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리운 삶, 사람이 그리운 사람
우리 어릴 적 작두질로 물 길어 먹을 때
마중물이라고 있었다
한 바가지 먼저 윗구멍에 붓고
부지런히 뿜어대면 그 물이
땅속 깊이 마중나가 큰물을 데불고 왔다
마중물을 넣고 얼마간 뿜다 보면
낭창하게 손에 느껴지는 물의 무게가 오졌다
누군가 먼저 슬픔의 마중물이 되어준 사랑이
우리들 곁에 있다
누군가 먼저 슬픔의 무저갱으로 제 몸을 던져
모두를 구원한 사람이 있다
그가 먼저 굵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기에
그가 먼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꿋꿋이
견뎠기에
-임의진 ‘마중물이 된 사람’
#1 참꽃 피는 마을 |
그는 목사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 역시 목사의 아들이었다. 그의 형은 다운증후군 환자였다. 그의 형이 하늘로 돌아갈 때까지 그는 ‘침묵하는 자기’ 안에 갇혀 있었다. 그가 17살 때, 그의 형이 마침내 하늘나라로 올라간 후 그는 겨우 침묵 속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는 이미 세상의 슬픔을 알아채버렸다. 조숙한 이 아이는 끊임없이 세상과 불화하면서도 사람을 그리워했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장래 희망을 ‘사람’이라고 적었다가 담임에게 불려가 실컷 매를 맞았다. 그로써 그의 고교시절도 잠정 중단되었고, 그는 5년 만에 겨우 고등학교를 마쳤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서울의 한 신학대학을 마치고, ‘마르크스의 머리와 예수의 가슴’을 지닌 채 강진으로 내려갔다. 그곳에 그의 아버지가 설립한 교회 중 하나가 있었다. 너무도 가난해서 전도사조차 둘 수 없었던 교회였다. 너무도 가난해서 교회조차 다닐 수 없는 마을에 있는 교회였다. 그는 그 가난에 안주했다. 그는 가난하면서 볕만 좋은 그 마을을 ‘참꽃 피는 마을’이라고 부르고, 그 언덕배기에 볕만 좋은 교회를 ‘남녘교회’라고 이름 짓고 마침내, 당연히 가난한 목자가 되었다.
내가 아는 사람이 있다. 그는 멀리 남쪽마을에서 사랑하며 사랑받으며 가난한 이들과 이웃하여 살아가는 젊은 목사다. 어떤 날은 기타를 퉁기며 노래를 부르면서 철새가 날아가는 하늘을 바라보기도 하고, 어떤 날은 곧 댐이 들어선다는 강에 나가 하루 종일 강물만 바라보고 앉아 있기도 하고, 어떤 날은 동네사람들과 늦은 밤까지 술 한잔을 나누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집이 떠나가라 음악을 틀어놓고 눈을 감고 툇마루에 드러누워 있기도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쪽지로 묶어 나누고, 돈이 다 떨어져 본의 아닌 칩거에 들어간 그를 한동안 볼 수 없기도 했다. 그런 때는 그가 더욱 그리웠다.
- 그를 조금 아는 사람 류시화
그는 가난하면서 오지게 오지랖만 넓은 목사였다. 월간 ‘참꽃 피는 마을’ 발간(1995), 풍물교실 ‘참꽃마을’ 개설(1996), 광주에 ‘작은 연못 교회’ 창립(1997), 비전향장기수 송환추진운동 전개(1997)… 무등산 보호 환경음악회 ‘풍경소리’ 증심사와 공동진행(2002) 등등등 통일마당으로, 환경운동으로, 유기농으로, 예술문화마당으로, 절마당으로 안 끼는 데가 없었다. 기여 작은 시골교회에는 참꽃이 피기 시작했고, 그 아름다움으로 1998년 독일의 슈피겔지가 이곳을 ‘아름다운 교회’로 선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딱 10년 만에 마침내, 겨우 안식을 얻었다.
#2 여행자의 노래 |
그는 보헤미안이었다. 집시였다. ‘떠돌이별’이었다. 지구의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말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친구가 많은 사람’인 덕분이라고 하지만, 이 땅을 벗어났을 때 그는 ‘국제 노숙자’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그 에트랑제를 모아 2003년부터 컴필레이션 음반 ‘여행자의 노래’를 내기 시작해 이제껏 4집에 이르고 있다. 1집에는 혼자 떠나는 여행길 동무가 되어준 노래 ‘Ohio’, 가슴에 품은 달빛 같은 노래 ‘La Luna’, 물거품이 된 날 고개를 떨구며 듣는 ‘Caruso’ 등이 수록되었고, 포크록 가수 김두수가 부른 ‘Danny Boy’에다 아예 자신이 직접 부른 ‘Wayfaring Stranger’를 삽입하기도 했다.
