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방공 경보 알맹이 빠진 표준문안 수정 추진
현 90자에서 157자로 바꾸면 구형폰 수신 불가
“오늘 6시 32분 서울지역에 경계경보 발령. 국민 여러분께서는 대피할 준비를 하시고, 어린이와 노약자가 우선 대피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5월 31일 서울시가 발송한 재난문자에 서울 일대 시민들은 ‘대혼란의 아침’을 맞았다. 위급 재난문자에 적용되는 사이렌 음까지 울렸지만 왜 대피해야 하는지, 어디로 대피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는 빠져 있었다. 경보에 놀란 시민들이 일시에 포털 접속을 시도하면서 네이버 접속 장애도 발생했다. 불안감만 조성했을 뿐 대피에 필요한 정보는 전달하지 않은 채 22분이 흐른 뒤에야 행정안전부의 ‘오발령’ 문자가 도착했다. 이어 서울시가 ‘경보 해제’ 문자를 보냈다. 혼란은 소동으로 끝났지만 “실제상황이었으면 어쩔 뻔했나”라는 비판이 잇따랐다.
이번 소동은 재난대응 체계의 큰 허점을 드러냈다. 재난문자는 알맹이가 없었고, 중앙정부·지자체 간 소통채널은 무너져 있었다. 재난문자상 경보 발령 시각은 32분이었지만, 재난문자가 전파된 시점은 6시 41분으로 9분이나 늦었다. 오발령이냐, 경보 해제냐를 두고 행정안전부와 서울시가 공개적으로 다투면서 국무조정실이 감찰까지 나섰다.
스마트폰 보급률이 세계 1위(전 국민의 95%·미국 시장조사기관 퓨리서치의 2019년 조사결과)인 한국에서 재난문자는 재난대응 정보를 가장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다. 책임소재를 두고 행안부와 서울시의 공방이 앞으로도 이어지겠지만, 정작 중요한 건 이번 소동을 재난문자 체계의 재정비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재난문자에 어떤 정보를 얼마나 더 담을 수 있는지, 이 과정에서 고려해야 할 점은 없는지 등을 짚었다.
재난문자, 정보 더 담을 수 없나 서울시가 보낸 ‘경계경보 발령’ 재난문자는 행정안전부 예규인 ‘재난문자방송 기준 운영규정’의 표준문안을 그대로 따왔다. 2008년 최초로 만들어져 여러 차례 개정돼온 이 규정엔 태풍, 호우, 대설, 감염병, 방사능 누출 등 각종 재난에 상응하는 문안이 나열돼 있다. 그중 ‘적의 침공’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이뤄지는 ‘민방공 경보’는 경계경보·공습경보·화생방경보로 나뉘는데, 세 경보의 문안이 조금씩 다르다.
경계경보의 표준문안 내용은 “오늘 ○○시 ○○지역에 경계경보 발령. 국민 여러분께서는 대피할 준비를 하시고, 어린이와 노약자가 우선 대피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5월 31일 서울시민들이 전송받은 그대로다. 다음 단계인 공습경보의 표준문안은 주·야간 두 가지다. “오늘 ○○시 ○○지역에 공습경보 발령. 가까운 지하대피시설로 대피 후에 방송으로 전달되는 국민행동요령에 따라 행동해 주시기 바랍니다”(주간). “오늘 ○○시 ○○지역에 공습경보 발령. 전등을 끄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 후에 방송으로 전달되는 국민행동요령에 따라 행동하시기 바랍니다”(야간). 화생방경보 문안은 “오늘 ○○시 ○○지역에 화생방경보 발령. 호흡기 및 피부 등을 보호하시고, 방송으로 전달되는 국민행동요령에 따라 행동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이다. 이 운영규정은 중앙정부·지자체 등의 ‘재난문자 입력자’가 표준문안을 활용하되 상황에 맞게 수정할 수 있도록 명시했다. 하지만 5월 31일 서울시가 그랬던 것처럼 위급 상황에서는 표준문안 그대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알맹이 없는’ 재난문자는 일본 J-경보(전국순시경보시스템)의 메시지와 대비되면서 더욱 비판을 받았다. 일본 오키나와현에선 북한의 발사체 탐지 1분 만인 6시 30분에 “북한에서 미사일이 발사된 것으로 보입니다. 건물 안 또는 지하로 피난해 주십시오”라는 경보메시지가 전파됐다.
행안부는 늦게나마 ‘왜’ ‘어디로’를 포함할 수 있도록 재난문자 규정을 정비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행안부의 김경희 재난정보통신과장은 지난 6월 7일 주간경향과의 통화에서 “재난문자 문안은 재난 종류별로 부처 간 협의가 필요해 논의를 곧 시작할 예정이고, 6월 말까지는 전문가 회의도 열 계획”이라면서 “예규를 정식으로 개정하려면 두세 달은 걸리지만 선시행이 가능하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진행하려 한다”고 말했다.
‘정보 충분하게’ vs ‘소외 단말기 없게’ 재난문자에 ‘왜’ ‘어디로’ 등의 정보를 넣기로 했다고 해도 고민은 남는다. ‘얼마나 구체화할 것이냐’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현재 90자인 문자수를 늘려 지역별 대피소 등 구체적인 정보를 담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정부에선 “문자수를 늘리면, 일부지만 재난문자를 못 받는 이들이 나올 것”(행정안전부)이라며 주저하고 있다.
