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과 탯줄’-아기할매 일신조산원 서란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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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문의 길]‘배꼽과 탯줄’-아기할매 일신조산원 서란희 원장

반평생 넘게 아기 맞는 일을 하다 보니 아기할매의 손을 빌려 세상에 태어난 아기가 어느덧 2만 명이 넘었습니다. 이 아기들은 자연분만을 할 수 있다는 엄마의 의지로, 먹는 것 하나까지 아기를 위하는 노력과 정성으로, 거기에 힘을 더하는 주변의 격려와 도움으로 어떠한 의료적 처치 없이 자연 그대로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옛말에 “밭에서 일하다가 애를 낳았다”고 하지요. 과장된 면이 있지만, 그만큼 출산은 어렵고 괴로운 ‘숙제’가 아니라 사람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밟아가는 삶의 과정입니다. 극복해야 할 ‘질병’이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선사한 축복이며 선물이지요.

아기할매를 찾는 임산부들은 하나같이 처음에는 불안해하고 초조해합니다. 아기를 낳을 때 너무 아프면 어떻게 하나, 아기는 건강할까, 태교는 어떻게 해야 하나, 임신 기간은 잘 보낼 수 있을까…. 아기할매는 그런 임산부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그녀들은 아기를 잉태하여 세상에 내보내는 힘이 이미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 서란희 ‘자연 그대로 아기 낳는 법’ 중에서

[유성문의 길]‘배꼽과 탯줄’-아기할매 일신조산원 서란희 원장

세상에 태어나서,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지켜보는 것처럼 설레고 감동스러운 것은 없다. 그것은 출발이며, 새로운 시작이며, 영원한 희망이다. 그렇게 새 생명을 낳는 모태야 이를 바도 없지만, 탄생을 돕는 산파의 손길 또한 새로운 삶을 낳는 사랑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태어난 생명이 또 다른 사랑을 하고, 또 다른 삶을 낳고, 또 다른 삶을 돕고, 도우며 사랑하며 살아가는 세상, 그것이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다.

아기할매 서란희씨(59). 그이는 마치 오롯이 ‘산파역’을 위해서 세상에 태어나기라도 한 듯하다. 조산원 일을 시작한 지 어느덧 36년, 그이의 손으로 맞이한 아기만도 2만 명이 훨씬 넘는다. 큰 놈 작은 놈, 잘난 놈 못난 놈, 제각기 태생이야 다 다를 수 있지만 생명의 소중함만은 결코 다를 수 없다. 그래서 그이는 신령님이나 삼신할미처럼 없는 아이를 점지해줄 수는 없지만 나오려는 아이는 잘도 받아준다.

[유성문의 길]‘배꼽과 탯줄’-아기할매 일신조산원 서란희 원장

그이의 ‘산파’ 내력은 선대부터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이의 아버지는 부산지역에서 ‘잘 나가는’ 한의사였다. ‘신침(神鍼)’이라는 소문이 나 인근은 물론 멀리 서울의 권력자들까지 침을 맞으러 올 정도였다고 한다. 큰돈을 벌 수도 있었지만, 워낙 돈 욕심이 없는지라 있는 자에게는 듬뿍 받았지만 없는 이에게는 한 푼도 받지 않았다. 행려환자나 불치병자를 집 안으로 불러들이고, 게다가 당신은 한량기가 있어 밖으로 나돌기 일쑤였다. 그러나 큰딸인 그이에 대한 사랑만은 남달라서 꼭꼭 싸매 키우다시피 했다.

그이는 아버지에게서 두 번의 생명을 얻었다. 세상의 빛을 보게 해준 것은 물론, 어린시절 큰 병에 걸려 거의 죽다시피 한 것을 심혈을 기울여 구완해냈다. 그러나 딸에 대한 사랑이 너무 과했던 것일까. 명문 부산여고를 나와 서울대 불문과를 꿈꾸던 그이를 ‘외지로 내보냈다간 딸년 다 망친다’는 이유로 가로막았다. 그이는 할 수 없이 문학도의 꿈을 접고 부산대 간호대로 진로를 바꿨다. 그것은 당시 ‘서독 파견 바람’을 타고 독일이라도 가서 어떻게든 꿈을 이루겠다는 심산 때문이었다. 졸업 후 잠시 직장생활을 거쳐 일신기독병원에서 조산사 자격증을 땄다.

하지만 그 역시 낌새를 눈치 챈 아버지 때문에 일찍이 무산되었다. 외지에도 내보내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외국이 가당키나 한 일이겠는가. 아버지는 ‘인물은 없지만 머리 하나만은 똑똑한’ 딸애를 얼른 시집보내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라 생각하고, 진주 출신의 집안 좋고 머리 좋은 신랑감을 골라 맺어주었다. 나중에 공학박사가 된 남편을 따라 서울로 올라온 그이는 답십리에 자리를 잡았다. 제법 넉넉했던 시댁에서는 공부하는 남편을 위해 세라도 치고 살라며 널찍한 이층집을 마련해주었다. 그 집이 바로 현재의 일신조산원이다.

