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상 반대’ 이야기만 꺼내도 기생충·반역자 취급
이스라엘은 전쟁 망명한 우크라이나인까지 징집
튀르키예선 기본권 박탈도…“국제적 연대 필요”
전쟁에 반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와 평화운동은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다. 살상과 폭력을 거부하고 나아가 억압적인 군사주의 해체를 지향한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이들 국가에서도 평화운동이 펼쳐지고 있어 주목된다.
세계의 평화활동가들이 지난 11월 29일 전쟁없는세상과 참여연대 등이 주최한 국제콘퍼런스에 참석해 자국의 군사주의 실상을 비판하며, 전쟁 중단을 위한 국제적인 지지를 호소했다. 또 해외 양심적 병역거부자와 국제적인 지원단체 활동가 등도 자리해 병역거부의 의미를 짚으며 연대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이번 콘퍼런스에는 40개국의 90개 이상 단체로 구성된 평화주의·반군사주의 네트워크인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WRI)’,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권리 옹호 활동을 하는 국제단체인 커넥션이브이(Connection e.V) 등도 함께했다.
■군모를 쓰고 있는 태아
이스라엘인 오르는 반군사주의 평화운동 단체인 ‘뉴프로파일’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 단체는 병역거부 상담을 지원하고 정부의 무기 수출 활동 등을 감시한다. 이스라엘은 여성도 징집한다. 오르는 15년 전 병역을 거부했다.
이날 콘퍼런스에 참석한 오르는 “이스라엘은 전역이 군사화돼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모든 시민이 ‘나는 군인이 될 것’이라는 명제를 당연히 받아들이도록 교육한다며 “학교, 미디어 등을 총동원한 세뇌교육이 이뤄진다”라고 말했다. 오르는 군복을 입은 사람이 어린이들 앞에서 무언가를 설명하는 사진을 제시하며 “심지어 유치원생을 상대로도 병역을 거부하면 구직이 어렵고 연금도 받을 수 없다는 식으로 교육한다”고 말했다. 또 한 아이가 기관총을 조준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초등학생들이 직업 엑스포 같은 곳에 가서 군인이 되는 미래를 꿈꾸도록 한다. 학교 교실에서도 총을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오르는 이날 태아가 군모를 쓴 채 거수경례를 하는 모습의 광고 포스터도 화면에 띄웠다. ‘임신중지를 할 때마다 군인 한명이 죽는 것’이라는 문구가 담긴 임신중지 반대 광고도 존재한다고 오르는 전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기생충 같은 사람’으로 낙인찍힌다고 했다. 그는 “병역거부 이후 관계가 끊어진 친구들도 있고, 가족 중에서도 나와 지금까지 말을 섞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군대에 부정적인 견해를 지닌 이들도 많다고 했다. 오르는 “군 내에서도 특정 행위를 거부하는 군인들이 있다”라며 “예를 들어 전쟁이 발발했을 때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나 서안지구에서는 복무하지 않겠다거나, 공습은 하지 않겠다는 등 선택적으로 군사행위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우익 성향의 사람들도 가자지구에 보내면 거부하겠다는 등 병역을 거부하고 있다”라며 “이들 또한 뉴프로파일은 지원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자국민뿐 아니라 거주권을 가진 모든 사람을 징집 대상으로 삼는다고 오르는 말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이스라엘로 망명한 우크라이나인들도 군대에 가야 하는 실정이라고 했다. 오르는 “죽음을 피해 이스라엘로 피란을 와서 난민으로 인정받아 거주권을 받았지만, 몇 달 뒤 군대에 끌려간다”라며 “입대를 거부하면 추방될지 몰라서, 언어도 통하지 않고 위계질서가 아주 강한 군대에서 어떤 지원도 못 받고 복무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는 비공식적으로 확보한 통계에 따르면 이런 사례는 약 1000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오르는 이스라엘 내에서 ‘평화’를 말하면 상당한 위협이 뒤따른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소셜미디어(SNS)에 전쟁 반대 메시지를 적어도 추적을 당한다”라며 “전쟁이 싫으면 가자지구에 들어가서 같이 죽으라는 식의 욕을 듣기도 한다”고 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이러한 군사주의를 바탕으로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오르는 봤다. “한쪽에서 민간인을 죽이면 다른 쪽에서 분노를 느껴 폭력으로 복수하게 된다. 복수는 꼬리의 꼬리를 문다. 양측 간 증오와 분노가 고통을 야기하고 있다. 폭력은 악순환만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해야 고리를 끊어낼 수 있다. 사회의 군사화를 중단해야 폭력을 멈출 수 있다.”
■“국제적인 연대 필요”
러시아에서도 전쟁에 반대하는 활동이 이뤄지고 있다. 이날 콘퍼런스에는 러시아 내 평화단체인 ‘양심적 병역거부를 위한 운동(MCO)’에서 활동하는 타라스와 나탈리아가 참석해 자국 상황을 전했다. 타라스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SNS 구독자 숫자가 대폭 증가했고, 특히 2022년 9월 부분 동원령이 내려진 이후 더 늘어났다고 밝혔다. 타라스는 “러시아에서 살상을 거부하는 발언을 하는 것도 불법”이라고 말했다. “군을 지지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반역자가 된다”라며 “나도 지금 반역자”라고 부연했다.
