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후 4개 장면으로 본 ‘한국사회가 죽음을 대하는 자세’
간호사 꿈을 이루기 위해 늦깎이로 대학에 입학한 멋진 딸이었다. 엄마보다 키가 커지자 자신이 엄마를 지켜준다던 아들이었다. 동생과 영혼을 공유한다던 언니였고 막냇동생을 아빠처럼 챙겨줬던 큰오빠이자 코로나19 선별진료소 근무를 자원한 마음 따뜻한 젊은이였다. 지난해 10월 29일 그날, 우리는 이태원 거리에서 158명의 딸·아들·언니·오빠·동생·친구·연인·동료를 영영 잃었다. 그리고 46일 뒤 또 한 명이 트라우마로 세상을 등졌다. 군중밀집 대책만 있었더라면, 119 신고 뒤 초동대처만 원활했더라면, 2차 가해가 없었더라면 지금쯤 당신 옆에서 웃고 떠들고 있을 평범한 청년들이었다.
159명이 숨지고 294명이 부상을 입은 이태원 참사가 2월 5일로 100일을 맞는다. 304명이 희생된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자고 약속했지만, 또 한 번의 대규모 인명피해 참사를 피하지 못했다.
이태원 참사의 원인은 무엇인가. 재난은 왜 또 우리를 덮쳤는가. 꼬리를 잇는 질문에 대해 시민들의 ‘말문’은 아직 트이지 않았다. 애도는 억압됐고, 반성과 성찰보다 2차 가해 확산 속도가 더 빨랐다. 총체적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은 ‘모르쇠’로 일관하더니 이제는 이 사안을 서둘러 매듭짓자고 말한다.
죽음을 대하는 자세는 곧 인간과 생명을 대하는 자세다. 159명의 청년을, 그들의 죽음을, 그들의 가족을 대하는 한국사회 태도는 어떠했을까. 참사 뒤 100일간 한국사회의 모습을 4개의 장면을 통해 들여다봤다.
장면 1: 정부의 합동분향소-국가가 정한 방식으로 슬퍼하라 이태원 참사 직후 정부는 직접 애도의 물결을 이끌고자 했다. 참사 다음 날인 10월 30일 일주일간의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했다. 31일엔 서울광장 등에 합동분향소를 차렸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부터 닷새 내내 분향소를 방문했다. 위패·영정 없이 국화꽃이 무수히 뒤덮인 제단 앞에서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공직자들이 줄줄이 고개를 숙였다.
정부 분향소에서 희생자는 ‘사망자’라 불렸다. “제단 중앙에 ‘이태원 사고 사망자’라고 쓰고, 주변을 국화꽃 등으로 장식.” 참사 이틀 뒤 행정안전부는 이런 내용의 공문을 각 시·도 지자체에 전달했다. 별도 업무연락을 통해선 ‘근조’ 글자 없는 검은 리본을 패용하라고도 했다.
정부는 “유가족 장례 지원에 총력을 다하겠다”(11월 1일 정책브리핑)고 해놓고 실제로는 분향소 설치 방식과 관련해 유족의 뜻을 묻지 않았다. “유족들에게 일일이 확인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국민이 조문을 빨리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다”(11월 8일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답변)는 이유였다. “각 부처 콜센터들을 활용해 전화했다면 한 시간도 안 걸렸을 것”(권칠승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란 탄식이 나왔다.
국가의 무성의한 태도는 유족을 절망케 했다. “국회 앞 분향소에 들러 아이를 보고자 했습니다. 그날 거기서 위패도 영정도 없는 분향소를 보게 됐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지…. 생전 처음 보는 분향소에 할 말을 잊었습니다. ‘어쩌다가 우리 아이는 기억하면 안 되는 아이가 됐는가’라는 의문과 분노가 생깁니다.”(고 박가영씨 어머니 최선미씨, 지난 1월 12일 국회 국정조사특별위원회 공청회)
유족들이 영정과 위패가 안치된 분향소를 다시 연 것은 참사 후 40여일이 지나서였다. 그동안 그들은 서로의 연락처를 수소문해야 했다. 다른 재난 때와 달리 유족 대상의 정부 브리핑이 단 한 차례도 이뤄지지 않아 이들은 한 공간에 모인 적이 없었다. ‘내 연락처를 다른 유족에게 전해달라’는 요청을 한 유족도 있었지만, 정부와 서울시는 들어주지 않았다.
