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는 왜 저주의 대상이 됐을까?

파스칼 키냐르 지음·송의경 옮김·문학과 지성사·1만 원
섹스는 대부분 사람의 관심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섹스 이야기만 나오면 사람들은 꽤 고상한 척하며 쉬쉬한다. 노골적으로 섹스를 이야기하면 저속하고 음란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섹스와 관련된 것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한다. 은밀하게 숨어서 혼자 보거나 정면이 아닌 곁눈질로 힐끔거리기 일쑤이다. 심지어 실제 섹스 행위에 하는 것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갖는 사람이 있다.
프랑스의 작가 파스칼 키냐르의 ‘섹스와 공포’는 섹스가 변질된 이유의 뿌리를 찾고 진정한 쾌락의 의미를 캐묻는 책이다. 이 책은 로마시대의 에로티시즘을 그 당시의 회화에 근거해 분석해냄으로써 그리스인들이 떳떳하게,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던 섹스가 왜 갑자기 저주와 공포의 대상이 되었는지 밝힌다.
키냐르는 ‘성에 관한 진지한 탐구서’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게 한 결정적인 계기는 “1980년대 말 에이즈로 상징되는 섹스에 대한 공포였다”고 밝혔다. 거의 모든 사람이 섹스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키냐르는 이같은 사람들의 태도는 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공포로 변질된 성을 복권”(사람들의 왜곡된 시선과 잘못된 태도를 바로잡는 것)시켜야 한다고 여겼다. 그 생각에서 잉태된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키냐르는 섹스, 즉 성이 공포와 저주로 전락한 때는 고대 로마 시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제국의 형태로 로마를 재정비하던 시기(BC 18년~AD 14년)라고 규정한다. 로마에서 베드로와 사도 바울의 힘으로 그리스도교의 교세가 확장한 시기는 네로황제 재임시절(41~54년)이다. 그러므로 키냐르의 규정은 그리스도교로 인해 성이 죄악시되고 부끄러운 것이 되었다는 일반인들의 생각을 뒤집는 셈이다. 키냐르는 성을 억압하는 청교도주의는 그리스도교가 본격적으로 교세를 확장하기 시작한 것보다 전의 로마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키냐르는 공포와 저주로 변질된 성의 역사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를 서양 문화의 큰 분기점으로 보고 그때의 성, 청교도적인 삶을 탐구한다. 키냐르는 그리스 시대와 달리 폼페이의 에로틱한 벽화들의 인물들이 수줍어하고 심각하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 대상을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하고 흘깃거리는 그들의 시선에는 공포가 서려 있었던 것이다. 강한 남성성을 강조하던 로마시대에는 섹스에 관해 점잖은 언어를 사용하면 남성성이 약화된다고 믿어기 때문에 오히려 노골적이고 심지어 상스러울 정도로 지나치게 과감히 사용했는데 왜 회화에 표현된 것은 정반대일까. 어떤 이유로 “의례적으로 외설적인 언어를 쓰지만 일단 토가를 입으면 키케로처럼 점잖게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문란하고 직접적인 성의식은 좋지 않는 태도라고 가르쳤던 그리스도교가 채 전파되기 전인데도 말이다.
여기에 의문을 품은 키냐르가 로마시대의 성을 연구한 끝에 내린 결론은 “청교도적인 것이 바로 쾌락”이라는 것이다. 이 미스터리를 파헤치기 위해 키냐르는 이 책을 썼다고 고백한다. 성의 세계에 관한 로마인들의 여덟 가지 고유한 인식의 특성을 고찰한 키냐르는 ‘공포’라는 매개를 통해 로마인들의 특성을 하나씩 밝혀낸다.
로마시대의 미술, 문학, 사상을 넘나들며 당대의 성의식을 철학적으로 고찰한 이 책은 키냐르가 “꼭 쓰고 싶었던 책”이라고 한다. 어느 문장 하나 버릴 것이 없다. 하지만 읽는 데 그리 수월하지는 않다.
<임형도 기자 lhd@kyunghyang.com>
자유의 종을 난타하라
우리에게도 명문은 얼마든지 있다
![[BOOK]섹스와 공포 & 자유의 종을 난타하라](https://img.khan.co.kr/newsmaker/714/book2.jpg)
명문(名文)이 아쉬운 시대다. 신문과 잡지를 비롯해 각종 출판물을 무수히 접하지만 명문을 접하기가 예전보다 대단히 어렵다. 문자 메시지와 채팅 언어가 난무하는 요즘 세태의 영향도 크겠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의 역사·현실인식이 점점 희박해지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명문을 접했을 때 느끼는 감동과 카타르시스는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다. 비록 글을 읽는 시간은 짧지만 가슴속 울림은 평생을 갈 수도 있다. 일반인에게도 명문은 진한 빛깔이겠지만 특히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에게 명문은 더할 수 없이 중요하다. 더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릴 때, 좋은 글에 대한 갈증에 시달릴 때 명문은 좋은 길라잡이가 된다.
경향신문의 두 논설위원이 명문·연설문을 정리해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갖은 소음과 공해의 언어들에 휘둘릴수록 혼미해진 정신을 흔연히 씻어주는 문(文)의 세례를 구하는 마음”이 발단이 돼 이 책을 출간하기까지 이른 것이다. 일종의 ‘명문, 연설문 모음집’ 셈인 이 책은 명구·명언·명문을 간추려 매듭지은 다른 모음집과 구별되는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이 책은 동학혁명에서 제2공화국까지, 그러니까 1894년부터 1960년까지 우리 역사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글, 오로지 우리의 글만 모아놓은 것이다. 이는 저자들의 출간 의도와 맞닿는다. ‘왜 외국 것만 달달 외느냐, 우리에게도 명문은 얼마든지 있다’는 자신감인 셈이다.
저자들이 말하는 명문이란 글쓴이의 혼이 담겨 있으며 시대정신이 녹아 있는 글이다. 따라서 온갖 미사여구와 아름다운 언어로 채색된 미문(美文)만으로는 명문이라고 할 수 없다.
저자들이 추려낸 명문에는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안중근 의사의 ‘법정 최후 진술’, 최남선·한용운의 ‘기미독립선언문’, 도산 안창호의 ‘동포에게 고하는 글’, 조봉암의 ‘진보당 창당 선언문’, 그리고 책 제목이기도 한 서울대 문리대의 4·19혁명선언문인 ‘자유의 종을 난타하라’ 등이 있다. 뿐만 아니라 박헌영의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 김일성의 ‘모든 힘을 새 민주조선 건설을 위하여’도 포함돼 좌우 이념을 아우른다.
명문·연설문 하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이나 링컨 대통령의 ‘게티즈버그 연설문’ 등 대개 외국의 것을 먼저 떠올리던 우리, 하지만 이 책을 접한다면 우리에게도 길이 빛날 명문이 수두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의 명문에서 큰 울림을 느낀다면 저자들은 흡족해할 것이다. |손동우·양권모 지음쪾들녘쪾1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