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의 제도와 형식의 구속에서 자유로운 파격적 작품
![[문화]박찬욱의 ‘박쥐’ 감미로운 공포](https://img.khan.co.kr/newsmaker/824/64_a.jpg)
박찬욱 감독의 신작 <박쥐>는 개봉 전부터 꽤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다. 그는 공공연히 이 작품이 10년 이상 공을 들인, 자신의 최고작이 될 거라고 말했다. 뱀파이어 신부를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장르에 대한 기대도 있었다. 그의 B급 영화적 취향이 다분히 반영된, 파격적인 형식이 나올 거라는 짐작이 많았다. 하지만 막상 공개된 작품은 관객의 허를 찌른다. 예상 외로 진중한 작품이다. 긴 상영시간 속에 이야기 또한 대단히 완만한 속도로 진행된다. 관객들의 불평이 나올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박쥐>는 박찬욱의 그 어떤 영화보다 파격적이며 전작들을 다시 검토할 필요성을 느낄 만큼 색다르다. 개봉 첫날, 한 번의 관람만으로 이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곤란할 지경이다. 급격한 변형의 형식을 간파하는 것이 관건이다. 박찬욱은 <박쥐>에서 자신의 영화를 이끌어왔던 몇 가지 강박적인 테마들, 이를테면 살인, 복수, 도덕, 구원 등의 테마를 무차별적으로 전시하고는 재빨리 하나의 테마에서 다른 테마로, 하나의 형식에서 다른 형식으로 뱀파이어의 공중제비처럼 재빨리 건너뛴다. 뒤죽박죽처럼 보이지만 장르의 기대를 배반하고 벗어나는 것이 요체다. 장르의 제도와 형식의 구속에서 재빨리 빠져나가는 작품이란 말이다. 지극히 자유로운 영화라는 말이다.
에로틱하면서 시적인 장면
이야기의 전개는 복잡하지만 틀은 단순하다. 신부인 상현(송강호)은 질병에 시달리는 환자들의 사망을 지켜보는 일로 괴로워하다,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백신 개발 실험에 자원해 참여한다. 치명적인 죽음이 예고된 이 실험에서 상현은 실험 도중 사망한다. 그런 그가 우연히 뱀파이어의 피를 받아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다. 그의 부활은 영묘한 치유력이 그에게 있다는 소문으로 번지고 광신적인 신도들이 그를 따른다. 그러다 옛 친구이기도 한 강우(신하균)의 병을 고쳐달라는 라여사(김해숙)의 의뢰로 상현은 친구의 집을 방문한다. 그곳에서 그는 강우의 아내인 태주(김옥빈)를 만나고 그녀의 은밀한 매혹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문화]박찬욱의 ‘박쥐’ 감미로운 공포](https://img.khan.co.kr/newsmaker/824/64_b.jpg)
대략적인 개요만 보더라도 <박쥐>는 뱀파이어 공포영화라기보다 치정 멜로물에 훨씬 근접해 있다. 상현과 태주의 정념을 몸으로 표현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당했다. <올드 보이>에서 얼핏 보였지만, 박찬욱의 영화에서 사랑을 나누는 일탈적인 순간들을 지켜본다는 것은 의외의 일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랑의 순간이 타인의 몸에 대한 갈망을 포함한다면, 이는 뱀파이어의 존재론적 본성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타인의 피를 자신의 몸 안으로 흡입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뱀파이어의 존재성이 타자의 몸을 향한 열망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박쥐>는 그런 점에서 에로틱하면서도 감미로운 공포가 흐르는, 매우 시적이고 아름다운 장면들을 갖고 있다.
