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이불솜’과 산골 마을의 ‘핏빛 성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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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양민학살어린이위령비에 새겨진 어린이 희생자 명단 / 진실화해위원회 제공

문경양민학살어린이위령비에 새겨진 어린이 희생자 명단 / 진실화해위원회 제공

죽음에서 태어난 아이. 채홍달(1950년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조용한 산골 마을을 덮친 ‘학살’의 피바람. 총알은 만삭의 여인도 가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몸을 관통한 총알. 하지만 어머니는 시신 더미 속에서 기적처럼 살아나왔다. 상처에서 계속 뿜어져 나오는 피를 무엇으로든 막아야 했다. 그때 생각난 것이 ‘이불솜’이었다.

“(어머니가) 만삭의 몸으로 피를 철철 흘리면서 친정으로 가다가 중간에 고모집이 있어서 들렀는데, 이불솜을 뭉쳐가지고 총상 입은 곳에 집어넣었대요.”(채홍달 인터뷰·2022. 2. 19.)

어머니는 그렇게 지혈을 하고 가까스로 목숨을 지켰다. 그리고 13일 뒤 채홍달을 낳았다. 경북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 24가구 127명의 주민이 오순도순 살아가던 산골 마을이었다. 1949년 12월 24일, 한 무리의 군인이 마을에 나타나면서 ‘사건’은 시작됐다.

국군 제2사단 제25연대 소속 2개 소대 70여명이 그날 정오쯤 석달마을에 들어왔다. 이들의 임무는 ‘공비토벌 작전 중 지역정찰 임무’.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도, 주로 산악지대에 숨어 활동하는 좌익세력을 토벌하기 위한 군·경의 작전은 곳곳에서 행해졌다.

그런데 군인들의 행동이 이상했다. 마을을 포위한 채 주민들을 집 밖으로 불러냈다. 남성들은 대개 일하러 나가고, 마을에는 여성과 어린이, 노인들이 주로 남아 있을 시간이었다.

“뒷산에서 호각을 확 부니까 앞에서 ‘질러!’ ‘질러!’. 맨 윗집에 불을 지르니 집마다 (불을 지르러) 안 다녀도 (불이) 내려오면서 타는 거예요. (집 밖으로) 나오라고 막 고함을 질러요.”(생존자 채홍연 진술, KTV <진실 그리고 화해- 문경 석달사건 편> 2020. 8. 31.)

주민들이 선뜻 집 밖으로 나오지 않자, 군인들은 마을에 불을 질렀다. 놀라 뛰쳐나온 주민들을 마을 앞 논에 모았다.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군인들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총소리, 비명소리가 골짜기에 울려퍼졌다. 여기저기 살이 튀고 피가 흘렀다. 학살이었다.

요란하던 총소리가 멈췄다. 쓰러지고 고꾸라진 사람들의 시신이 논바닥에 널려 있었다. 사이사이에, 운 좋게 총알을 피하거나, 가벼운 부상만 입은 사람들이 고개를 숙인 채 벌벌 떨고 있었다. 군인들은 이들에게 “살아남은 사람은 살려줄 테니 일어나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났다. 군인들은 그들을 옆 논으로 다시 모이게 했다. ‘정말 살려주려나?’ 하지만 희망을 짓밟는 총성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도 총알을 피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학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마을 어귀 산모퉁이에서도 총성이 울렸다. 그날은 마을 아이들이 주로 다니던 김룡국민학교 방학식 날이었다. 방학을 맞아 들뜬 마음으로 하교하던 어린이들, 이웃마을에 일 보러 갔다가 돌아오던 청장년들이 산모퉁이에서 또 희생됐다. 희생자는 86명. 전체 주민의 약 3분의 2가 한날한시에 목숨을 잃었다. 가옥 24채가 전소됐다.

채아기(여·1세), 정아기(여·1세), 황아기(남·1세), 남아기(남·1세), 박아기(남·1세). 희생자 명단에서 유독 눈에 띄는 이름, ‘아기’.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이름도 짓지 못한 젖먹이들이다. 전체 희생자 중 10세 이하가 무려 22명. 20세 이하는 모두 43명으로, 전체 희생자의 절반이 아동·청소년이었다. 학살의 무차별성은 여기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어째서, 이렇게 한 마을을 ‘초토화’하는 끔찍한 학살을 저질렀을까. 그것도 우리 국군이.

