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참을 忍 세 번도 '화'는 못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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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7일 오후 광주 남구 봉선동의 한 아파트. 시장기를 느낀 이모씨(54)는 무언가 먹을 것이 없는지 살폈다. 이씨는 아들의 방 안에서 아내가 만들어놓은 김밥을 발견, 그것을 먹었다. 오후 8시 30분쯤, 아들 이모군(17-고등학교 3년)이 집으로 돌아왔다. 이군은 아버지인 이씨에게 왜 자신의 김밥을 먹었느냐고 따졌다. 기가 막혔던 이씨는 "이놈아, 가족끼리 그럴 수도 있는 것이지 그런 것 가지고 뭘 그러느냐"며 "그럴거면 나가버려라"고 말했다. 이 말에 화가 치민 이군은 부엌에 있는 식칼을 들고 와, 이씨를 9차례나 찔렀다.

단순 충동으로 범행을 저지르는 사람이 흉기를 드는 경우, 대개 한 번 찌르고 만다. 하지만 이군은 식칼로 이씨를 9차례나 찔렀다. 죽일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에서 이군은 "평소에도 아버지 이씨를 죽일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이군은 반에서 성적이 5~6등 정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최근 실직한 이씨는 집에 있으면서 이군의 성적을 문제삼아 수차례 꾸짖었다. 평상시 가졌던 악감정이 '김밥' 때문에 폭발하고 만 것이다.

화나서 아이를 집어던진 부모

아버지 이씨는 아들 이군으로부터 불의의 공격을 받고 아파트 경비실로 뛰어내려가 병원으로 후송됐으나 1시간 30여 분 만에 숨졌다. 이튿날인 4월 18일 경찰에 붙들린 아들 이군은 경찰조사에서 자신의 범행을 뉘우쳤지만,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저지른 범행의 대가는 너무 컸다. 이군은 4월 19일 존속살해 혐의로 경찰에 구속됐다.

그로부터 한 달 전인 3월 3일 오후 8시쯤 인천 부평구 청천동의 한 주택. 이모씨(38-여)는 남편과 술을 한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야기의 주제는 생활비. 이씨는 남편이 가져다주는 생활비가 적다고 불평하고 있었다. 술이 몇 잔 들어가자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고, 이씨는 안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걸어잠갔다. 남편이 문을 걷어차고 안방으로 들어서자 이씨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이씨는 주변을 살펴보다 옆에서 자고 있는 아이(생후 5개월)의 다리를 양손으로 잡아 남편을 향해 던졌다. 남편과 부딪힌 아이는 땅바닥으로 떨어져 부상했다. 병원에 실려갔지만 아이는 이튿날 사망했다.

이씨는 경찰에 불려갔다. 경찰에서 이씨는 "아이를 실수로 방바닥에 떨어뜨렸다"며 범행을 부인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4월 19일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부터 부검 결과가 나왔다. 결과는 적어도 두 번 이상의 외력에 의해 머리 부분이 손상됐다는 것. 경찰은 이씨와 남편을 불러 다시 조사, 결국 이씨가 아이를 던졌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자신의 아이를 숨지게 한 이씨는 4월 20일 폭행치사 혐의로 경찰에 구속됐다.

30만원 때문에 아내가 남편의 목을 찌른 사건도 있다. 제주시 건입동에 살고 있는 강모씨(55-여)는 4월 15일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30만원의 행방을 놓고 남편과 말다툼을 벌이다, 남편 이모씨(59)의 목을 과도로 찔렀다. 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아 남편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강씨는 살인미수혐의로 구속됐다.

경찰 조사 결과 강씨는 남편 이씨가 평소 가정을 돌보지 않고 술을 많이 마시는 데다 남편의 공공근로사업 수당 45만원 가운데 30만원이 없어진 것에 불만이 폭발해 이같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강씨도 남편 이씨와 말다툼을 하다가 순간적인 화를 참지 못해 이같은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각박한 사회 탓인지 이처럼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고 있다. 대부분 사소한 이유로 순간적으로 화가 폭발해 발생한 사건이다. 이런 사건은 이웃사촌을 가리지 않는다.