나탈리아는 러시아에서 대체복무 기회를 얻지 못하고 살상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고통을 겪는 이들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매우 폐쇄적이기 때문에 이런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또 재판이 군사법원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언론의 취재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러시아 내 활동가 개인은 물론 가족들도 위협에 처해 있다”고 토로했다.
타라스와 나탈리아는 한목소리로 국제사회의 관심과 연대를 요청했다. 이들은 “우리는 국제무대에서 국내 평화수감자에 대한 인식 제고를 위해 더 노력할 것”이라며 “병역거부의 진정한 의미를 널리 확산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우크라이나에서 평화운동을 진행하다가 가택 연금 중인 유리 셸리아젠코도 이날 화상으로 참여했다. 유리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과 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보냈다가 기소됐다”라며 “나는 분명히 러시아 침략 전쟁을 규탄한다고 했는데, 외려 침략 전쟁을 정당화한다는 터무니없는 혐의를 씌워 탄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어떤 형태의 전쟁 수행도 거부하며 평화적 수단으로 저항한다”라며 “누구든 살상을 거부할 권리가 있고, 모두가 그러면 세계에서 전쟁을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군사화된 정치·문화·경제는 전쟁을 낳는다. 모든 걸 동원해 피부에 와닿는 평화의 방식을 퍼뜨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 각종 권리 박탈
해외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도 참석해 목소리를 냈다. 태국의 네티윗 초티팟파이살은 2014년 9월 태국 최초로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태국에선 1932년 이후 ‘성공한 쿠데타’만 13차례 발생했다. 네티윗은 “군부가 사회적 담론을 지배하는 시기가 굉장히 많았기 때문에 폭력이 일상화돼 있다”라며 “이런 사회적 상황을 거부하고 비판하기 위해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는 징병제를 운용하는 태국의 군 내에서 학대로 사망하는 등 인권침해를 당하는 사례가 굉장히 많다고 했다. 군은 급여도 낮고 부정부패도 만연하다고 네티윗은 말했다.
이런 입대는 ‘운’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 태국은 21세가 되면 추첨을 실시한다. 빨간색을 뽑으면 2년 동안 군 복무를 해야 하고, 검은색을 뽑으면 면제된다. 네티윗은 “제비뽑기 전에 사원에 가서 검은색을 뽑게 해 달라고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도 있다”라고 전했다. 학생 시절에 1주일에 하루, 3년 동안 훈련을 받으면 군 복무를 면제받을 수 있으나 이는 특권층만 가능하다고 했다.
네티윗은 병역거부 이후 매년 입영통지서를 받고 있다고 한다. 내년에도 통지서가 오면 불응하며 공개적으로 시위를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군부가 집권하는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는 불복종하고 거부해야 한다”라며 “변화의 희망을 더욱 열어나가기 위해, 희망의 불씨를 지펴나가기 위해 이런 행동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튀르키예 병역거부자들이 각종 기본권을 박탈당하는 실태도 발표됐다. 메르베 아르쿤은 튀르키예 ‘양심적 병역거부 감시단(COW)’ 활동가이면서 여성 병역거부자다. 여성은 병역 의무가 없지만, 단순히 군대에 가지 않겠다는 의미를 넘어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여성운동의 맥락에서 뿌리 깊은 군사주의에 저항한다는 취지다. 튀르키예에서는 2004년 첫 여성 병역거부자들이 등장했다.
튀르키예 내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1989~2022년 약 600명으로 추정된다. 실제 거부자 수는 훨씬 많은 것으로 보인다고 메르베는 말했다. 그러나 튀르키예는 유럽평의회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체복무제도가 없는 것이다.
메르베는 병역거부자들은 여러 사회·경제·정치적 권리를 침해받고 있다며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우선 행정적으로 벌금 처분을 받고, 형사기소도 당한다. 메르베는 “불이익이 한 번에 끝나는 게 아니고, 이후에 정기적인 신원 확인을 진행할 때마다 다시 벌금을 받고 형사기소가 반복된다”고 말했다.
또 선거 참여와 고등교육 이수가 제한될 수 있다. 공공은 물론 민간 부문에서도 일할 수 없다. 메르베는 “병역거부자를 고용한 사람도 기소된다”라며 “이에 따라 거부자들은 비공식적으로 일할 수밖에 없어서 사회보장제도에 가입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동의 자유도 제약을 받는다고 한다. 그는 “병역거부는 당사자 한 사람을 처벌하는 게 아니라 그의 가족 전체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라고 했다.
메르베는 이처럼 병역거부자가 겪는 권리 침해가 증가하면서, 망명 문의도 늘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해외로 출국하는 것을 고려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 수가 지난 몇 년 사이 크게 증가했다”라며 “출국이나 망명 신청에 대한 정보를 구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고 했다. 메르베는 “우리는 양심적 병역거부권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고 튀르키예의 상황을 지역 및 국제 인권단체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