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인가 극단적 선택인가 표현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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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은 ‘극단적 선택’으로…학계 “선택이란 용어는 부적절”

정부가 ‘제5차 자살예방기본계획’을 발표한 지난 4월 14일 서울 마포대교에서 자살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는 의미로 제작된 ‘한번만 더’ 동상이 설치돼 있다. / 성동훈 기자

정부가 ‘제5차 자살예방기본계획’을 발표한 지난 4월 14일 서울 마포대교에서 자살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는 의미로 제작된 ‘한번만 더’ 동상이 설치돼 있다. / 성동훈 기자

자살은 ‘극단적 선택’일까. 대부분 언론에서 자살이라는 표현을 삼가는 대신 극단적 선택이라는 용어를 쓴다. 모방자살을 우려해 보다 완곡한 표현을 고안한 것이다. 정부기관 등에서도 그렇다.

최근 극단적 선택이라는 용어 사용이 부적절하다는 목소리가 등장하고 있다. 자살 사망자가 마치 본인의 ‘적극적인 의지로 자살을 선택’한 것처럼 오인하게 만들고 이로 인해 자살이 선택 가능한 행위라는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며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자살 사망자를 상대로 한 잘못된 편견을 심화할 수 있다는 점도 부작용으로 꼽는다.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는 개념과도 배치될 수 있다.

자살의 원인을 무엇 하나로 단정하긴 어렵다. 사회·경제·문화적 요소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다만 언론과 미디어 등에서 자살을 어떤 용어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자살을 대하는 시민들의 인식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극단적 선택이란 표현을 두고서도 진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이유다.

자살예방 위해 관행적으로 사용하는 용어 

언론은 자살을 보도할 때 기사 제목과 본문에서 자살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최대한 쓰지 않는다. 모방 등을 통한 자살을 예방하려는 조치다. 이는 한국기자협회가 2004년 한국자살예방협회와 공동으로 제정한 ‘자살보도 윤리강령’에 따른 것이다. 또 2004년 처음 마련된 이후 2013·2018년 두 차례 개정된 ‘자살보도 권고기준 3.0’(보건복지부 공동 제정)을 준수하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다.

윤리강령과 권고기준의 가장 첫 번째 원칙은 ‘자살 사건은 되도록 보도하지 않는다’이다. ‘공공의 정당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사건’을 제외하면 보도를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가피하게 보도를 해야 한다면 기사 제목에 자살이나 자살을 의미하는 표현 대신 ‘사망’, ‘숨지다’ 등을 쓰도록 권고한다. 또 자살의 동기·방법·도구·장소 등 자세한 경위는 보도해선 안 된다. 자살 대신 극단적 선택이라는 표현을 권고하는 내용은 사실 없다. 언론이 자체적으로 완곡한 표현을 고민하다 극단적 선택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관행으로 굳어졌다는 게 정설이다.

‘자살 명령’ 환청을 듣기도 

그러나 최근 학계에서는 외려 극단적 선택 표현을 자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런 경계의 목소리는 ‘자살이 과연 개인의 적극적인 의지에 따른 선택인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한다. 나종호 미국 예일대 정신의학과 교수는 2022년 5월 출간한 저서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에서 “자살은 극단적 선택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해 7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도 같은 주장을 폈다.