나는 지금 스페인으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영화 ‘그녀에게’의 베니그로를 만나러 가는 길. 바보는 식물인간이 된 아가씨를 사랑하다 죽은 베니그로뿐만은 아니리라. 세기의 바보 돈키호테는 어떠한가. 돈키호테의 고향 카스티야라만치, 그곳의 풍차를 바람과 함께 돌리다보면 나도 어느새 바보 같은 사랑에 빠지고 말았으리.
그는 내친 김에 의형제이자 ‘자유혼’의 신화적 가수 김두수의 부추김을 받아 ‘가수의 길’로 나섰다. 2004년 첫 노래모음집 ‘하얀 새’를 낸 데 이어 2006년에는 명실상부한 자작곡 위주의 독집 음반 ‘집시의 혀’를 내놓았다. ‘집시의 혀’는 일본의 정상급 만돌린 주자이며 기타리스트인 야노 토시히로와, 한국과 일본의 평화디딤돌이며 실험성 짙은 ‘접목음악’을 추구하는 록그룹 ‘곱창전골’의 리더 사토 유키에, 그리고 펀펀한 포크록 마당에서 새뚝 솟아오른 신인 여성 포키 수니, 그밖의 여러 집시족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작업에 참여했다. 그의 노래는 그의 표현을 빌자면 ‘한국에서는 홀대를, 일본에서는 인정을’ 받는다. 어차피 우리가 그의 노래에서 상업적 프로페셔널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저 ‘한 예술가의 음악적 퍼포먼스’ 정도로 이해하면 될 일이다.
그의 질펀함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독특한 핸드페인팅으로 화가의 반열에까지 오르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무당벌레를 즐겨 그리는 그는 얼마 전에는 사진작가 김홍희, 목판화가 류연복, 시인 박남준, 서양화가 한희원과 함께 ‘우리 시대 전방위 다종예술가 5인의 오락가락전(五樂街樂展)’을 열기도 했다.
오五Oh! 다섯이어서 즐겁고五樂, 길에서 만나니 더더욱 즐거워라街樂!
#3 회선재의 선무당 |
그는 여전히 바쁘다. ‘오락가락전’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두수의 다섯 번째 음반 ‘열흘 나비’ 발매 기념 콘서트의 연출을 맡아 의기로 헤집고 다녔고, 홍대 앞 ‘요기가갤러리’에서 열린 불가사의한 음악회 ‘불가사리’에 전격 출연해 자신의 곡 ‘체 게바라’를 연주하는 아방가르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이제 목사도 환경운동가도 시인도 수필가도 동화작가도 가수도 화가도 아니다. 더구나 혁명가도 아니다. 그냥 ‘노는 사람’이다. ‘노는 임씨’다. ‘어깨춤’이다. 그에게서 ‘노는 것’은 ‘싸우는 것’이다. 가장 평화적으로 싸우는 것이다. 게다가 그의 전위적인 ‘짓거리’들은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억눌림’을 대리해 풀어주는 해방구기도 하다.
그는 목사직에서 해배되고 난 후 담양의 수북에 칩거를 마련했다. 집 이름은 ‘회선재(回仙齋)’고 당호는 ‘선무당(仙舞堂)’이다. 원래 알고 지내던 스님이 절터로 마련해둔 곳으로, 홀연 미국으로 떠나면서 그에게 맡겨두었다. 남향으로, 서재에 앉으면 무등산의 산그늘이 아련하다. 수많은 책 하며 2만 장이 넘는 CD 하며 온갖 잡동사니로 그야말로 무당집이다. 세상에서 돌아오면, 그는 이곳에서 티베트 발바리 ‘추’와 검정 차우차우 개 ‘마오쩌순’과 함께 ‘중보다 더 중같이’ 산다. 아니다. 가끔은 이웃들과 스스럼없이 ‘임씨’로 어울리고, 간혹 읍내의 관방제 앞 할매국수집에 들러 자신의 안부를 전해주고, 삶은 계란을 먹으며 ‘삶은 계란’이라고 깨닫기도 한다. 경향신문에 짧은 글과 그림을 곁들인 ‘시골편지’를 써서 ‘사람’ 소식을 전하기도 한다.
나도 ‘잡’하기로 하면 어지간히 빠지지 않는 축에 들지만, 그 앞에서는 감히 명함을 내밀지 못한다. 아무래도 그의 ‘빽’에 하나님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그가 ‘이제는 돌아와’ 회선재에서 선경을 누렸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그는 결코 사람 잡는 선무당이 아니고, 사람을 살리는 선무당이고, 그의 모든 ‘짓’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사람’으로서 ‘삶을 그리워하는 삶’으로서 자유분방임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이제는 그가 그토록 소망하는 따뜻한 시 한 편이거나, 적어도 가끔은 스스로를 위무하는 그런 ‘마중물’로 고여 있을 때도 있었으면 하는 주제 넘는 바람 때문이다. 그는 임의진이다(www.sunmoodang.com).
글·사진|유성문<객원기자> rotack@lyco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