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미 평화봉사단 이야기

(4)농악과 민요에 폭 빠져버린 봉사단원들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결핵없는 내일> 수록곡을 연주하려 준비 중인 주한 미 평화봉사단원들의 모습 / K-4 Patricia Wilson 촬영. USC 한국학 도서관 제공

<결핵없는 내일> 수록곡을 연주하려 준비 중인 주한 미 평화봉사단원들의 모습 / K-4 Patricia Wilson 촬영. USC 한국학 도서관 제공

“6인치 규칙”

평화봉사단은 국가 간 협약으로 외국인 집단이 신생 국가인 대한민국에 대거 파견된 기회였다. 기존에 선교사나 주한 미군 등 한국에 파견된 외국인은 종종 있었지만, 해외의 선교본부나 군대 등 관리의 주체가 별도로 존재했기에 한국 정부가 그다지 개입하지 않았다. 초기 주한 미 평화봉사단은 사전 훈련에서 선교사나 주한 미군을 위한 어학 학습자료를 활용했다. 천주교와 개신교 교단에서는 한국에 파송한 선교사를 위한 한국어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평화봉사단이 필요한 한국어는 선교를 위한 한국어와 달랐다. 특히 일선 보건소에서 보건 요원들이 활용할 한국어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에서는 훈련생을 가르치기 위한 교재를 맞춤 제작하기로 했다. 한국어 강사와 비교문화 강사들이 교재를 집필했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 사전 훈련의 교재는 단순히 어학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었다. 평화봉사단이라는 외부인을 의식해 내용을 구성한 것으로, 취사선택된 교재였다.

당시 한국 문화와 미국 문화 간의 격차는 오늘날보다 훨씬 컸다. 이질적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문교부는 평화봉사단이라는 이질적인 문화를 지닌 미국인 집단에 대해 좀더 알아보고자 연구에 착수했다. 1969년 문교부 산하의 중앙교육연구소(현 한국교육개발원)가 평화봉사단의 효과성에 관한 보고서(Effectiveness of the Peace Corps Program)를 작성했다. 보고서는 주로 평화봉사단에 의한 영어교육의 효과성에 대해 논하고 있지만, 이밖에도 평화봉사단과 함께 일하는 한국인 동료 교사들로부터 평화봉사단원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한국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설문조사했다. 미국인에게 가르치고 싶은 한국적 가치는 관용,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 태도, 가족에 대한 책임감, 남녀 분별적인 태도 등이었다. 응답자들은 미국인들이 성(性)에 대한 관념이 별로 없기에 성에 대한 건전한 태도를 가르치고 싶으며 남성의 우월성, 소극적인 여성의 태도, 자유분방하지 않은 남녀 간의 관계 등이 미국에 소개하고 싶은 한국의 가치라고 답했다.

1977년 평화봉사단 K-43의 사전 훈련 프로그램 수업 자료를 보면 평화봉사단원에게 가르치고 싶어한 한국의 가치가 등장한다. 바로 유교의 덕목과 속담 등이다. 오륜(五倫)인 군신유의(君臣有義), 부자유친(父子有親),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과 함께 한국 속담이 영어로 정리돼 있다.

1977년 주한 미 평화봉사단 K-43의 사전 훈련 프로그램 수업 자료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1977년 주한 미 평화봉사단 K-43의 사전 훈련 프로그램 수업 자료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1.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世不同席)
Man and woman should not be together after age seven.

2. 찬물에도 선후가 있다.
There are priorities(a ranking, order) even in drinking plain water.

3. 암탉이 울면 집안 망한다.
When the hen cries, the home will be destroyed.

4. 친구 따라 강남 간다.
When a friend goes to Kangnam(a remote place in China), his friend follows him.

5. 수부귀다남(壽富貴多男)
The secret of happiness is health, wealth, and many sons

대한결핵협회 서울특별시지부와 주한 미 평화봉사단 보건 요원 57명의 협업으로 탄생(1969년 11월)한 <결핵없는 내일> 음반 표지 앞면(왼쪽)과 뒷면 / USC 한국학 도서관 제공

대한결핵협회 서울특별시지부와 주한 미 평화봉사단 보건 요원 57명의 협업으로 탄생(1969년 11월)한 <결핵없는 내일> 음반 표지 앞면(왼쪽)과 뒷면 / USC 한국학 도서관 제공

‘수부귀다남’에서 수는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 부는 금전적인 부유함, 귀는 권력과 명예, 다남은 아들이 많은 것을 일컫는다. 남자와 여자가 유별하게 살았던 1960~1970년대 한국사회에서 미국인 남성 단원과 여성 단원이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모습이 그다지 좋게 보이지는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행동이 한국사회에서는 잠재적인 위협이 될 수 있기에 주한 미 평화봉사단을 가르쳤던 한 한국어 강사는 수업 시간에 ‘6인치 규칙(six-inch rule)’을 만들었다. 남성과 여성 훈련생은 최소한 6인치(15㎝) 거리를 두고 앉아야 한다는 규칙이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의 재해석이었다.