나 교수는 앞서 2019년 10월 가수 설리(본명 최진리)씨가 사망했을 때도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와 정신의학신문에 게재한 칼럼에서 이 용어 문제를 다룬 적이 있다. 그는 설리씨가 사망하기 전 레지던트 동기를 자살로 잃었다고 한다. 나 교수는 지난 5월 24일 주간경향과 서면 인터뷰에서 “그때부터 극단적 선택에서 ‘선택’이란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 것 같다”라며 “내가 기억하는 동기의 마지막 모습은 끝까지 우울증에 맞서 싸운, 자신을 평생 괴롭힌 우울증을 치료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정신과 의사의 길을 걸은, 용감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 교수는 저서와 이번 인터뷰에서 극단적 선택 용어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었다. 선택은 개인의 적극적인 의지가 반영된 행위다. 자살 사망자들은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선택지가 없음을 느낀다고 한다. 대부분 절망감과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는데, 이런 감정이 삶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시야를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나 교수의 책에 담긴 내용이다. “자살 생존자들에게 시도 당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질문하면, 십중팔구 자살 생각에 너무나 강하게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마치 자살을 명령하는 환청을 들은 것 같다고 답하는 환자도 있다. 그 순간에는 감당할 수 없는 절망감으로 이성적 사고가 마비되고 우울감과 불안감이 소용돌이처럼 몰아치며 극도의 정서적 고통을 느낀다.” 이런 고통을 멈추는 유일한 방법은 죽음뿐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나 교수는 자살을 시도했던 사람 대부분은 생존한 사실에 안도한다고 말하며, 그의 경험담도 소개했다. “(뉴욕에 있는) 벨뷰병원에서 총기 자살 시도로 얼굴의 3분의 1 이상이 손상된 환자를 진료한 적이 있다. 그에게 ‘살아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자, 살짝 웃으며 ‘살아 있어서 감사하다’고 말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또 ‘극단 선택’이란 용어는 힘들고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자살이 하나의 선택지로 비칠 우려가 있다고 나 교수는 지적했다. 이 표현의 사용이 자살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근거도 없다며 “그래서 대부분의 나라에서 굳이 우회적인 표현을 쓰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살인가 극단적 선택인가 표현 논란

“언론이 보도원칙 어기고 있다”

자살 사망자를 상대로 한 그릇된 편견을 더 공고히 할 가능성도 있다고 나 교수는 밝혔다. 그는 “흔히 자살로 사망한 사람은 이기적이란 편견을 가지고 있다”라며 “자살을 선택으로 규정하는 것은 편견을 강화할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고 말했다. 자살 시도자는 외려 자신의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설명한다.

나 교수는 자살을 이기적으로 보는 부정적인 시각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나아가 자살예방까지도 악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자살 위험성이 높은 사람이 자살 생각이나 시도의 경험을 외부에 드러내는 걸 주저하게 함으로써 결국 적절한 치료를 받을 기회를 실기할 수 있다는 얘기다. 자살 유가족을 낙인찍을 수 있다는 점도 거론했다. 유가족들에게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내버려 뒀느냐, 왜 막지 못했느냐”라는 질문은 이들을 더 고립된 상태로 몰고 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자살 유가족 모임에서는 고인을 ‘전사’라고 표현한다고 들었다”며 “끝까지 생의 의지를 놓지 않고 병마와 맞서 싸운 이들을 기리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고 부연했다.

선택이라는 용어가 자살을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으로 여기게끔 만들 수 있다고 나 교수는 말했다. 이와 맞물려 자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게 외려 자살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외면하고 회피하려는 방어기제의 작동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고 했다.

자살은 고질적인 사회문제다. 통계청이 지난해 9월 발표한 사망원인통계를 보면, 2021년 자살 사망자는 1만3352명이다. 하루에 평균 36.6명이 자살했다. 2020년보다 157명(1.2%) 증가한 수치다. 다른 국가와 비교하면 심각성이 더 뚜렷하다. 한국의 연령표준화 자살률(표준인구 10만명당 자살 사망자)은 23.6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국가 가운데 1위다. OECD 평균(11.1명)보다 2배 이상 높다.

나 교수는 한국의 높은 자살률을 두고 “정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미국에서 자살 고위험군으로 알려진 전역 군인들의 자살률이 한국의 그것과 유사하다. 그래서 전역 군인의 건강과 처우를 관리하는 미 보훈부의 1순위 정책은 자살예방”이라며 “한국도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한국의 자살예방 예산은 보다 자살률이 낮은 일본의 예산에 비해서도 턱없이 적은 규모”라고 했다.

