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줍깅’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회의적이었음을 고백한다. 조깅하면서 쓰레기를 치운다고? 그거 ‘쓰레기 줍기’네. 학교에서 시켜서 집게를 들고 황량한 공원을 누벼야 했던 학창 시절이 제일 먼저 떠오르고, 다음으론 더운 날이든 추운 날이든 노란 조끼를 입고 골목에 모여 다니던 구청 일자리 사업 참여 어르신들 생각이 났다. 길가에 떨어진 자잘한 쓰레기를 줍는 일이란 ‘잉여 인력’에나 배분하는 것 아니던가? 봉사시간이나 수당 같은 알량한 보상을 내밀면서.
사는 일이란 나의 틀림을 인정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최근 저런 생각을 크게 고쳐먹었다. 벨기에 출신 방송인 줄리안이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을 봤을 때, 그의 손에 들린 게 뭔가 싶어 한참을 들여다봤다. ‘슬기뷔통 매고 한컷.’ 편한 운동복 차림으로 한강변 산책로에서 선 그는 무슨 가방 같은 것을 들고 있는데,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유리병 따위를 감싸는 스티로폼 포장재 같았다. 최근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는 데 주력하는 그가 잔디밭에 버려진 쓰레기를 들고 그게 명품 가방인 척 농담을 던진 것이었다.
저런 모습을 언제 보았더라? 내가 ‘쓰레기 줍기’라는 이름에 가두지 않았던 장면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아버지가 허리를 숙여 뭔가를 줍는 장면, 주운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모습. 그러니까, 과거 어느 시점엔 저렇게 했다. 생활반경의 쓰레기를 직접 치우는 일 말이다.
동네에 아파트와 마트가 우후죽순 들어서던 초등학교 시절 이런 농담이 유행했다. “나는 쓰레기 그냥 길에 버려. 안 그럼 청소부가 할 일이 없거든.” 썩은 농담이라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니 삶이 그렇게 됐다. 생활을 잘게 쪼개 외주화하면서 공동체 일원의 의무는 거의 잊었다.
정신이 번쩍 든 순간은 어느 날 밤늦게 집 앞에 나갔다가 자정이 되도록 퇴근 못 하는 옆 동 경비원을 본 때다. 컴컴한 분리수거장 앞에서 주민들이 대충 던져놓고 간 종이상자를 하나하나 뜯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재활용 수거 차량이 올 예정이었다. 종이상자를 던지고 간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할까? 상자 뜯기 항목엔 돈을 낸 적도 없으면서, 아파트 관리비로 ‘퉁쳤다’고 여길 것이다. ‘이 풍요로운 시대에, 지옥은 이런 모습으로 오는구나.’
‘지구를 뒤덮은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 눈에 보이는 것부터 치우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다시 보게 됐다. 누군가 그 앞에서 ‘그런다고 될 게 아니다’, ‘개인에게 죄책감을 준다’, ‘기업을 압박해야 한다’, ‘정부가 나서야 한다’, ‘정치로 해결해야 한다’ 하겠지만, 사실 그 얘길 하는 동안 눈앞의 쓰레기는 본체만체하지 않았나? 줍는 건 내 일이 아니니까. 그러면 청소노동자는 할 일이 없으니까.
책임을 미루고 냉소하는 동안에 ‘이건 내 일이니 내가 해야 해’라고 나서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멸망’을 논할 만큼 시급한 문제 앞에 정치가 이토록 무능한 때 누가 시키지 않아도, 돈을 주지 않아도, 일단 자기 삶부터 바꾸고 나선 것이다. 길에 떨어진 마스크를 쓰레기통에 주워 넣을 줄 알게 된 게 요즘 내 생활에서의 가장 큰 변화다.
<최미랑 뉴콘텐츠팀 기자 rang@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