유머러스한 순간도 많다. 송강호가 분한 뱀파이어 신부는 송곳니를 드러내는 일도 없고, 목을 깨물어 피를 빨아들이는 전통적인 행위도 하지 않는다. 그는 링거액 튜브를 이용하거나, 보조기구를 동원해 피를 보충한다. 종종 이러한 행위는 종교적인 의식과 동반되기도 한다. 가령, 교통사고로 죽음 직전에 처한 남자의 고해성사를 치르면서 그는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닦아 먹는다. 피를 먹는다기보다 몸의 분비물인 고름을 빨아먹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박쥐>는 하나의 장면으로 해석되길 거부하는, 이런 모순적인 충돌들을 대량으로 전시한다. 이 영화는 ‘복수 삼부작’보다는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와 맥을 같이 하는 영화라 할 수 있다. <박쥐>는 마치 구로사와 기요시가 <도플갱어>에서 그러했듯이 모든 장르를 공존시키고 변주하는 기이한 실험으로 이채롭다. 블랙코미디를 기조로 하면서 뱀파이어 공포영화, 실험 영화, 범죄 치정극, 활극을 거쳐 멜로드라마가 마지막을 장식한다. 개별 장르의 유희 규칙을 넘어서는 것만 아니라 총체로서의 장르를 넘어서는 정의 불가능한 작품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문화]박찬욱의 ‘박쥐’ 감미로운 공포](https://img.khan.co.kr/newsmaker/824/65_a.jpg)
이런 장르적 변형을 손쉽게 타란티노나 로드리게스의 영화에서 엿보이는 유희성으로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당한 평가는 아니다. 차라리 초현실주의적이라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뱀파이어와 신부, 상현과 태주, 상현의 수도원과 태주의 일본식 적산가옥 등, 다양한 충돌과 기이한 만남이 <박쥐>에는 즐비하다. 이는 초현실주의자들이 친숙한 사물을 색다른 방식으로 활용하면서 충격을 만들어내는 데페이즈망(depaysement)의 기법을 활용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가령, 태주가 거주하는 집의 내부 공간과 배치 방식은 이런 모순적인 충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식 가옥의 외관과 한국의 전통 복식, 러시아 보드카와 중국식 마작, 어둠과 빛의 충돌이 이곳에 집합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박쥐>의 전반부는 종교적 희생과 구원, 영생과 관련한 문제가 다뤄진다. 고아원에서 성장했던 상현은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사와 그들의 영적 구원을 거두는 신부가 되는 일 사이에서 결국 신부가 된 인물이다. 하지만 타인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그로 하여금 치유의 백신 실험에 참여하게 만든다. 이러한 동기는 그러나 영화에서 그다지 중요하게 부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실험을 거쳐 죽음에서 부활로 이끌린 상현에게 부여된 다른 과제가 중요한 문제로 출현한다. 그가 뱀파이어가 되면서 죽음이란 문제는 죄의식의 문제와 겹친다. 이를테면, 뱀파이어로서 상현은 윤리의 명령이나 종교적인 소명에서 떨어져, 선악의 피안에 자신을 위치시키게 된다. 뱀파이어에게 살인이나 강간미수는 법적·윤리적인 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의 성립을 위해 그는 경우에 따라서는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다. 자살을 원하는 자를 도와 편안한 죽음을 이끌어내고 죽어가는 자에게서 피를 보충해 살아갈 수 있다. 박찬욱의 전작에서 극적인 카타르시스를 동반한 살인의 순간이 변모하는 지점이다.
다양한 충돌과 기이한 만남 즐비
![[문화]박찬욱의 ‘박쥐’ 감미로운 공포](https://img.khan.co.kr/newsmaker/824/65_b.jpg)
장르의 변형형식, 기법의 데페이즈망만큼이나 인물들 또한 행위의 변경을 이뤄내려 한다. 상현과 태주는 일종의 미치광이적인 기획을 세우는데, 그 하나는 스스로 다른 행동으로 나아가려는 숭고할 정도의 초월적인 기획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의 힘으로 환경과 대결하려는 영웅적 행위다. 이 둘은 서로 다르지만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이들은 인간을 넘어선 ‘포스트 휴먼’ 혹은 ‘비인간’들이다. 이들의 최종적 선택은 숭고와 영웅성을 넘어선 자살 혹은 순교로 이끌린다. 뱀파이어를 죽음으로 이끄는 빛은 사실상 모든 것을 복구해주는 정신의 빛이다. <올드 보이>와 <친절한 금자씨>의 백색의 눈, 혹은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의 백색 폐쇄병동을 넘어서 <박쥐>에서 박찬욱은 백색의 순수한, 내재적인 정신적 빛을 찾아 나선다. 감미로운 결말이다.
김성욱<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