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폭염···마음건강은 괜찮은가요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취약계층·독거노인, 무기력한 상태로 누워 지내…죽음에 대한 공포까지

지난 8월 5일 열화상 카메라로 바라본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무료급식소의 인근 땅바닥이 붉게 보인다. 열화상 카메라는 낮은 온도는 파랗게, 높은 온도는 붉게 나타난다. 조태형 기자

지난 8월 5일 열화상 카메라로 바라본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무료급식소의 인근 땅바닥이 붉게 보인다. 열화상 카메라는 낮은 온도는 파랗게, 높은 온도는 붉게 나타난다. 조태형 기자

지난 8월 9일 오후 1시 무렵, 서울 마포구 합정동 버스 정류장. 기온은 32도, 체감온도는 33도. 뜨거운 햇볕과 함께 한껏 더운 공기가 한 번씩 얼굴을 덮쳤다. 머릿속으론 아무 생각 없이 버스 도착 시간만 재고 있었다. ‘폭염’이 이어지던 날 중 하루였다.

전국적인 폭염경보가 20일 넘게 이어지고 있다. 지난 5월 20일 이후 온열질환자는 8월 14일 기준 2500명이 넘는다. 폭염을 지나는 우리의 정신건강은 괜찮은 걸까. 이날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대한적십자사 인천지사 서북봉사관. 대한적십자사는 2016년부터 행정안전부의 위탁사업으로 전국 17개 시·도에서 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를 운영한다. 재난 발생 지역을 찾아가 대면 상담을 진행하는데, 이날 서북봉사관에선 청라 아파트 화재 주민 및 ‘폭염 취약층’이 대상이었다. ‘폭염’은 2018년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상 자연재난에 포함됐다.

폭염이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이곳에서 인천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가 위촉한 상담활동가들을 만나 폭염 취약층 심리상담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들었다. 재난심리상담에는 상담 관련 자격증 소지자, 임상심리 전문가, 정신건강전문요원, 상담관련학과 대학 강사 혹은 교수 등이 참여한다.

상담경력 7년차인 김상희 상담활동가는 “올해 세 분의 할머니를 만났다”며 “보통은 ‘괜찮으세요’ 하고 물으면 ‘괜찮다’는 답이 돌아오지만, 선풍기만으로 버티는 데다 워낙 습하다 보니 힘들어하신다”고 말했다. “어르신들은 기력이 많이 떨어지고 심리적으로 고독감, 외로움을 많이 느껴요. 평소에도 그럴 수 있는데 무더운 날에 확실히 좀더 심해지고요.”

6년가량 재난 피해자 심리상담에 참여해온 김미옥 상담활동가는 “폭염일 때 어르신들 집에 방문해보면 무기력한 상태로 누워 지내는 분들이 많다”며 “삶에 대한 희망이 적고 좌절감, 상실감 등에 사로잡혀 있기도 하다”고 했다. “입맛이 없고 (신체적) 건강 문제도 좀 커지니까 ‘이러다 내가 죽으면 누가 다음을 챙겨주나’ 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 두려움이 큽니다. 혼자 사시는 분들, 특히 여름 폭염 때 그런 상황을 겪어요.”

지난 8월 9일 인천 서구 청라동 대한적십자사 인천지사 서북봉사관에서 상담활동가들이 주간경향과 인터뷰한 후 자세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상희·김은주·김미옥·송현의 상담활동가. 김향미 기자

지난 8월 9일 인천 서구 청라동 대한적십자사 인천지사 서북봉사관에서 상담활동가들이 주간경향과 인터뷰한 후 자세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상희·김은주·김미옥·송현의 상담활동가. 김향미 기자