하지만 1968년 미국과 유럽에서 일어난 자유민권운동인 68운동을 거친 세대는 성(性)에 거침이 없었다. 훈련생이나 단원들은 안전한 성생활을 위해 콘돔의 필요성을 주창했지만 문제는 한국에서, 특히 시골에서 미국만큼 질 좋은(?) 콘돔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란 점이었다. 일부 단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주한 미 평화봉사단 사전 훈련지나 서울사무소에 누구나 조용히 가져갈 수 있는 콘돔 상자를 비치했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 한국어 강사들에게 콘돔 상자는 일종의 문화 충격이었다.

평화봉사단원들의 관심은 훗날 장구로까지 나아갔다. 이들이 출연(2009년 3월)한 제2회 설장구보존회 발표회 프로그램북 / USC 한국학 도서관 제공

평화봉사단원들의 관심은 훗날 장구로까지 나아갔다. 이들이 출연(2009년 3월)한 제2회 설장구보존회 발표회 프로그램북 / USC 한국학 도서관 제공

한국 민속의 재발견

문화의 측면에서 한·미관계를 조명한 기존 연구는 미국 대중문화의 무차별적인 수용, 미국문화의 종속, 이식 등을 논의했다. 하지만 주한 미 평화봉사단의 경우 전혀 양상을 보였다. 한국에 거주하며 여러 문화를 접한 봉사단원들은 이내 한국의 문화에 푹 빠져들었다. 특히 한국의 민속문화, 전통문화에 관심을 보인 이들이 많았다. 봉사단원 활동을 하면서 서예나 민화, 판소리, 태권도 등을 배우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일부 단원들은 전문가적인 수준으로 익혀나갔다.

그중에서도 단연코 돋보이는 인물은 고(故) 유게리(柳憩里·미국명 Gary Rector)와 고(故) 브라이언 배리(Brian Barry)였다. 유게리는 1943년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나 미시간의 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했다. 1967년 주한 미 평화봉사단 K-4 사전 훈련에 합류하면서 한국과 첫 인연을 맺었다. 브라이언 배리는 1945년 미국 코네티컷주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유게리와 마찬가지로 K-4로 주한 미 평화봉사단에 합류했다. 3개월간 뉴멕시코주 고스트렌치에서 훈련을 받는 동안 유게리와 배리는 한국어를 너무 빨리 익혀 모든 훈련생과 강사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이들은 1967년 한국에 입국해 한국에서 살았다. 유게리와 배리는 각각 심장질환과 암으로 2018년과 2016년 한국 땅에서 눈을 감았다.

K-4 보건 요원 중 불교에 입적한 브라이언 배리가 탱화를 그리고 있다. / www.wabei-mono.com/blog/2008/11/

K-4 보건 요원 중 불교에 입적한 브라이언 배리가 탱화를 그리고 있다. / www.wabei-mono.com/blog/2008/11/

결핵없는 내일

한국에서 보건 요원으로 봉사활동을 하는 동안 유게리는 농악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는 언어만 빨리 배운 것이 아니라 각종 악기도 빨리 배웠다. 천부적인 작곡 능력까지 있었다. 유게리는 뮤지션으로 활동했는데, 그중에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음반이 <결핵없는 내일>이었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 보건 요원들은 결핵환자 관리뿐만 아니라 결핵에 대한 인식 전환, 보건 교육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대한결핵협회 서울특별시지부와 협업으로 주한 미 평화봉사단 보건 요원 57명은 1969년 11월 <결핵없는 내일>이라는 음반을 녹음해 발표했다. 음악 감독 및 타이틀곡 <결핵없는 내일>의 작사와 작곡을 유게리가 맡았다. 그는 당시 서구에서 유행하던 사이키델릭한 곡조에 계몽적인 한국어 가사를 붙여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만들었다. 가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라의 힘이 되는 국민의 건강/ 발전과 생산의 힘이요/ 내가 설마 하지 말고 검진받으면/ 결핵없는 우리나라의 보다 나은 내일/ 결핵이란 남녀노소 구별이 없이/ 옮겨지는 무서운 병인데/ 자기도 몰래 환자된 사람 많으니/ 가래검사, 엑스레이검사 둘다 해야지/ 어른 아이 빠짐없이 모두가 함께/ 한 해에 한 번 틀림없이/ 무료검진 치료하는 보건소에 가서/ 자기 건강 자랑 말고 확인해야지.”(유튜브에서 <결핵없는 내일>을 검색하면 찾아서 들을 수 있다.)

지금 가사를 들어보면 상당히 계몽적이다. 심지어 국가주의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불량한 보건 위생 상태나 전염병의 확산은 한국의 산업화·근대화에 걸림돌이었다. 공중보건 환경 개선은 당시의 국가적 과제일 수밖에 없었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 보건 요원들은 보건소에서 일하며 지역사회 공중보건 개선에 힘썼다. 이와 동시에 지역사회의 민속문화를 흡수했다.