당시 답십리는 서울의 변두리들이 다 그랬던 것처럼 미나리꽝 투성인, 시골이나 진배없는 곳이었다. 가난한 집안의 아낙들은 병원은 커녕 산파조차 없는 판잣집에서 애를 낳았고, 심지어 일을 하러 가다가 길바닥에서 애를 낳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부터 그이는 어려운 처지의 산모들을 집으로 끌어들였고, 그이의 집은 자연스레 저소득층을 위한 무료조산원 역할을 했다. 그러나 주변의 조산원과 병원 들의 계속되는 고발 으름장에 덜컥 겁이 난 그이는 마침내 ‘일신조산원’ 간판을 내걸고 자의 반 타의 반 정식 조산원의 길로 나섰다.

[유성문의 길]‘배꼽과 탯줄’-아기할매 일신조산원 서란희 원장

정작 그이는 병원에서 첫아이를 낳았다. 지독한 난산이었기 때문이다. 거의 죽다시피 피투성이가 되어 아이를 낳으면서 그이는 산모의 고통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그 일은 어릴 적 죽음을 경험한 것과 함께, 그이로 하여금 조산원의 일을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탄생’과 ‘생명’에 대한 그이의 생각은 이외로 간단하다. 그냥 ‘살아 숨쉬는 것’이다. 기껏해야 ‘라이프’ 정도가 그이의 입에서 나오는 대답의 전부다. 하지만 그 속에는 어떤 미사여구보다 더 절절한 절실함이 숨어 있다. 조산사로서 그이의 최대 목표가 단지 ‘산모를 안 아프게, 편하게’인 것처럼.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의 제왕절개율을 자랑(?)하는 것은 조산원의 감소와 맞닿아 있다. 몇 년 전에 우리나라를 방문한 프랑스의 인권분만 전문가 미셀 오당 박사는 “제왕절개율이 높은 나라일수록 어김없이 의사에 비해 조산사의 비율이 낮게 나타난다. 한국에 제왕절개율이 높은 이유는 조산사가 부족해지면서 의료진의 개입이 많아지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1971년 그이가 처음 조산원의 문을 열 때만 해도 700여 곳에 달하던 서울의 조산원은 줄고 줄어 이제 제대로 된 조산원은 불과 몇 곳 되지 않는다.

의학의 발달과 함께 상대적으로 출산 사고의 위험이 높고 시설이 열악한 조산원이 감소하는 것은 불가피한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태아감별이나 임신중절 등 태아의 인권에 반하는 행위들이 판을 치고 있고, 세계 최저의 출산율에다 생명경시풍조가 만연하는 현실이, 분만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산파역의 상실과도 결코 무관치 않다는 데 있다. 아무리 경제가 성장하고 개인의 생활이 향상된다 한들 생명의 가치가 얕보이고 탄생의 의미가 바랜다면, 어디에 희망과 꿈을 둘 것인가.

그이의 조산원을 찾던 날, 한 젊은 부부가 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범한 회사원 이정환씨(30)와 경찰공무원인 김성은씨(32) 부부였는데, 그들은 결혼 1년차 신혼부부였고 첫아이였다. 초음파 조사 결과, 아이는 엉덩이를 산도(産道) 쪽으로 향하고 있는 둔위, 일종의 역아(逆兒)였다. 병원에서라면 꼼짝없이 제왕절개수술을 권유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조산원에서 자연분만하기로 결심했다. 아이가 처음 세상으로 나오는 문을 칼로 열어젖힐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07년 12월 19일 오후 7시 15분, 오랜 산통 끝에 아이는 아이할매의 손에 이끌려 처음 세상의 빛을 보았다. 체중 2.76㎏, 신장 48㎝의 건강한 여아였다. 워낙 건강 체질인 산모는 금새 정신을 차려 아이를 찾았고, 아빠는 아이의 탯줄을 자르며 감격해했다. 그렇게 아이의 탯줄은 끊겼고, 이제 세상을 스스로 감내해야 할 배꼽으로 남았다. 아빠는 갈수록 사회의 일원으로서 제자리를 찾기 어려워지는 세상에, 그래도 제몫을 다하는 아이가 되기를 바랐다. 아이의 할아버지가 바꿀 테지만 ‘푸름’이라는 이름도 미리 준비해두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아이에게 동생 둘쯤은 더 만들어줄 작정이었다. 조산원 밖으로는 마침 그날이 생일이자 결혼기념일인 대선 후보의 압승을 알리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아이는 과연 어떻게 자라날 것인가.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큰일을 이루시거나 크게 잘못된 일을 바로잡고자 하실 때 매우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신다. 그 분은 지진을 일으키시거나 번개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아기가 평범한 가정의 잘 알려지지 않은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나게 하신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그 어머니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불어넣으시고, 기다리신다. 세상의 가장 큰 힘은 지진도 번개도 전쟁도 아니다. 세상의 가장 큰 힘은 아기들이다. - E T 설리번

아무리 힘들다 하여도 때는 바야흐로 새해다.

글·사진|유성문<객원기자> rotack@lycos.co.kr



일신조산원(02-2244-2841)은 자연분만, 모유수유 권장, 친철함 등으로 유니세프가 뽑은 ‘아기에게 친근한 병원’에 선정되었다. 30년이 넘게 아이를 받아오면서 ‘아기할매’로 불리는 서란희 원장은 대한조산사협회 회장을 맡기도 했고, 그간의 경험을 모아 ‘자연 그대로 아기 낳는 법’이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분만의 주체는 의사나 조산사가 아닌 임산부와 아기라고 강조하는 서 원장은 아이를 받을 때마다 출산 사진과 함께 탄생을 축하하는 시를 직접 지어 조산원 홈페이지 ‘배꼽과 탯줄’(www.becob.co.kr)에 올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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