‘폭염 취약계층’ 혹은 ‘폭염 민간계층’은 어린이, 노인, 기저질환자, 노숙인, 저소득층, 야외 노동자 등을 가리킨다. 폭염에 신체적 건강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큰데, 마찬가지로 정신건강 어려움을 호소하는 비율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인천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에서 상담을 받는 이들은 홀로 사는 노인이 많다. 센터의 전담인력인 김이슬 상담활동가는 “학교나 회사에 가는 저연령층보다 집에 주로 있는 어르신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며 “경로당이나 복지관에 가거나 무료급식소 등을 이용하면서 밖으로 나오는 분들도 있지만 외출 자체를 꺼리는 분들이 있고, 시설·기관도 문을 닫는 날들이 있어서 더 쉽게 고립되고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지난 7월 3일에는 인천 연수구 적십자사 인천지사 건물 앞 재난회복지원버스에서 상담이 진행됐다. 상담활동가들은 날씨 변화에 따라 기분은 어떤지, 신체적 건강은 괜찮은지, 주거 환경이나 냉방시설은 괜찮은지, 외출은 잘하는지 등을 묻고 그에 맞는 대처법을 상담한다. 이후 추가 심리상담이 필요하면 전화나 방문 상담이 추가로 진행된다. 당시 인천지사의 무료급식소를 이용한 후 상담을 받은 박정례씨(가명·84)는 기자와 만나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살아서 특별히 불편한 게 없다”고 했다. 다만 “나이가 들어도 사람이 감정이라는 게 있으니까 조금 흐린 날에는 기분이 밝지는 않고 자식이 없이 살아온 일들이 생각나서 우울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박씨를 상담한 정예진 상담활동가는 “코로나19 유행기간에 정신건강 문제가 두드러졌는데, 그 이후로 조금 나아진 듯하다”며 “어르신들은 ‘늘 여름은 오고 여름은 덥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큰 문제로 여기지 않고, 남한테 피해주거나 신세질까봐 무더위 쉼터 등을 잘 이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난 7월 3일 인천 연수구 연수동 대한적십자사 인천지사 건물 앞 재난심리회복버스에서 김이슬 상담활동가(오른쪽)가 한 어르신과 상담을 하고 있다. 대한적십자사 인천지사 제공

지난 7월 3일 인천 연수구 연수동 대한적십자사 인천지사 건물 앞 재난심리회복버스에서 김이슬 상담활동가(오른쪽)가 한 어르신과 상담을 하고 있다. 대한적십자사 인천지사 제공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아무래도 기후변화 때문에 폭염이 심해지다 보니까 (일반적으로) 신체건강은 물론이고 정신건강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특히 낮에는 활동이 줄고 열대야 때문에 불면에 시달리면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을 일에도 스트레스가 심하고 감정조절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이런 날씨에도 쉼 없이 일해야 하는 분들은 집중력이 떨어져 업무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특히 경제적 취약계층이나 독거노인들은 매우 더울 때, 추울 때 낮에 거의 집 밖으로 못 나가고 냉난방도 취약할 수 있어서 건강상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했다.

올해 6월 국내에 <폭염 살인>이라는 다소 과격한 제목의 책이 나왔다. 기후 저널리스트인 제프 구델은 이 책에서 폭염이 “목숨이 위태롭다는 사실을 알아챌 새도 없이 나를 죽일 수도 있는 힘”이라고 했다. 물론 폭염으로 인한 신체적 건강피해는 빠른 대처가 필요한 큰 위험이다. 실제로 폭염기간에는 온열질환자가 급증하고 심장 및 신장 질환으로 인한 사망률 또한 높아진다. 정신건강 역시 나빠진다. 구델이 참고한 주요 연구 결과 가운데 정신건강과 연관된 내용을 보면 “사람들은 더위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더욱 충동적으로 행동해 쉽사리 분쟁을 일으킨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인종차별적 비방과 혐오 발언이 급작스레 늘어난다. 자살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총기 사고도 늘어난다”고 보고됐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12월 낸 보고서 ‘사회정신건강연구센터 운영: 기후위기가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 연구진들은 기후위기와 정신건강의 관계를 다룬 최근 연구 120개를 검토했다. ‘기온’ 관련 연구가 27개로 가장 많았는데, 연평균 기온이 23도 이상인 지역에서는 기온이 1도 상승할 때마다 지역주민들의 우울 위험이 7%씩 증가했다는 연구 결과(2019·대만)가 있었다. 미국의 2016년 한 연구에 따르면 일평균 기온이 21도 이상일 때는 10~16도일 때보다 행복과 기쁨 등의 긍정적인 감정은 줄어들고 분노와 스트레스 등의 부정적인 감정과 피로감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폭염 속 정신건강 관리 대처법

