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된 총학생회장 조직폭력배, 복수와 맞바꾼 ‘캠퍼스의 꿈’
![[사회]학칙보다 조직강령이 먼저였다](https://img.khan.co.kr/nm/ContentsObject/8/8084_1_c5-1.jpg)
“지난해 1학기에는 수업 한 번 안 빠졌던 성실한 학생입니다. 졸업하면 4년제 대학으로 편입하겠다며 진지하게 진로를 고민하던 그가 거대 폭력조직의 행동대장이었다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신문과 방송을 통해 같은 학과 학생이 폭력조직의 행동대장급 조직원이었다는 사실을 접한 동료 학생들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되뇌었다. 문제의 ‘학생 조폭’은 지방 소재 모 국립대학에 재학중인 임모씨(32). 게다가 이번에 상대 조직원에 대한 집단 칼부림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된 임씨는 이 대학 총학생회장을 맡고 있어 학교측의 충격은 더했다.
2003년 12월 5일 서울 잠실 경륜장 주변. 전북에서 올라온 ‘정읍파’ 조직원인 유모씨와 이리배차장파 조직원 천모씨 사이에 말싸움이 벌어졌다.
경찰에 따르면 경륜장이나 경마장 주변은 조폭들이 심심찮게 충돌하는 곳이다. 경기결과 예상지 판매수익도 꽤 쏠쏠한데다 10만원권이나 100만원권 수표를 현금으로 교환해주면서 챙기는 수수료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은행이 영업을 하지 않는 휴일일 경우 베팅에 목마른 팬들로서는 조폭들이 마음대로 정한 3%의 현금교환 수수료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평소 알고 지내던 유씨와 천씨의 말다툼도 이러한 ‘이권다툼’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수사관계자의 관측이다. 말다툼에서 비롯된 조직간의 충돌은 결국 유씨가 천씨에게 흉기를 휘두르고서야 일단락 됐다.
누구보다도 성실한 학교생할
학교에서 이 소식을 접한 임씨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대학 입학과 함께 미래 설계를 새롭게 시작한 임씨는 학교생활에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같은 과 선배에 따르면 2003년 1학기에 그는 단 한 차례의 지각도 없을 정도로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해왔다. 같은해 9월에는 총학생회장 선거에 단독으로 출마해 68%의 지지를 얻으며 당선의 영광을 얻었다. 임씨에 대한 같은 과 선배의 증언.
“임씨는 ‘고등학교를 제대로 나오지 못한 탓에 강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지만 이렇게 강의실에 앉아 있는 한 시간 한 시간이 내게는 너무나 소중하다’라며 학업에 대한 의지를 내비쳐왔다. 지난해 9월에는 희귀병에 걸린 학생을 위해 일일호프를 직접 운영해서 수익금 전액을 후원금으로 전달할 정도로 마음 씀씀이도 넓었다.”
학업성적도 항상 중간 이상이었다. 특히 입학 첫해인 지난해 1학기에는 4.5점 만점에 3.98점의 학점을 기록하며 35명 가운데 5위에 오르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학업에 빠져들던 임씨였지만 그에게는 학업에 대한 욕심 못지 않게, 아니 어쩌면 그보다 앞서 ‘조직원이 다른 조직에 당할 경우 가해자의 윗선에게 보복을 가한다’라는 조직의 행동강령이 앞을 가렸다.
고교 1년을 중퇴한 뒤부터 배차장파에 몸을 담아왔고 학교가 배차장파의 주요 관할영역에 자리잡고 있던 터라 교문만 나서면 선·후배 조직원들과 항상 마주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경륜장에서 유씨에게 칼부림을 당한 천씨는 임씨의 친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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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굴레 벗어나기 어렵다” 입증
임씨는 잠시 학업을 뒤로 한 채 복수에 나섰다. 린치 대상으로는 정읍파 부두목인 홍모씨(36)를 지목했다. 범행 대상이 정해지자 임씨는 며칠 동안 피해자의 움직임을 파악한 뒤 후배 조직원 12명을 동원해 서울로 상경했다.
같은 해 12월 18일을 디데이로 정한 임씨는 후배들을 여러 개 조로 나누어 홍씨의 오피스텔 각 층과 골목길 등 요소요소에 배치해 도주를 차단하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다. 피해자 홍씨는 이런 배차장파의 테러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범행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했지만 통화내역 등을 근거로 수사망을 좁혀오는 검경 합수부의 추적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임씨는 지난 4월 변호사를 선임해 검찰에 자진 출두, 최근 1심 재판에서 징역 6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올해 3월 결혼식을 올린 부인과의 ‘눈물의 신혼여행’을 다녀온 직후였다.
검찰 관계자는 “예전에도 대졸 출신 조폭은 더러 있었지만 조폭으로 활동하다 뒤늦게 대학에 입학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라며 “이번 사건은 조폭이 사회 어느 분야로 진출해도 그 습성을 벗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례“라고 밝혔다.
한편 검경은 윗선의 지시가 없이는 독자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조폭의 생리상 ‘행동대장급’ 조직원 임씨에게 테러지시를 내린 상선이 있을 것으로 보고 배차장파 행동대장 ㅎ씨를 상대로 공범관계를 밝히는 데 주력했지만 뚜렷한 물증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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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배차장파
임씨가 소속돼 있던 이리 배차장파는 전북 익산을 거점으로 꾸준히 세력을 키워온 조직. 1989년 6월 서울 강남구 소재 유흥가에서 ‘서방파’ 자금책을 살해하면서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배차장파는 그동안 주먹 세계를 제패해온 이른바 ‘3대 패밀리’, 즉 양은이파와 범서방파, OB동재파가 사실상 와해된 가운데 전국적으로 세력을 확대해왔다. 때문에 전북지방경찰청에서는 배차장파를 전담으로 감시하는 전담부서까지 마련하고 있을 정도.
검경에 따르면 배차장파는 고교 중퇴자나 퇴학자들을 조직으로 끌어들인 뒤 훈련 과정을 거쳐 1~2년 뒤에 수사기관에 자수를 하도록 유도했다. 아직 미성년자인 이 때 범죄단체 가입 혐의로 가벼운 처벌을 받고 나면 이후 수사기관에 다시 검거되더라도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따라 무겁게 처벌되는 범단가입 혐의는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예방주사’를 놓는 셈.
실제로 이번에 임씨와 함께 구속된 김모씨 등 5명은 중·고등학교에서 싸움을 제일 잘하는 일명 ‘짱’으로 이름을 날리다가 퇴교조치를 당한 뒤 배차장파에 가입, 수차례 폭력사건에 동원됐지만 대부분 소년보호사건으로 처리돼 가벼운 처벌을 받았을 뿐이다.
검찰은 배차장파가 최근 경기도 안산 등 새롭게 유흥가가 조성되고 있는 서울 근교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지속적인 감시활동을 펼치겠다고 밝혔다.
최성진 기자 csj@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