목표로 현재 설계 아이디어를 공모하고 있다. 배 관장은 지난해 3월 취임 때부터 “세계적인 미술관을 짓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최근 국군서울지구병원 이전 결정이 나면서 그의 꿈이 현실화하고 있다.

서울관의 기본적인 설계 방향은 어떻습니까.
“우선 규모 면에서 세계적입니다. 영국 런던의 테이트모던보다 더 큰 미술관이 됩니다. 전시 공간이 더 넓어요. 그 다음이 콘텐트를 어떻게 세계적으로 하느냐는 것인데, 그 얘기를 지금 하고 있습니다. 서울관은 그 앞으로 연간 1000만명이 지나다니는 곳이에요. 10명 가운데 한 명을 우리 미술관에 들를 수 있게 하려면 어떤 전시를 해야 하느냐가 중요하죠.”

서울관이 들어서는 곳은 우리 근현대사와 문화사의 여러 요소가 중첩된 의미 깊은 공간이지 않습니까.
“한국의 지난 100년 동안은 너무나 중요한 역사예요. 식민주의가 망하고, 2차 대전이 끝나고,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급격히 민주화가 이뤄지고…. 굉장히 짧은 기간에 일어난 그런 역사가 거기에 다 담겨 있어요. 그 이전에도 조선 왕실의 종친부가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의 경성의전 부속병원에서 시작해 6·25 한국전쟁 때 많은 부상자를 치료한 수도육군병원, 군사독재의 핵심 조직인 기무사 등이 있었던 곳이지요.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시면서도 잠깐 있었고요. 이런 것들이 전부 중요한 역사지요. 시각적 표현 중심이 아니라 이런 역사를 나타낼 수 있도록 훨씬 철학적이고 개념적인 요소가 들어가는 미술관으로 갈 것입니다.”

배 관장은 옛 기무사 본관 건물 보존 문제라든가 발굴 조사나 공사 과정에서 나올 수 있는 유물·유적의 처리 방안에 대해서도 말했다. 건축사적 가치 때문에 문화재로 지정된 기무사 본관 건물은 한국건축가협회가 작성한 조사보고서를 가지고 문화재위원들과 상의할 예정이고, 발굴·공사 과정에서 나오는 문화재는 그 장소나 박물관에 보존하도록 할 계획이라고 한다.

“결국은 CEO에게 원하는 게 창의성 같아요. 미술관도 과거의 체제대로 운영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좀 해 보라는 것 아니겠어요.”

“결국은 CEO에게 원하는 게 창의성 같아요. 미술관도 과거의 체제대로 운영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좀 해 보라는 것 아니겠어요.”

국립현대미술관의 중장기 계획으로 서울관 외에 미술정보관 건립이 있던데, 예산이 10억원도 채 안 되더군요.
“그걸 확대하려고 해요. 한 10배는 돼야 합니다. 그것도 빨리 해야 돼요. 요즘 젊은 작가들이 활발하게 작품을 생산하는데 그런 게 정리가 안 되니까 영원히 정리가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에 앵포르멜-모노크롬 작가 이후에 추상표현주의 작가가 굉장히 많은데 그게 쑥 빠졌어요. 최근 새로운 작가들이 앞선 작품을 많이 하지만 그 중간에 핵심이 빠졌기 때문에 한국 미술이라는 게 없는 거예요. 이런 것이 정리가 돼야 하는 거죠.”

미술관 얘기는 이 정도로 정리할 요량으로 속주머니에 비장했던 기사를 꺼냈다. 그것은 1964년 5월 26일자 경향신문 사회면에 난 ‘딸은 데모, 아버지는 포기 종용’이라는 제목의 취재 낙수였다. ‘이날 미대 데모의 히로인인 신수희양은 미대에 수석으로 입학한 재원으로 작년에 서울대학을 졸업할 때 최고회의의장상을 받은 신수정(음대 졸, 오지리 유학중)양의 동생이다. 그런데 이날 상오 치안국장과 함께 주동학생에게 데모 포기를 종용하러 나온 문교부 신집호 장학관의 딸이었으니 아이로니컬한 대조-.’

이 기사 좀 보십시오. 사모님에 대한 것입니다.
“(기사를 읽어보고는 웃으며) 예, 맞아요. 여학생회장을 했거든요. 장학관 딸인 것 때문에….”

그때 이미 사귀던 사이였습니까?
“사실은 6·3이 끝나고 대학교 4학년 때 군대를 갔다가 제대한 뒤부터입니다. 당시 학생회를 중심으로 학생운동을 했기 때문에 그런 모임에서 집사람을 만난 거죠.”

배 관장이 4학년 재학 중에 군대에 간 ‘비화’를 제가 압니다. 수배 중이던 친구를 집에 숨겨준 것 때문이죠.
“송철원군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두들겨 맞은 사진을 제가 외신기자한테 전달했어요. 지금 기억이 분명치 않는데 뉴욕타임스인 것 같아요. 거기 1면에 그 사진이 크게 났어요. 그 다음부터 정보부에서 어떻게 철원이를 찾아다니는지…. 철원이는 우리 집에 있고… 한 6개월 갔던 것 같아요. 이런 시대니까 아버님이 저를 군대에 보냈어요. 육군에는 안 받아줘서 해병대에 지원했죠. 군에 간 뒤에 철원이는 아버님하고 이모가 잘 숨겨서 잡히지 않았고요.”
배 장관이 부인 신수희씨(서양화가)를 만난 것은 6·3학생운동 때문이고, 그것이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장이 된 인연인 셈이다. 지나서 보면 모두가 운명이고 인연이지만 이런 인연이 어디 흔할까 싶다. 기막힌 인연은 더 이어진다.

