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중순 서울 노원구 상계동의 한 부동산 사무소. 자신의 집에 세들어 살고 있는 김모씨(38)가 지방으로 전출을 가게 돼 새로운 세입자를 찾고 있던 윤모씨(59)는 예비 세입자가 계약을 하러 왔다는 전화를 받고 부동산 사무소를 찾았다. 그곳에 터를 잡아 수십 년 동안 생활해온 윤씨를 잘 알고 있던 부동산 중개인은 예비세입자에게 등기상 전혀 이상이 없다고 장담했지만 예비세입자는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를 원했다.
"아무것도 없다니까, 참, 왜 이리 사람을 못 믿나. 정 불안하면 한번 확인해봅시다." 부동산 업자는 컴퓨터를 통해 대법원 홈페이지에 접속, 윤씨의 등기부를 화면에 띄웠다. 자신감에 가득차 화면을 살펴보던 부동산 중개인은 놀란 얼굴로 윤씨의 얼굴을 바라봤다. 무슨 일인가 싶어 화면을 확인한 윤씨는 화들짝 놀랐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집 건물과 토지에 가압류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가압류를 신청한 사람은 며칠 전 자신을 상대로 부당이익금 반환청구소송을 제기한 이모씨였다.
![[사회]부당 가압류 '서민은 괴로워'](https://img.khan.co.kr/nm/ContentsObject/8/8008_1_c3_1.jpg)
보전처분 처리 시간 겨우 3분 걸려
7월 20일, 서울북부지방법원은 윤씨의 집을 가압류한 뒤 윤씨를 상대로 부당이득금 반환청구소송을 제기한 이씨에 대해 소를 각하(소송의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뜻)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씨가 항소를 포기해 판결은 확정됐고 윤씨는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가압류를 취소해달라는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윤씨의 건물과 토지는 여전히 가압류 상태다.
가압류-가처분 등 보전처분이 늘면서, 부당한 보전처분으로 피해를 겪고 있는 이가 늘고 있다. 보전처분이란 손해배상청구소송 등 본안소송을 제기하기 전에 상대방이 재산을 처분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로, 비밀성을 생명으로 한다. 당사자 몰래 이뤄지는 일이라 신중을 기해야 하지만 담당 재판부는 그렇지 못한 실정이다. 지난해 9월 '전국 신청담당 판사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판사 1명이 보전처분에 사용한 시간은 평균 3분이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의 판사 1명은 2003년 3월에 가압류 6,385건을 처리했다. 이를 근무일 23일로 나누면 하루에 277건을 처리한 셈이다. 처리시간을 건당 1분으로만 잡아도 4시간 37분이 걸린다. 이런 상황에 판사 1인이 보전처분 결정에 '공'을 들이기는 어렵다. 이는 일본의 판사가 1건 처리에 평균 30여 분을 사용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판사가 3분 동안 살펴보는 것은 보전처분 신청자가 작성한 서류에 불과하다. 보전처분 신청자를 '면담'하는 일본이나 가압류 대상자를 심문하는 미국과 비교하면 무척 간단하다. 부당한 보전처분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올해 4월 박모씨(83)는 대출받은 은행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담보를 조사하던 은행이 박씨의 부동산이 가압류된 사실을 발견하고, '무슨 일이냐'고 묻는 내용이었다. 영문을 알 수 없던 박씨는 가압류 신청자가 누군지 확인했는데 전혀 모르는 유모씨 등이 2003년 4월 24일자로 가압류한 것이었다.
내용을 파악해보니 다음과 같았다. 지난해 3월 이모씨로부터 서울 양천구에 있는 한 아파트를 구입한 박씨는 4월 4일 명의이전을 끝냈다. 그런데 유씨 등으로부터 가압류 신청을 받은 서울남부지방법원이 아파트가 팔린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4월 24일 가압류 결정을 내렸고, 이씨와 문제 없이 거래를 한 박씨가 부당한 가압류의 피해자가 되고 만 것이다. 박씨는 가압류 취소를 요구했으나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가압류건 당사자는 유씨 등과 이씨) 거부당했고, 등기공무원 처분에 대한 이의신청도 역시 거부당했다. 박씨는 또다른 소송을 제기하며 정신적-물질적 고통을 겪고 있다. 대법원은 지난해 9월 부당한 보전처분을 막을 대책을 논의했지만 부당한 가압류는 여전한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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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보증보험만 큰돈을 벌고 있어
하지만 부당한 보전처분으로 피해를 입은 이들에 대한 사후구제는 결코 쉽지 않다. 일단 대법원은 1995년과 1999년 '가압류 신청자가 본안소송에서 패소했다면 특별한 반증이 없는 한 채권자에게 고의 또는 과실이 있다고 추정되고, 따라서 부당한 집행으로 인한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보전처분 피해자가 손해배상을 받으려면 또다른 재판을 해야 한다. 손해액 산정을 위해서다. 하지만 '손해액'을 입증하기 곤란해 승소가 어렵고, 시간과 비용도 적지 않게 들어 손해배상청구소송을 '감행'하는 피해자는 적은 편이다.
덕택에 '보전처분 신청자로부터 부당한 보전처분으로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힐 경우, 손해배상액을 지급해준다'는 명목으로 담보금의 0.375%를 보험금으로 받고, 보증서를 발급하고 있는 서울보증보험만 큰돈을 벌고 있다. 2002년 서울보증보험은 41만8천3백20건의 보증서를 발급해 2백48억8천9백여만원을 보험료로 받았다. 그러나 보험사고건수는 불과 82건, 보험사고금액으로 지출한 돈도 31억3천8백만원(12.6%)에 불과하다.
서울보증보험 관계자는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아예 생각지도 않거나 복잡한 절차 때문에 포기하는 사람이 많아 지급건수가 적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부당한 보전처분으로 인한 손해배상문제를 주시하고 있는 나홀로소송시민연대(www.nasiyen.com)의 이철호 대표는 "경험상 가압류 10건 중 3건은 부당한 가압류였다"며 "절차가 복잡하다는 이유로 부당한 가압류로 인한 피해를 감내하는 이가 많고, 결국 서울보증보험만 돈을 벌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나홀로소송시민연대는 윤씨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시작으로, 복잡한 손해배상 절차 때문에 재판 자체를 포기한 이들을 도울 방침이다.
정재용 기자 politika95@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