전문가들은 폭염으로 정신건강이 악화할 수 있음을 개인이 인지하고, 상황에 따라 전문기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본다. 백종우 교수는 개인적 차원에선 “내가 평소보다 감정 조절이 어렵다고 하면 그 이유가 내 내부에도 있지만 폭염 때문일 수 있다. 내가 이렇게 잠을 못 자고 하는 것들이 실수를 초래할 수도 있고, 일의 의욕을 떨어뜨릴 수도 있고, 불필요하게 화를 내서 누군가에 상처를 준다든지 하는 일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고, “사회적으로는 폭염 취약계층에 대한 대처가 우선적인 과제”라고 말했다.

대한적십자사 인천지사에서 재난심리회복 상담을 받는 이들에게 제공하는 ‘마음구호키트’ / 김향미 기자

대한적십자사 인천지사에서 재난심리회복 상담을 받는 이들에게 제공하는 ‘마음구호키트’ / 김향미 기자

복지 취약계층으로 사회안전망 안에 들어와 있으면 폭염 시 냉방용 물품, 에너지바우처 외에 심리지원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사회안전망 안에 들어오지 않는 사각지대가 있다. 김미옥 상담활동가는 “정말 어둠 속에서, 폭염 속에서 지쳐 있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고 그분들을 찾아내야 하는데, 어려운 일”이라며 “과거보다 점점 이웃에 대한 관심도 줄어서 찾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송현의 상담활동가는 “장애인 복지 분야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면서 인식 개선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체감한다”며 “정신건강 문제도 인식을 바꾸는 게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15년간 심리상담기관을 운영한 김은주 상담활동가는 “자신이 노출된다는 데 두려움, 또 비용적으로 어려움이 있는 분들이 있다”며 “도움을 받을 곳이 있다는 것이 더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각 지역 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에 전화(대표전화 1670-9512)하면 재난을 직접 경험한 사람뿐만 아니라 목격자, 가족, 구호활동 참여자 등도 상담을 받을 수 있다. 피상담자 상황에 따라 상담 회기가 달라지며 최대 10회기까지 지원이 가능하다.

최근 정부도 기후변화 적응 정책을 수립하면서 정신건강 문제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2023년 6월에 발표된 제3차 국가 기후변화 적응 강화대책에서 ‘기상·기후재난(홍수·폭염)으로 인한 정신질환 증가’가 건강위험 목록에 포함했다. 질병관리청이 2022년 3월 발간한 제1차 기후보건영향평가 보고서도 폭염 등으로 인한 정신건강 영향을 포함했다. 다만 현재 폭염 속 정신건강 관리는 ‘재난’의 관점에서 대응하고 있다. 행안부의 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 보건복지부 산하 국가트라우마센터 등이 사회·자연재난 발생 시 심리지원을 담당한다.

‘기후위기가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는 ‘보건’의 관점에서는 정책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정부가 지난해 12월 정신건강정책 혁신방안을 발표한 후 심리지원을 받을 수 있는 저변을 넓히고 있지만, 기후변화로 인한 이상기후 등에 영향을 받은 정신건강 부분은 미흡하다. 이 보고서는 기후위기 ‘적응’ 대책으로서 정신건강 부분이 현재 정책과제임을 인지하고, 기후위기와 정신건강에 대한 근거를 구축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향미 기자 sokhm@kyunghyang.com>

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