카이스트 교수에서 기업인으로 변신했고, 정통부 장관까지 지내고 뒤늦게 문화예술계에 뛰어든 이력이 놀랍습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길을 그렇게 들었던 것 같아요. 졸업하고 최고 직장이라는 한국기계에 취직했는데 형편없었어요. 그래서 유학을 갔는데 실력도 없고 영어도 못 했으니 얼마나 고생을 했겠어요. 그런데 동기생 가운데 박사는 제가 가장 먼저 받았어요. 그때부터 인생이 그렇게 된 거예요.”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을 나오니까 미국에서 영주권과 비밀취급 인가를 탁 줘요. 제가 원자력 잠수함에 들어가는 기계를 설계했거든요. 미국에 있으면 꽤 괜찮았는데, 집사람 때문에 서울로 돌아와 카이스트 교수를 하게 됐거든요. 그때가 박정희 시대였죠. 홍릉에다 굉장한 단지를 지어 놓고 박사들 데려다가 연구를 막 시키는데, 제가 로켓 연구를 했습니다. 내 책에도 썼지만 어느 날 박 대통령이 연탄 온돌에서 사람이 죽는데 MIT 박사면 그런 문제 좀 해결하라고 했어요.”
연탄 가스 중독 문제를 해결하면서 카이스트에서 4년을 보낸 뒤 배 관장은 기업인이 됐다. 특별한 목표가 있었던 게 아니라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요청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때 그는 지금에 와서 ‘세계적인 미술관’을 꿈꾸게 된 것과 연결되는 또 하나의 묘한 인연을 경험한다. 보안사(지금의 기무사)의 압력을 받고 해외 건설로 눈을 돌린 사건이었다.

대우에 가서 어떤 일을 했습니까.
“1980년대 중화학조정위에 끼어 원자력발전소를 지어야 한다고 막 주장했어요. 지금의 두산중공업 전신인 한국중공업 원자력 담당 전무를 했는데, ‘3허씨 세력’에 쫓겨났죠. 에피소드가 있는데, 어느 날 전화가 왔어요. 보안사 아무개 중령인데 울진원전 입찰에 손을 떼고 청와대에는 얘기하지도 말라는 겁니다. 무시무시한 얘기여서 김우중 회장한테 그대로 전했어요. 김 회장이 노태우 보안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안 받아요. 아, 이건 분명하다고 해서 포기했죠. 입찰을 다 따놓은 건데 포기하려니까 얼마나 억울해요. 김 회장이 날 달래더니 국내에서는 안 통하니까 해외로 나가자고 해요. 그래서 해외 건설로 간 겁니다.”
배 관장은 자신의 원자력 꿈을 좌절시킨 보안사 자리에 30년 후 미술관을 짓게 됐고, 그 때문에 김우중 회장과 함께 펼쳤던 ‘세계경영’의 경험을 미술관의 ‘세계화’로 구현하게 됐다.

요즘 모든 분야에 CEO형 인재를 요구하지 않습니까. CEO형 미술관장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사람들이 CEO한테 기대하는 것은 남이 생각지 않은 생각을 하라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교육 받고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체제 밖에서 하는 걸 참 잘 못해요. 제가 마흔 살에 다시 공부를 하겠다고 미국 스탠퍼드대에 가니까 ‘너는 우리와 경쟁관계인 MIT 출신이니까 거기서 배운 걸 가르쳐라’라고 하더군요. ‘뭘 가르치면 되냐’니까 창의성이라는 겁니다. 결국 CEO에게 원하는 게 그것 같아요. 미술관도 과거 체제대로 운영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좀 해 보라는 것 아니겠어요.”

그동안 저서와 강연을 통해 국가 전략과 비전을 제시해 왔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2030년이 되면 우리나라가 일본을 능가하는 경제 대국이 될 겁니다. 학생들의 실력이나 자질도 미국 최고라는 MIT나 스탠퍼드대보다 우리 카이스트가 훨씬 나아요. 다만 봉사활동이 좀 부족하고 자신이 없어요. 취직 걱정이나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여기 인턴들에게 한 시간 반 동안 얘기했는데, 우리 젊은이들이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어요. 두 번째는 박애 정신입니다. 이번에 우리가 원조를 제공하는 국가가 됐으니까 이건 굉장히 좋은 거예요. 지금 인류사회는 노령화 시대로 들어갔고 녹색성장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런 걸 한국 사람들이 가장 잘할 수 있어요. 기회도 왔고 실력도 갖췄다, 그러니까 신나게 가자고 했어요.”

미술 부문도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까.
“주한 이스라엘 대사가 한국을 ‘비밀의 땅(Land of secret)’이라고 하더군요. 남대문시장에 가면 없는 것이 없는데 그걸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모르는 우리의 세계적 자산이 많습니다. 미국의 조각가 리처드 세라는 포스코와 일을 하고 싶어해요. 10~15㎝ 두께의 철판을 구부리는 기술은 우리나라 조선소가 세계 제일이거든요. 세계 ‘톱5’에 드는 제임스 터렐이란 작가는 한국전쟁 때 수도육군병원에 6개월 입원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 서울관이 들어서면 꼭 작품을 하고 싶다고 해요.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은 그 시대의 세계경영이었습니다. 이 시대 세계경영은 우리가 갖고 있는 걸 세계가 알게 하는 것입니다.”

<글·신동호 기획위원, 사진·김석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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