“이제야 우리 아이들이 여러분을 만나뵙습니다. 얼굴 하나하나, 이름 하나하나 부르시면서 잘 가라, 수고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추모 부탁드립니다.” 분향소를 다시 연 지난해 12월 15일, 이종철 유가족협의회 대표는 이렇게 말하며 울먹였다. “처음부터 정부에서 저희 유가족들을 모아 슬픔을 국민 여러분과 나눌 수 있게 해줬다면….”
이태원 참사 뒤 석 달의 시간은 이렇게 ‘국가가 빼앗은 애도’로 시작됐다. 이 애도는 참사의 원인과 책임 나아가 죽음의 의미를 묻지 못하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이야기’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회적 비극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 것은 그 자체로 치유의 과정이고 시민들은 이때 연대와 결속을 경험한다”며 “관이 부여한 형식에 의해 그런 과정이 폐쇄됐다”고 했다. 그는 분향소에서 방명록에 세로로 자기 이름만 쓰게 하던 것을 보고 일종의 ‘심리적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각자의 감정을 담은 포스트잇이 넘쳤던 이태원역 1번 출구 거리 풍경을 떠올리면 ‘이름쓰기’가 얼마나 억압된 애도 방식인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애도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신 교수는 말했다. “분향소에 윤석열 대통령, 한덕수 국무총리, 오세훈 서울시장의 화환만 자리하고 있었고 각도까지 정확하게 조문객을 향하고 있었던 것을 잊을 수 없다. 정치권력자들이 유일하게 승인한, 그리고 그들이 지켜보는 애도 공간이었음을 상징한다.” 이태원 참사의 의미를 둘러싼 공론이 막혀 있는 지금의 상황은 어쩌면 참사 직후의 ‘애도 억압’ 때부터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장면 2: 경찰 꾸짖는 대통령-휘발된 ‘정치적 책임’ 박희영 용산구청장(구속)·이임재 전 용산경찰서장(구속), 김광호 서울경찰청장(불구속)을 비롯한 용산경찰서·용산구청·용산소방서 관계자 23명을 업무상 과실치사상 등의 혐의로 검찰 송치. 참사 사흘 뒤 꾸려진 경찰 특별수사본부가 지난 1월 14일 내놓은 수사결과다. 특수본은 이태원 참사가 ‘책임 있는 기관들의 과실이 중첩된 인재’라고 판단하고도 각 기관장인 이상민 장관, 오세훈 서울시장, 윤희근 경찰청장은 소환조사도 하지 않았다. “재난안전법상 (이들에게) 특정지역 다중운집 위험에 대한 구체적 주의의무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용산 실무진에 국한된 ‘책임묻기’는 사실 참사 직후부터 예상된 수순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7일 국가안전시스템 점검회의에서 이런 말을 했다. “엄연히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있는 사람에게 딱딱 물어야 하는 것이지, 그냥 막연하게 다 책임지라 하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사흘 뒤 대통령실 수석비서관 간담회에서도 같은 말을 반복했다. “막연하게 정부 책임이라고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과학에 기반을 둔 강제수사를 신속하게 진행해 이태원 참사의 실체적 진상을 규명하고, 그에 따른 법적 책임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대통령이 나서 참사의 책임을 ‘법적 책임’으로 쪼그라뜨린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고위공직자들은 그 어떤 참사 앞에서도 당당해질 수 있다. 법적으로 그들에겐 ‘추상적’ 책임만 있기 때문이다.