경기 구리시 인창동에 살고 있는 김모씨(24)는 4월 17일 오전 9시 30분쯤 이웃 왕모씨(49)의 집 근처를 거닐고 있었다. 갑자기 왕씨가 키우고 있는 개가 짖기 시작했고 김씨는 개를 향해 "짖지 말라"며 돌을 던졌다. 왕씨가 나와서 "왜 개에게 돌을 던지냐"고 따졌고, 말다툼이 시작됐다. 김씨는 화를 참지 못하고 왕씨에게 주먹을 날렸다. 왕씨가 쓰러지자 김씨는 주변에서 큰 돌을 집어 왕씨의 머리를 친 뒤, 뾰족한 돌로 내리쳤다.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김씨는 소주병을 깬 뒤 왕씨의 목과 복부 부분을 서너 차례 찔렀다. 김씨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집으로 달려간 그는 보일러용 등유를 PET병에 담아와 왕씨에 뿌린 뒤, 라이터로 불을 붙여 왕씨의 사체를 태웠다.

김씨는 범행을 저지른 뒤 동네에 있는 파출소로 가서 "사람을 죽였으니 가봐라"고 신고해 경찰에 붙잡혔다. 김씨는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경찰 관계자에 따르면 김씨는 전혀 거리낌없이 현장재현을 했다고 한다. 김씨는 정신적인 문제로 몇 차례 신경정신과에 내원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잠재적 범죄자의 불만 치유해야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아들의 친구를 죽인 사건도 발생했다. 3월 24일 오전 7시 30분쯤 강원 춘천시 이모씨(46)의 집에 아들의 친구 하모씨(23)가 술을 먹고 찾아왔다. 하씨의 얼굴을 본 이씨는 열흘 전의 일을 떠올렸다. 당시 술에 취한 하씨는 신발을 신은 채 이씨의 아들 방으로 들어섰다. 하씨를 처음 본 이씨는 누구냐고 물었지만, 하씨는 "너야말로 누구냐"고 대꾸한 뒤 이씨의 따귀를 때리고 도망갔다. 그런 하씨가 또다시 대문을 걷어차며 행패를 부리고 있는 것을 보자 이씨는 격분했다. 이씨는 바깥으로 나가 도망가는 하씨의 차에 벽돌을 던졌다. 차에서 내린 하씨가 삽을 들고 다가오자 이씨는 집안에 들어가 식칼을 들고 나와 하씨를 찔렀다. 하씨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이밖에 짝사랑하던 여성이 다른 남자와 알몸으로 있는 것에 격분, 여성의 집에 불을 질러 짝사랑하던 여성을 죽이려고 했던 사건이나 내연녀의 집에 찾아왔다가 내연녀의 아들(9)이 짜증스럽게 대답했다는 이유로 목을 졸라 숨지게 한 사건 등도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발생한 사건이다.

이런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자 한 경찰은 "말 한마디 잘못 하면 죽을 수도 있는 세상이 돼버렸다"며 "가족간에도 경계하며 살아야 되느냐"고 말해,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표창원 경찰대 교수(범죄심리학과)는 "최근에 발생하고 있는 사건은 성적이나 돈 등 눈앞에 보이는 성공과 목표에만 열중하고 공동생활은 경시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가정에서는 성적을, 사회에서는 돈과 성공을 지나치게 강요해 개인이 감정을 다스리는 법이나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표 교수는 "이런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는 단계별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단기적으로는 심리적인 치료가 일반화돼야 한다. 외국에서 일반화돼 있는 '앵거 매니지먼트(Anger Management)'를 도입해 수많은 잠재적 범죄자의 불만을 치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교육과 가정의 정상화를 통해, '정상적인 인간'을 양성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북부 유럽처럼 천천히, 여유롭게 사는 것이 잘 사는 상태가 될 수 있도록 사회 전체적인 분위기가 변화해야 한다"고 표 교수는 지적했다.

정재용 기자 politika95@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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