“주민들에게 공산주의자들에게 협조했다는 죄를 뒤집어씌워 일을 저질렀다. (…) 지휘관은 군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하여 지방경찰서장과 결탁해 고위층 관리들에게는 70명의 게릴라가 학살을 저지른 것이라고 허위보고 했다.”(1950. 1. 16. 미 극동군 사령부 정보일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문경 석달사건 조사보고서> 재인용)

학살의 진실은 철저히 왜곡됐다. 국군이 아니라 ‘공비’의 소행으로, 가해자가 뒤바뀌었다. 희생자들의 제적부에도 “공비 출몰 총살로 인하야 사망”이라 기록됐다.

당시 언론도 “공비의 최후적 만행으로서 국군을 가장하고 부락에 침입해 살인방화 등을 감행한” 사건으로 보도했다. 사건 이후 신성모 당시 국방부 장관이 김룡국민학교를 직접 방문한 일은 “주민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일일이 친절하게 위문하였으며, (…) 위로금까지 주어 동 지구 재건의 길을 열어준 바 있다”(이상 1950. 1. 26. 연합신문)고 보도됐다.

당시 미군은 그러나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사건의 규모가 정부를 당혹하게 할 만큼 위협적이어서 (…) 신문보도를 금하고 사건 관련 군 지휘관들을 처벌했으며 관련 부대의 지휘체계도 재편성하였다”(1950. 1. 24. 미 극동군 사령부 정보 요약)는 기록을 남겼다.

국가가 문경 석달사건의 진실을 ‘공식적으로’ 규명한 것은 2007년이었다. 국가조사기구인 진실화해위원회는 “군이 비교전상태의 비무장 민간인을 (…) 무차별적이고 무자비하게 살해한 행위는 실체법적으로나 절차법적으로나 명백히 위반한 행위”라고 결론지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사과 권고에 따라 국방부는 이듬해 희생자 위령제에 맞춰 사과문을 발표한다. 문경지역 군부대 부대장이 참석해 “당시 사정과 사건 본질이 여하했든지간에 많은 분이 피해를 입은 데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2008. 12. 24.)는 사과문을 대독했다.

“장관이 직접 온 것도 아니고 지역 부대장이 대신 왔어요. 국방부에서 내려온 것, 그게 사과예요? 내가 그걸 보고 ‘이게 사과문이냐, 사기문이냐?’ 그랬어요.”(채홍달 인터뷰)

60여 년 만에 받은 사과 아닌 사과. 보상을 위한 길은 더 험난했다. 보상을 위해서는 유족 한 사람 한 사람이 직접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내야 했다. 심지어 그렇게 어렵게 시작한 소송마저 민사상 ‘소멸시효’를 이유로 패소하는 사례도 있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9년 대통령과 국회에 ‘민간인 집단희생 배·보상 특별법’ 제정을 제1항으로 건의했다. 이후 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활동을 마치며 펴낸 <종합보고서>에서도 이 건의를 ‘정책권고’의 맨 앞에 제시했다. 그러나 이 건의는 아직까지도 실현되지 않았다.

2020년 출범한 2기 진실화해위원회 역시 지난해 11월 ‘진실규명 결정 사건에 대한 배·보상 법안 입법’을 다시 한 번 정책권고한 바 있다. 현재 국회에 발의돼 있는 배·보상 관련 법안은 4건이다(이개호·김용판·서영교·윤영덕 각 대표발의).

“(진실이 밝혀지면) 국가에서 알아서 보상까지 해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알아서 챙겨주는 건 전혀 없잖아요.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해야 하는데) 혼자 하기도 벅차요.”(채홍달 인터뷰)

한국전쟁 전후 피학살자는 최대 100만명까지 추산된다. 7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가는 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국민이 있다. 국가의 책임에 ‘소멸시효’는 없다.

※이번 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최규화 전 진실화해위원회 주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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