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1일 경기 수정구의 한 상점가에서 만난 배달노동자 안준우씨(47). 오전 11시쯤 되자 휴대전화가 정신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4~5개의 ‘콜’이 동시에 떴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안씨는 코로나19로 인해 업무량이 더 많아졌다고 했다. 점심시간대(오전 11~2시)의 경우 1000개 수준이었던 콜이 2000개까지 늘었다. 배달이 많을 때는 동시에 100개까지 콜이 울릴 때도 있다고 했다. 그는 하루에 12시간씩 일한다. 차들로 꽉 막힌 도로를 누비고, 정신없이 움직이는 안씨와 같은 배달노동자들은 늘 사고 위험에 노출돼 있다. 안씨는 “가을에는 낙엽, 겨울에는 빙판을 밟고 미끄러지기도 한다”면서 “어두운 주택가에서 앞을 잘 살피지 못해 넘어지는 일도 있다. 주변에서 일하는 배달노동자들이 자잘한 사고를 겪는 건 부지기수”라고 말했다.
안씨는 지난해 큰 사고를 겪었다. 오토바이를 타다 미끄러운 맨홀 뚜껑 위에서 넘어지는 사고로 갈비뼈 3개와 쇄골이 부러졌다. 6개월간 일을 쉬어야만 했고 그동안 수입은 없었다. 그는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아찔하다. 안씨는 “만약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였으면 아직도 치료비와 생활비에 허덕이고 있었을 것”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면서 “그날 이후로 산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다른 배달노동자들에게도 가입을 권유하고 있다”면서 “성남시는 보험료의 90%를 지원해주고 있기 때문에 비용에 대한 부담도 덜한 편”이라고 말했다.
병가비 지원 없었으면 아찔할 뻔
박은영씨(가명·59)는 성남 하대원동에서 9평 남짓의 작은 식당을 혼자 운영 중이다. 박씨 혼자만 일하는 외벌이 가정이라 가게 문을 잠시라도 닫는다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다. 월세와 전기세 등 매월 꼬박꼬박 나가고 있는 약 120만원의 고정비 역시 박씨가 가게 문을 닫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8년간 홀로 식당을 운영한 박씨는 지난달 교통사고를 당해 15일간 병원에 입원해야만 했다. 보험이 없는 1인 자영업자인 탓에 치료비와 생계비 부담을 오롯이 홀로 감당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성남시로부터 병가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박씨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게 빠듯한 상황인데, 성남시의 유급병가비 지원이 없었다면 입원도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성남시 지원 덕분에 무사히 치료를 마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전국 최초의 사회안전망 3종 사업
배달노동자 안씨와 자영업자 박씨는 모두 성남시 ‘노동취약계층 사회안전망 지원사업’(이하 사회안전망 구축 3종 사업)의 수혜자다. 노동취약계층을 보호하기 위해 성남시가 만든 이 지원사업은 특수고용직 산재보험료, 노동취약계층 유급병가비, 플랫폼노동자 상해보험 등 3가지다.
서울시와 경기도 등 다른 지자체에서 각각의 지원사업을 운영한 경우는 있었지만, 3가지 사업을 동시에 지원하는 경우는 성남시가 전국 최초다. 기초지자체만 놓고 보면 성남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산재보험료와 상해보험료를 지원하고 있다.
특수고용직 산재보험료 지원사업은 노동자가 부담하는 산재보험료(1인당 평균 1만940원)의 90%를 성남시가 대신 납부한다. 올해 2억3650만원의 예산이 편성됐으며, 내년에는 4억7300만원으로 확대된다. 성남시에 거주하거나 성남시내 사업장에서 근무하는 특수고용노동자를 대상으로 한다. 구체적으로는 보험설계사, 건설기계운전자, 학습지교사, 골프장 캐디, 택배원 등이 혜택을 받는다. 올해 들어 1차 지원(7월 19일~8월 13일)을 통해 136명이 혜택을 봤고, 2차 지원(10월 18일~11월 12일)에는 973명이 신청해 현재 심사를 받고 있다.
노동취약계층 유급병가 지원사업은 근로소득이나 사업소득이 있는 시민이 질병이나 부상으로 의료기관에 입원하는 경우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생계비를 준다. 성남시 생활임금을 적용해 1일 8만4000원, 연간 최대 13일 기간 내에서 생계비를 지원한다. 특수고용직, 단시간 일용직 노동자, 영세자영업자 등으로, 중위소득 120% 이하이면서 재산이 2억5700만원 이하인 성남시 거주자면 받을 수 있다. 지난 11월 25일 사업 시작 이후 현재까지 11명이 신청했으며, 현재 3명(총 243만6000원)이 지원받았다.