참사를 총체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대통령은 이 같은 구도에서 되레 ‘심판자’가 될 수 있었다. “책임은 있는 사람에게 딱딱 물어야 한다”는 발언을 하던 그날 대통령은 책상을 두드리며 경찰을 호되게 꾸짖었다. “왜 4시간 동안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었느냐 이거예요. 현장에 나가 있었잖아!”
참사 뒤 석 달이 지났다. 그동안 한국사회는 ‘국정 책임자’ 대통령과 주무부처 장관에게 그의 정치적 책임을 물었어야 했다. 김민하 정치평론가는 “정치적 책임이란 곧 윤리적 책임이고, 윤리란 ‘사회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 각자 어떤 일을 해야 하느냐’에 대한 합의”라면서 “윤리적 책임은 스스로가 ‘자임’하고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고 말했다.
장면 3: 공직자들의 교묘한 ‘희생자 탓’ “국민에게 슬픔을 강요하지 마라”, “남의 죽음 위에 숟가락 올려 정치선동질을 하는 사람들”, “세월호 팔아 집권한 민주당! 제도·법령 정비 안 하고 뭐했나” 이태원 참사 유족들과 시민단체가 만든 녹사평역 분향소 인근에 내걸린 현수막 문구들이다. ‘신자유연대’라는 단체는 이곳에 터를 잡고 시시때때로 유가족들에 다가가 “또 우는 소리 하느냐” 등의 막말도 서슴지 않고 있다.
‘2차 가해’는 녹사평역 광장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이태원 참사 뉴스 댓글엔 혐오성 댓글이 줄줄이 달린다. 주로 ‘놀러갔다가 겪은 일 아니냐’는 내용이다.
즉각적이고 광범위한 2차 가해는 이태원 참사의 특징이다. 과거 인터넷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음을 감안하더라도, 성수대교 붕괴(1994년)나 삼풍백화점 붕괴(1995년), 화성씨랜드 화재(1999년), 대구지하철 화재(2003년)에선 적어도 ‘희생자 탓’을 하는 발언은 공적 공간에서 터져나오지 않았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때에도 심각한 2차 가해가 있었지만, “미안합니다”라는 목소리가 한국사회를 뒤덮은 다음이었다.
이태원 참사 이후의 2차 가해는 “정부 책임을 묻는 여론이 관찰되기도 전에 먼저 나온 선제적 반응”(박상은 플랫폼C 활동가)과도 같았다. 몇몇 개인의 일탈로 보기엔 가해 논리가 똑 닮아 있다. 그 ‘논리’를 제시한 사람은 고위공직자들이었다. 이태원 참사 생존자 김초롱씨는 지난 1월 12일 국회 국정조사특별회원회 공청회에 나와 이 점을 정확하게 짚었다. “저에게 2차 가해는 장관, 총리, 국회의원들의 말이었습니다. 참사 후 행안부 장관의 첫 브리핑을 보며 처음으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예전에 비해 특별히 우려할 정도의 인파는 아니었고 경찰력을 미리 배치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저는 이 말을 ‘놀러갔다가 죽은 사람들이다’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장면 4: 또 한 명이 스러졌다 정부·여당은 희생자를 향한 내부 인사들의 막말을 방치했다. 김미나 창원시의원은 지난해 12월 “나라 구하다 죽었냐” 등의 혐오 발언을 자신의 SNS에 올렸다가 비판받자 해명 기자회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제가 공인인 줄 깜빡했네요.” 그러나 그에 대한 ‘제명 징계’는 국민의힘 시의원들에 의해 무산됐다.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해 12월 10일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가 출범하자 “세월호처럼 정쟁으로 소비되다가 시민단체의 횡령수단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 세월호와 같은 길을 가선 안 된다”고 했다. 다음날 송언석 국민의힘 의원은 국회 본회의 의사진행 발언을 통해 “참사 300m 떨어진 곳에서 시신이 있었다고 한다”며 음모론까지 펼쳤다.