재난문자의 문자수 확대가 빨리 이뤄져야 한다고 보는 쪽에서는 문자의 ‘실효성’을 강조한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안전교육이 철저한 미국에선 경보가 울리면 일단 하던 일을 멈추고 바깥으로 나오지만, 한국은 경보 발령 이유와 구체적인 행동요령을 알려줘야만 움직이는 편”이라면서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재난문자에는 ‘왜 발령했나’는 물론 ‘전기차단기를 내리고 가스 밸브 잠그고 신속하게 이동하라’ 등의 구체적 요령과 지역별 대피소 등이 지역 맞춤형으로 담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 교수는 그러면서 “현재 통신기술로도 지금의 90자를 넘어선 157자 재난문자가 가능하고, 각 구별 발송이 가능하기 때문에 실현 불가능한 방안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현재 ‘90자 이내’인 재난문자의 문자수를 157자로 늘리는 것은 실제로 가능하다. 다만 재난문자 수신기능 의무 탑재가 적용된 2019년 이전에 출시된 LTE 단말기의 경우 ‘157자 재난문자’는 깨진 형태로 전달되거나 아예 수신이 안 될 수도 있다. 정부가 ‘157자 재난문자’ 적용을 망설이는 이유다.
재난문자는 문자가 아니다? 현재의 재난문자는 사실 ‘문자’라기보다는 ‘문자로 전하는 방송’에 가깝다. 재난문자는 CBS(Cell Broadcasting system)라 불리는 체계에 의해 전파되는데, 특정 상대에게 보내는 문자와 달리 동일 기지국 안에 있는 단말기에 동일한 문자가 전송된다. TV나 라디오가 상대를 가리지 않고 같은 내용을 내보내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국은 2005년 세계 최초로 재난문자 전국 송출체계를 만들었지만, 정작 3G 스마트폰 단말기에 대해선 긴급재난문자 수신기능 의무화 작업을 하지 못했다. 지금도 3G폰엔 재난문자가 오지 않기 때문에 정부는 3G폰 이용자들에게 안전디딤돌 애플리케이션을 깔아 이 앱을 통해 재난문자를 확인하도록 안내하고 있다. “3G폰 이용자들은 (정부가 걱정하는 2019년 이전 출시 4G폰 이용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재난문자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니, 재난문자를 157자로 늘리되, 재난문자에서 소외되는 이들에 대해서는 별도의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공하성 교수)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재난문자를 통해 지역별 대피소를 안내하는 방안은 가능할까. 현재 CBS 시스템은 시·군·구별 전송이 가능하기 때문에 불가능하진 않다. 행안부 관계자는 “코로나19 재난문자, 경찰의 실종자 문자에서 이미 활용된 링크 첨부 방안을 이번에 함께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일부 전문가들은 이 경우에도 득실을 잘 따져야 한다고 본다. 통신 분야 연구기관의 한 연구원은 “대피소를 확인하기 위해 접속자가 동시에 몰릴 경우 기지국이 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기능을 못 하게 되면, 그때는 전화통화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서 “코로나19 확진자 정보나 실종자 정보 확인을 위한 접속량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접속량이 순간적으로 몰릴 가능성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글에 익숙하지 않은 이주민 등 외국인을 고려해 문자 대신 그림을 이용한 재난문자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국내 체류 중인 외국인을 위해 만든 ‘이머전시 레디 앱(Emergency Ready App)’을 깔면 외국어로 번역된 재난문자를 받아볼 수 있지만, 관광객을 비롯한 단기 체류자들은 이 앱을 잘 알지 못해서다. 행안부 측은 “그림 재난문자의 경우 오히려 혼란을 줄 수도 있다는 지적도 있어 적절한 방안을 찾기 위해 국책기관을 통해 연구개발 중”이라고 밝혔다.
진짜 대피해야 할 일 생기면? 재난문자 체계를 정비한다 해도 모든 재난대응 정보를 문자로 확인한다는 건 비현실적이다. 재난대응과 관련한 상식은 미리 숙지하고 있을수록 좋다.
일단 가까운 대피소를 잘 모른다면 한번쯤 확인해두기를 권한다. PC에서는 국민재난안전포털 → 민방위 → 비상시설 → 대피소에서 지역별 대피소를 확인할 수 있다. 스마트폰에 안전디딤돌 앱을 깔면 첫 화면에서 ‘대피소 조회’가 가능하다.
이번 경계경보 문자에선 ‘대피 준비를 하라’는 내용이 있었다. 대피를 준비하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대피 준비’는 화재 위험을 대비해 전열기 코드를 뽑고, 가스 밸브 등을 잠근 다음 비상물품을 챙겨 대피소로 떠날 준비를 하는 단계를 말한다. 국민재난안전포털은 이때 필요한 비상물품으로 “30일분의 쌀, 라면, 밀가루, 통조림(식량)과 식수, 버너와 부탄가스(15개 이상), 가정용 상비약품, 방독면 등”을 제시한다. 현실적으로 가족 수대로 30일치 식량을 보관해두기는 어렵다. <거의 모든 재난에서 살아남는 법>(2018년 따비 출판)의 저자인 성상원 작가의 ‘노하우’를 참고해보자. 그는 미리 준비해두면 좋을 비상물품으로 “줄만 당기면 알아서 데워지는 발열 도시락(한 사람당 두 끼 정도·대피 12시간 뒤엔 비상배급체계 가동될 것을 전제), 2ℓ 이상의 물, 구급상자, 물티슈와 티슈, 손전등 기능이 있는 자가충전 라디오, 은박지 소재로 된 담요(1개당 1000원이면 구입 가능), 던져서 불을 끄는 소화기, 민간방독면 등”을 제시했다.
비상물품은 많으면 많을수록 도움이 되겠지만 사실 성 작가가 가장 중요하다며 제시한 ‘첫 번째 준비물’은 따로 있었다. 체력이다. 성 작가는 “하루 스쾃 100개 이상, 플랭크 3분 이상은 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야 대피하는 과정에서 체력 손실을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다”면서 “비상시 들고 가야 할 것이 많은 가족일수록 체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