플랫폼노동자 상해보험 지원사업은 성남시가 보험사와 계약을 체결해 상해를 입은 플랫폼노동자에게 보험금 지급한다. 산재보험 가입률은 낮지만 교통사고와 골절상을 포함해 업무상 재해위험에 노출된 배달노동자, 퀵서비스 기사, 대리운전기사 등이 지원을 받는다. 성남시는 12월 중 보험사와 단체상해보험(연간 2억4600만원)을 계약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플랫폼노동자 5000여명이 수혜를 볼 것으로 예상된다. 상해보험 보장 범위는 상해사망·후유장애 2500만원, 정신질환 위로금 100만원, 화상진단금·수술비 20만원, 골절 진단비·수술비 15만원 등이다.
성남시는 사회안전망 구축 3종 사업 외에도 노동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지원을 확대해나갈 계획이다. 우선 내년부터 건설현장 일용노동자를 위한 ‘파상풍 예방접종’ 사업을 시행한다. 또 업무 특성상 프리랜서나 파견근로자 형태로 근무하는 사례가 많은 IT 노동자들의 어려움도 파악해 대책을 마련할 예정이다.
성남시가 이런 사업을 하게 된 배경에는 노동취약계층이 겪는 열악한 처우를 개선해보자는 뜻이 담겨 있다. 성남시가 실시한 ‘플랫폼노동자 실태조사’를 보면 이들의 경우 제도적인 공백 탓에 사회보험에 제대로 가입하지 못하거나, 사고를 당하고도 일을 계속해야 하는 등의 부당함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조사결과에서 성남지역 플랫폼노동자 규모는 1만명으로 추산된다. 배달노동자 58.4%가 사고를 경험한 적이 있었지만, 산재보험 가입률은 14.9%에 그쳤다. 보험이 없다 보니 치료비 자부담 분도 자연스럽게 많아졌다. 배달노동자 본인 치료비 부담률은 84.4%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퀵서비스 기사도 59.2%가 사고를 경험했지만, 산재보험 가입률은 20.4%였고 본인 치료비 부담률은 75.3%였다.
‘성남시 10인 미만 영세업체 노동실태조사’에서도 10인 미만 영세업체 노동자들은 산재보험 및 고용보험 등의 가입률이 낮아 산업재해로부터 취약한 상태였다. 10인 미만 영세업체 노동자 중 3년간 업무로 인해 아프거나 사고를 당한 경험은 18.4%였지만, 이들 중 치료를 위해 업무를 중단하지 못한 비율은 76.2%에 달했다. 중단하지 못한 이유로는 ‘유급병가가 없어서’(63.3%)가 가장 많았다.
사업장 규모가 작을수록 사회보험과 같은 기본적인 권리보장도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업장별 사회보험 가입률을 보면 5~9인 사업장의 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가입률은 각각 64.1%, 66.3%, 72.1%였다. 1~4인 사업장의 경우 각각 43.5%, 45.4%, 50.0%로, 모든 분야에서 약 20%포인트 떨어졌다.
모든 일이 노동이란 전제로 권익 확대
정부와 다른 지자체들은 그동안 ‘노동’ 관련 대책과 정책을 수없이 발표하고 시행해왔다. 하지만 근로기준법이 정하는 근로자에 한정되는 사례가 대부분이었다. 전통적인 사무실과 공장, 매장 등 공간과 근로 형태에 따라 지원 대상을 별도로 분류해왔다.
성남시의 정책은 이러한 기준에 해당하지 않는 ‘새로운 노동자’를 위한 것이다. 근로 공간과 시간, 형태를 떠나 ‘모든 일’이 ‘노동’이라는 전제가 바탕이 된다. 고용 여부나 직종에 상관없이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노동자로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안전망 구축 3종 사업은 코로나19 확산 이후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프리랜서와 플랫폼노동자에 대한 선제 지원의 목적도 있다. 성남시 관계자는 “현재 프리랜서와 플랫폼노동자들은 근로형태상 법적인 보호를 받기 어렵다”면서 “중앙정부의 입법 과정과 제도 시행에는 많은 절차와 시간이 소요되는데, 현장의 상황은 이를 기다릴 여유가 없다. 지자체 차원에서 우선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성남시에서 시행하는 이런 정책은 모두 ‘일하는 시민을 위한 성남시 조례’를 근거로 이뤄진다. 올해 1월 1일부터 시행된 이 조례는 전국 최초로 노동의 대상을 ‘노동관계법상 근로자’가 아닌 ‘일하는 시민’으로 확대했다. 상위법이 없고 개념 자체를 새로 정립해야 하다 보니 조례를 준비하는 데만 2년이 걸렸다. 성남시는 2018년부터 노동포럼과 전문가 포럼을 실시하는 한편 노동자를 대상으로 간담회를 통해 현장의 요구들을 담아냈으며, 연구 용역도 수차례 진행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일하는 시민’이라는 개념은 “노동관계법에 따른 근로자를 비롯해 고용상의 지위 또는 계약의 형태에 상관없이 일터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으로 정의됐다. 제조업 중심에서 디지털 중심으로 시대가 바뀌면서 새로운 형태로 일하는 노동자들이 등장하고 있으니, 단순히 고용계약의 형태로 제약을 두지 말자는 의미다.