참사 직후부터 계속된 2차 가해는 생존자를 벼랑 끝으로 몰아갔다. 이태원 참사 당시 인파에 깔려 있다가 구조됐던 고(故) 이재현군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다가 참사 46일째에 극단적 선택을 했다. 살릴 수 있었던 생명이 등 떠밀려 스러졌는데도 한덕수 국무총리는 “좀더 굳건하고 치료를 받겠다는 생각이 더 강했으면 좋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2차 가해로 인한 희생까지 ‘개인 탓’으로 돌리는 언급에 “몰염치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희생자와 유족을 모욕하는 정부·여당의 발언이 계속된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해 12월 27일 조수진 국민의힘 의원에게서 나온 ‘실언’은 이번 참사에 대한 정부·여당의 인식 구조를 보여준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대표에 따르면 조 의원은 이날까지 28번의 질의 기회 중 11번을 ‘신현영 닥터카 탑승’을 묻는 데 썼다. 유족들에게서 거센 항의를 받은 그는 유족을 똑바로 쳐다보다가 용 대표 옆을 지나가며 이렇게 말했다. “같은 편이네. 같은 편이야.”
이태원 참사 유족이 여당에는 ‘적’인 것일까. 오찬호 사회학 박사는 “조 의원은 정부를 위해 방어막 치는 사람을 자처하고 있다”면서 “그런 태도가 바로 악성댓글을 다는 사람들에게는 ‘신호’가 된다. ‘지금은 그러면 안 되지’ 하는 생각을 가졌다가도 ‘해도 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독립적 조사기구는 설치될 수 있을까 왜 재난은 반복되는가. 이태원 참사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참사 100일을 앞둔 지금 우리는 여전히 이 질문들의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범죄 혐의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경찰의 강제수사와 별도의 국회 국정조사가 55일간 이뤄졌지만, 이 역시 ‘구조적 원인 파악’에는 닿지 못했다. 900쪽이 넘는 국정조사 결과보고서의 결론은 요약하면 이렇다. ‘각 기관은 10만명 운집을 예상하고도 안전대책을 수립하지 않았다. 119 중복 신고가 있었으나 적절한 조치는 없었다. 참사 발생 후 대처는 유기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간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알려진 내용의 반복이다.
게다가 이 같은 내용의 보고서마저도 여야는 채택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국민의힘이 이상민 장관 사퇴 요구, 위증고발 등이 포함됐다는 이유로 채택을 반대하고 퇴장해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유족들과 시민단체는 ‘독립적 조사기구 설치’에 목소리를 모으고 있다. 야3당(더불어민주당·정의당·기본소득당)은 조사기구 설치에 관한 법적 근거를 담은 특별법을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원인조사는 경찰 특수본 수사로 충분했다’는 여당과 보수진영을 설득하는 작업이 만만찮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세월호 참사 사례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도 커다란 과제다. 조사위원회가 3번 꾸려져 7년 넘게 조사가 이어졌지만, 원인에 대한 결론을 내지 못했던 세월호 참사 이후의 과정을 지켜보며 시민들의 피로도가 높아진 점도 부인키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제대로 된 원인조사를 포기할 수는 없다. 세월호 참사 원인 규명이 왜 실패했는지를 분석한 <세월호, 우리가 묻지 못한 것>의 저자 박상은 플랫폼C 활동가는 “지금까지 우리는 ‘군중 유체화’ 현상이 있었다는 것만 알 뿐, 사망 후 시신 인도까지 10시간이나 걸린 이유 등 전후 과정을 하나의 서사로 연결하지 못한 상태”라면서 “개개인의 상황이 모두 나오지는 못하더라도 최대한 참사를 재구성해야 하고, 이와 동시에 시민이 쉽게 기억할 수 있는 합당한 ‘재난 서사’가 남겨지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