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나라 곳간만 꽉 차면 뭐하노, 일터 돌아가는 꼬라지가 이 모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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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터 한가득 구직사이트 창을 띄워놓다 보면 머리엔 안개가 끼고 가슴엔 가뭄이 온다. 그대로 몇시간 지나면 억울함의 파도가 몰려온다. 내가 무슨 대기업만 노리는 것도 아닌데, 알짜배기 중견기업 찾느라 눈알 굴리는 것도 아닌데, 그저 다달이 200만원 월급에 8시간 일하면 충분한데, 그조차 왜 이리도 힘겨울까. 하루 취업농사를 말아먹고 침대에 누워보면 또 한 번 한숨이 나왔다. 남들이 꺼리는 직종의 경력직인 나조차 이리 악전고투하는 마당에 다른 친구들은 어떤 가시밭길을 걷고 있는 걸까.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끝끝내 구원의 동아줄을 던져준 곳은 워크넷도, 사람인도 잡코리아도 아니었다. SnT 시절 날 좋게 봐줬던 파트장님의 문자였다. 원래 하던 일이라 적응 잘할 테니 면접 한번 보라고 했다. 경남 창원시 팔용동에 있는 직원 열여덟 남짓의 작은 정밀공업회사였다. 현장엔 중공업에서 퇴직한 40대 후반부터 60세까지의 ‘형님’들과 2030 외국인 노동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면접관이었던 이사님은 ‘요즘 젊은것들’을 대단히 불신하는 분이셨다. 중소기업답지 않게 질의응답부터 기량 테스트까지 꼼꼼하게 받고 일주일 기다려서야 합격 전화를 받았다.

2018년 8월. 입사 첫날부터 거하게 뒤통수를 맞았다. 로템 하청에서 한달 일한 내역 때문에 내일채움공제에 가입이 되지 않았다. 목돈 만들 기회가 처음부터 날아간 셈이었다. 그날 점심시간 내도록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빚진 것도 서러운데 허무하게 목돈 만들 기회까지 날아가다니! 이 허술한 제도는 2019년 와서 ‘3개월 이하 고용보험 가입 이력은 최종 상실일에서 제외’하기로 개정됐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뒤였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꽃밭

석연찮은 시작과는 달리 회사생활은 의외로 순탄했다. 가끔 생기는 잔업은 이주노동자들이 도맡았고, 월급도 세후 200만원은 꼬박꼬박 들어왔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묵묵히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중소기업답게 한 공정만 잡고 일할 순 없었지만, 주 업무가 2년 동안 줄곧 해왔던 용접이라 일 못 한다고 욕먹을 일이 없었다. 오히려 너무 빨리 때우는 바람에 앞뒤 공정에서 한소리 들을 정도였다. 대부분 SnT 퇴직자 출신인 형님들은 느긋했다. 이미 똘똘한 집 한채 있고, 자식들은 대학 다 보내놨겠다, 일하기 싫으면 언제든 용접기 던지고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하나같이 ‘빠꼼’이들이라 실수도 거의 없다 보니 2년 내내 싫은 소리 주고받는 일이 없었다.

이주노동자들은 국적이 전부 달랐는데, 인상 깊이 보았던 2명은 몽골에서 온 샤크나와 베트남 출신 펑이었다. 마흔이 얼마 남지 않았던 샤크나는 한국이 마음에 들어 아예 자리 잡은 경우였다. 점심으로 나오는 비빔밥에 된장까지 먹는가 하면, 삼겹살 불판에 김치와 콩나물 없으면 제일 먼저 “이모!”를 외치곤 했다. 일도 잘하고 입만 열면 웃겨서 누구에게나 사랑받았다. 당시 서른두 살인 펑은 샤크나와 정반대였다. 가족을 만나기 위해 휴가 때도 비행깃값 다 털어 베트남으로 가곤 했다. 입이 짧아 자주 밥을 거르고, 말수 또한 적었지만 성실함 하나로 사회에 적응했다. 잔업특근 1순위에 온갖 궂은일도 군소리 한마디 없이 해냈다. 이사님은 늘 펑이 귀국할까 노심초사하곤 했다.