조례로 정하는 노동자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성남시는 다양한 형태로 종사하고 있는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었다. 조례는 불공정한 계약관계 방지에 관한 내용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조례 적용 대상이 기존의 근로자에서 일하는 시민으로 확장되면서 통상적인 ‘근로계약’이 아닌 다양한 형태의 계약으로 일하는 사람들도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일하는 시민 지원기금’을 설치하고 시장이 위원장을 맡는 기금 운용 심의위원회도 두도록 했다. 코로나19와 같은 재난상황이나 급변하는 고용 노동 등 긴급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필요한 재원을 미리 마련해 신속하게 대응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성남시 관계자는 “성남시는 지난 2016년 기초지자체 중 처음으로 노동과를 신설한 이후 노동자 권익실현을 위한 다양한 노동정책을 수행하고 있다”면서 “조례 제정을 계기로 중장기 노동정책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체계적이고 폭넓은 노동정책을 수행해나가겠다”고 말했다.
성남시정에 반영된 은수미 시장의 노동관
일하는 시민을 위한 성남시 조례에는 지난 40년간 노동운동을 해온 은수미 성남시장의 노동관이 반영돼 있다. 은 시장은 1984년 서울 구로의 한 봉제공장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공장에서 미싱을 돌리다가 잠깐 졸아 바늘이 손톱을 관통하는 사고를 당했다. 하지만 당시 그에게 돌아온 건 ‘옷감에 피가 묻어 망쳤다’는 작업반장의 질책뿐이었다. 동료 노동자들을 향한 숱한 인권 유린도 지켜봐야만 했다. 그는 그렇게 인권과 노동권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은 시장은 한국노동연구원에 재직하던 2010년 이 조례의 기본 틀을 구상했다. 은 시장은 “연구원에서 일하면서 어려운 처지에 놓인 다수의 노동자를 만났고 그들의 어려움을 들어왔다”면서 “그때는 비정규직 사회안전망 구축이 핵심 쟁점이었는데, 지금의 문제도 다르지 않다. 결국은 노동자들을 어떻게 보호할지에 대해 고민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은 시장은 시장으로 당선된 이후 조례를 만들면서 시대상 변화를 어떻게 반영할지에 주력했다. ‘일하는 시민’이라는 개념은 그 과정에서 탄생했다. 그는 “제조업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세상이 바뀌었고, 이로 인해 사람이 사는 모습도 달라졌다”면서 “제조업 시대의 고용계약은 사장과 노동자 사이의 계약이었다면, 디지털 시대의 고용계약에는 플랫폼이 자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기존의 체계로는 특정하기 힘든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진 것”이라면서 “새로 등장한 이 관계를 해석하기 위해선 ‘일하는 시민’이라는 개념이 필요했다”고 덧붙였다.
은 시장은 해외 사례를 들며 한국사회가 아직까지 플랫폼노동자에 대한 문제에 소극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는 이미 ‘긱워커’라는 이름으로 플랫폼노동자에 대한 문제가 1980~1990년대에 공론화됐지만, 한국은 최근 들어서야 사회적 이슈로 부상했다”며 “한국은 아직 이들의 고용에 제도적 근거를 만드는 것에 대한 사회적 동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은 시장은 영화 <설국열차>에 등장하는 ‘꼬리칸’을 우리 사회 노동취약계층의 현실에 비유한다. 드라마 <오징어게임>은 한국사회의 단면과 비슷하다고 했다. 은 시장은 “위기상황에 놓인 시민들의 현실은 영화 속 극단적인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서 “부족하지만 노동문제에 헌신했던 사람으로서 최소한 성남에서만큼은 ‘일하는 시민’들이 소외받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아동수당의 사례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돼 국가 정책으로 반영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노동자의 권익 확대를 위한 지자체의 역할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은 시장은 “노동자의 권익 보호를 위해 사업자에게 의무를 강제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누가 사업자인지 경계 자체도 모호해지고 있는 상황”이라며 “지자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직접 하면 된다. 사업자하고는 소통하고 문제 해결에는 지자체가 직접 개입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매년 산재로 2000여명이 목숨을 잃고 있는데 모든 관리·감독을 고용노동부에서 홀로 감당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은 시장은 산업재해 문제를 예로 들며 노동문제에 대한 지자체의 관리·감독 권한을 확대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권한을 나누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위탁하고 협업하자는 것인데 사실 잘 이뤄지지 않아 안타깝다”며 “지휘관리는 정부가 하되 노동현장을 잘 아는 지자체에 사무를 위탁하면 지금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희 전국사회부 기자 kth08@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