<결핵없는 내일> 음반에는 타이틀곡 이외에도 민요와 유행가, 자작곡 등을 수록했다. 봉사단원들이 가야금과 거문고, 피리, 장구 등 국악기를 배워서 직접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오봉산 타령’, ‘개타령’, ‘진도 아리랑’, ‘해녀 노래’, ‘밀양 아리랑’, ‘뱃노래’ 등을 녹음했다. 또한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패티킴의 ‘사랑하는 마리아’, 정훈희의 ‘안개’를 커버곡으로 해서 ‘전라도랑께’라는 자작곡도 함께 수록했다.

<결핵없는 내일> 음반에 민요 연주를 싣기 위해 음악감독을 맡은 유게리는 훌륭한 음악적 스승을 찾아 모셨다. 이전까지 국악기를 들어본 적도, 다뤄본 적도 없는 미국인들이 음반을 내려면 수많은 레슨과 연습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유게리는 1968년 전라북도 정읍에 살고 있던 설장구의 대가 김병섭 명인을 서울로 불러들였다(설장구란 농악에서 장구재비의 우두머리인데, 즉흥 연주와 같은 개인기를 많이 보여준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원들은 김병섭을 스승으로 모시고 국악을 배우고 익혔다. 때론 서울 안국동에서 합숙훈련을 하기도 했다. 각고의 연습 끝에 보건 요원들은 마침내 민요를 연주하고 녹음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전북 김제·전주에서 보건 요원으로 활동했던 닐 랜드레빌이 ‘전주’ 풍경을 그린 수묵화(왼쪽)와 ‘수박’ 수묵화 / 서나래 제공

전북 김제·전주에서 보건 요원으로 활동했던 닐 랜드레빌이 ‘전주’ 풍경을 그린 수묵화(왼쪽)와 ‘수박’ 수묵화 / 서나래 제공

당신들은 대체…

유게리는 K-4 보건 요원으로 봉사단원의 임기가 끝난 이후에도 농악을 좀더 전문적으로 배우기 위해 한국에 남았다. 배리 역시 농악을 더 배우기로 했다. 유게리와 배리는 김병섭 호남우도굿 농악단에 들어가 8년 동안 각각 설장구와 꽹과리를 배웠다. 2009년 3월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고 김병섭 선생 20주기 추모공연 설장구보존회 발표회가 열렸다. 유게리와 브라이언 배리가 ‘지도선생님’으로 활약했다. 유게리가 한국에서 마당극, 국악 작곡을 하는 동안 브라이언 배리는 불교에 입적해 도해(道海)라는 법명을 받고 만봉 스님에게 탱화를 배워 탱화장으로 활동했다. 또한 조계종 국제포교사 양성 강의 등을 맡았다. 법정 스님의 수필을 영어로 옮기고, 한국의 불화를 세계에 알리는 역할도 했다.

비단 유게리나 브라이언 배리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통문화, 민속문화에 빠져든 봉사단원도 상당히 많았다. K-1 단원으로 안동농업고등학교에서 근무했던 데이비드 맥캔(David McCann)은 한국의 시조에 푹 빠졌다. 김소월, 이육사, 윤동주 등의 시를 영어로 번역해 소식지 ‘여보세요(Yobosayo)’에 게재하는 한편, 시조를 쓰기도 했다. 훗날 하버드대학교의 교수로 임용된 그는 거기서 한국문학을 가르쳤다. 영문으로 된 한국문학 잡지 ‘Azalea(진달래꽃)’을 창간하기도 했다. 1969년부터 전북 김제·전주에서 보건 요원으로 활동했던 닐 랜드레빌(Neil Landreville)은 한국의 농촌생활에 매료된 나머지, 한국의 풍경을 수묵화로 옮겼다. 그는 정겨운 농촌 풍경과 활기찬 도시 풍경을 익살스러운 필치로 그려냈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의 마지막 기수인 K-51의 수잔나 오(Suzanna Oh) 단원은 1980년 보건 요원을 계기로 한국에 들어와 ‘김덕수 사물놀이패’에 들어가 풍물을 배웠다. 그 이후 매니저로 전직해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해외 진출에 큰 역할을 했다. 현재 서울에 거주하며 한양도성 해설사, 궁궐 길라잡이로 활동 중이다.

“나는 아직 이 나라를 떠날 준비가…”

우연한 계기로 20대에 한국에 오게 됐고, 봉사단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한국 문화에 깊은 감화를 받아 평생을 한국에 살면서 한국 문화의 전수자가 된 사람들. 이들을 인터뷰하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주한 미 평화봉사단으로 오기 전까지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잘 알지 못했지만, 김포공항에 내리는 순간 어떠한 기운을 느꼈다고 했다. 만일 내 전생이 있다면 이곳에서 전생을 보내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 봉사단원으로 2년 임기를 마친 시점에는 ‘나는 아직 이 나라를 떠날 준비가 되지 않았다(I am not ready to leave this country)’고 생각했단다. 서로 다른 봉사단원들을 인터뷰했는데도 잇따라 비슷한 언급을 하는 걸 들으며 순간 소름이 돋았다. 이들이 정말 전생에서 한국인이었던 건 아닐까.

<서나래 한국교원대학교 한국근대교육사연구센터 전임연구원>

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