그럭저럭 다닐 만한 직장을 잡고 나니 일상이 제대로 정립됐다. 곰처럼 하루종일 용접만 할 땐 이어폰 끼고 팟캐스트를 들었다. 연휴는 카페에서 독서를 하고 생각을 정리해 글로 옮겼다. 가장 큰 변화는 제대로 운동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내 바로 앞 라인의 이집트 노동자 미나는 팔 둘레가 내 두 배인 헬스 중독자였다. 한 번은 벤치에서 팔굽혀펴기하는 내 모습을 보더니, 그날부터 만날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자고 졸라 시작하게 됐는데 의외로 체질에 맞았다. 하루하루 들어 올리는 무게가 늘어나는 재미에 푹 빠져 스쾃 하는 날만 기다리곤 했다. 반년 동안 만족스럽진 않아도 꽤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꽃밭이어서,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다 보면 막연하게 행복을 거머쥘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누가 이런 현실을 알아줄까

현실을 깨닫는 첫걸음은 늘 비일상에서 시작하게 마련이다. 아직 한기가 남은 봄바람이 부는 날, 쉬는 시간을 맞아 커피믹스를 탄 종이컵을 들고 벤치로 향하고 있었다. 넓게 트인 공장문 맞은바라기에 크레인 리모컨을 든 과장님이 보였다. 원룸 크기만 한 거대한 철판을 크레인으로 옮기면 플라스마 절단기가 자동으로 절단해주는 공정이었다. 쉬는 시간 동안 기계가 움직이도록 세팅해놓을 생각이셨다. “과장님 쉬었다가 하시죠”, “어, 이거만 마저 하고 간다” 짧은 대화와 함께 고개를 들자, 심상찮은 풍경이 보였다. 일직선이어야 할 철판이 대각선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아뿔싸, 저대로 가면 큰일 나겠다 싶었던 순간, 사고는 벌어지고 있었다. 철판을 지탱하던 훅이 빠져나가면서 그대로 지면으로 낙하했다.

찰나 동안 과장님은 용케 몸을 피했지만, 철판의 면적이 너무 넓었다. 10t짜리 중량이 뒷다리를 덮쳤고 사방에 피가 튀었다. 비명이 공장 전체에 메아리쳤다. 온몸이 순간 저릿하더니 힘이 풀려선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그 와중에도 이사님은 침착하게 철판을 크레인으로 끌어올렸고, 부장님은 119에 연락하고선 얼음주머니를 날랐다. 곧 도착한 사장님은 줄담배를 피우며 어딘가 분주하게 통화를 했다. 그 풍경은 마치 찰리 채플린 영화처럼 무성과 흑백으로 기억 속에 남았다.

이내 임원들이 모두 구급차를 타고 떠나고 현장 직원만 남아 둥그렇게 모여 앉았다. 나는 횡설수설 상황을 설명했고, 모두가 착잡한 표정으로 대답을 갈음했다. 현장에 있던 형님 한 분은 걸진 욕설과 함께 혀를 차더니, “나라 곳간만 꽉 차면 뭐하노? 일터 돌아가는 꼬라지가 이 모양인데.”

모두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직원들 대다수가 점심시간에 조퇴를 신청했다. 끝까지 남아서 일했던 나는 저녁 내내 환청이 달팽이관을 두들겨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얼마 못 가 또 옆 공정의 형님이 하우징을 조이다가 손가락이 부러졌다. 형님은 조용히 유급 휴가를 갔고, 순식간에 2명이 빠져나간 현장엔 휘휘함이 감돌았다. 그때부터 나 또한 언제든 다칠 수 있단 생각이 들었고, 온갖 나쁜 미래상이 그려졌다. 일상이 무너진 현실을 상상하는 동안 무기력감에 몸부림쳤다. 누가 중소기업의 이런 현실을 알아줄까? 기자? 정치가? 금속노조? 진보 지식인? 아니다. 당사자의 목소리가 없는 공론은 허상일 뿐이다. 그날부터 현장의 모습을 촘촘하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세상에 알릴 수 있도록.

<천현우 용접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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