나 교수의 주장이 그렇다고 자살이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자는 건 아니다. 극단적 선택과 비교했을 때 자살 용어가 조금 더 낫다는 얘기다. 나 교수는 “특히 유명인의 자살을 보도할 때는 자살과 극단적 선택 모두 지양하는 것이 좋다. ‘사망’이나 ‘숨지다’라는 표현을 쓰는 게 적절하다”고 했다. 그는 세계보건기구(WHO)의 자살예방을 위한 미디어 가이드라인과 이를 참고해 만든 한국의 언론보도 권고기준을 언급하며 “극단적 선택이라는 표현을 제목에 사용하는 건 언론보도 원칙을 어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자살보도 권고기준에는 제목에 ‘자살’, ‘스스로 목숨 끊다’ 등 외에도 ‘극단적 선택’도 사용하지 않도록 권고한다.

권준수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도 이런 문제의식에 동의한다. 권 교수는 통화에서 “자살 사망자의 상당수는 현실 판단에 장애가 온 상태에서 자살을 하게 되는 것”이라며 “스트레스 등으로 몸에 변화가 오고 이로 인해 마음에도 변화가 생겨 마지막에 정신적 문제를 겪다가 의지와 상관없이 그런 상황에 놓이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극단적 선택 표현은 자살을 방조하거나 부추기면서 무의식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말했다.

지난 4월 14일 서울 마포대교 난간에 ‘죽으면 안 됩니다. 포기하지 마세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 성동훈 기자

지난 4월 14일 서울 마포대교 난간에 ‘죽으면 안 됩니다. 포기하지 마세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 성동훈 기자

“자살은 결코 선택일 수 없다”

정부 내에서도 극단적 선택이란 표현을 두고 논의를 진행 중이다. 대통령직속 국민통합위원회는 지난 2월 ‘자살 위기극복 특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자살예방을 위한 여러 대안을 모색한다는 목적이다. 특위는 인식개선을 위해 극단적 선택이라는 용어를 자제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특위 위원장인 한지아 을지대 교수는 지난 4월 21일 제9차 회의에서 “자살은 결코 선택일 수 없다”고 밝혔다.

지난 4월 28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개최된 ‘자살예방을 위한 우리 사회의 인식개선과 역할’ 세미나에서 특위 위원인 유현재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도 극단적 선택 용어와 관련한 내용을 발표하며, 새로운 자살보도 권고기준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특위는 버스정류장 광고판 등에 ‘자살은 결코 선택일 수 없다’는 내용의 공익광고를 싣는 등 구체적인 캠페인 전개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유 교수는 통화에서 “미디어 등에서 살기 힘들고 고통스러워 자살하는 모습이 나오는 등 자살을 선택지로 제공하는 경향이 있고, 자살을 선택으로 보는 문화마저 있다”라며 “언론과 미디어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에 선택이라는 용어를 아예 쓰지 말자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살예방의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도 향후 극단적 선택이라는 표현과 관련해 언론과 학계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논의 자리를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지난 4월 발표한 제5차 자살예방 기본계획(2023~2027년)에는 추진 과제 중 하나로 ‘자살보도 권고기준 고도화’가 포함됐다.

“혼자가 아니다”

나종호 교수는 지금 어디선가 자살을 생각하거나 시도하려는 이들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 “우울증을 앓는 뇌는 우리 머릿속에 희망 대신 절망감을 심어요. 그리고 스스로가 주변 사람들에게 짐이라는 거짓된 생각을 주입합니다. 여러분이 자살을 생각하는 건 의지가 약하거나 정신력이 약해서가 아니란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요. 자살 생각은 실제로 우울증의 9가지 증상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의 약 5%가 우울증을 앓는다고 해요. 혼자가 아닙니다. 꼭 정신건강 전문가를 만나 도움을 받으시길 부탁드립니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청소년 모바일 상담 ‘다 들어줄 개’ 어플, 카카오톡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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