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혈병에 걸린 아내를 둔 남편을 가족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보는 사람도 있다. 비련의 남주인공 같고 풍파가 몰아치는 인생을 겪는 사람이 된다. 위로에 인색한 사람들조차 어디에선가 소식을 듣고 전화를 하거나 보자고 한다. 그렇게 만난 사람들과 나눈 대화 중에 매번 나누는 게 보험이다. “보험은 들었냐”, “있다니 다행이다”, “나도 들어야 하는데” 그중 반골기질이 있는 한 친구는 암보험을 도박이라고 말했다. 사람이 암에 걸릴지를 두고 확률게임을 하는 거란다. “사람의 불안을 이용해 현재를 저당잡는 거라고 본다. 20년 납입할 그 돈을 차라리 다달이 모아서 활용하는 게 기회비용으로 볼 때 더 좋다.” 적어도 확률게임은 틀린 말은 아니다. 젊은 사람이 같은 보장을 받더라도 보험금을 노인들보다 적게 내는 건 결국 암에 걸릴 확률이 낮아서니까. 아마 과거의 나라면 저 말에 나름 일리가 있다고 말해줬을 거다.
“치료에만 전념하자”는 말의 진정한 의미
무병장수가 가장 좋지만 삶의 불행은 경고 없이 날아온다. 내가 아는 범위에서 아내가 든 보험은 실비보험뿐이었다. 기나긴 치료의 여정을 시작할 때 “돈 걱정 말고 치료만 열심히 하자”고 말했다. 보호자의 단골 멘트다. 무조건 살려야 한다는 마음이 가득하니 당연했다. 이런 보호자보다 의외로 환자가 보수적으로 접근하는 경우를 더러 봤다. 옆 병실 환자와 보호자가 대기실에서 나누는 대화는 항암치료에 관해서였다. 아마 주치의가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약과 비급여인 약 중 어떤 걸 하는 게 좋을지 의논해보라고 한 모양이었다. 보호자인 아내는 비급여를 강하게 주장했다. 비급여 약이 좀 더 새로운 약일 경우가 많고 부작용도 적다니까 더 효과적이라고 믿어서다. 반면 환자인 남편은 그냥 급여약으로 하자고 했다. 아마도 속으로 이런저런 셈을 하고 난 뒤에 내린 결론일 거다. 그런 환자의 고집을 보호자는 답답해하는 눈치였다.
자신의 치료가 언제 끝날지 안다면 이래저래 예산도 짜고 시간표도 짜면서 계획적으로 대처할 수 있겠지만 암이란 건 그렇게 계산 가능한 녀석이 아니다. 약이 안 들으면 더 비싼 약을 써서 치료 플랜을 바꿔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합병증이나 전이 등이 생기면 필요한 시간도, 인내심도, 비용도 더 들어간다. 퇴원 후 사회에 바로 복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런 행운아가 될 거라는 보장이 없다. 상당수는 쉬면서 몸을 추슬러야 하고 이전과 같은 평범했던 컨디션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의심해야 한다. 이런 불확실성을 가장 절박하게 느끼는 사람은 환자 본인이고, 그래서 스스로 보수적으로 변하는 듯했다. 대화를 하던 옆 병실 환자 일행도 그랬고, 나와 아내의 경우도 그랬다.
몸의 항암만큼 중요한 게 마음의 항암이다. 치료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하는 건 보호자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다. 배려와 이해, 격려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돈 문제로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 건 누구나 할 수 없다. 암이라는 건 돈 잡아먹는 괴물이란 걸 누구나 안다. 현실 속에서 각종 대비를 해두려는 사람들에게 보험이 주는 건 마음의 평화다. 아내에게는 우리 부부가 모르는 보험이 두 개 더 있었다. 장모님의 선견지명이 빛을 발한 순간이다. 딸자식이 어릴 때 넣어둔 보장성 보험들이었는데, 보장범위는 넓지 않았지만 둘 다 암보험이었고, 조혈모세포이식 지원도 포함한 게 신의 한 수였다. 보험이 없다고 해결 못 할 것까진 없었다. 모아놓은 여윳돈도 있었고, 무조건 낫기만 하라며 지원을 약속한 부모님도 우군으로 버티고 계셨다. 그래도 새롭게 알게 된 보험의 존재는 “치료에만 전념해”라고 말해도 당당할 만큼 든든한 존재가 됐다.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기에 필요한 보험
건강보험이 잘 구비돼 있는 나라인데 굳이 암보험까지 들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미리 경험한 가족의 입장에서 가입하라고 권하고 싶다. 물론 암에 걸리지 않을 확률이 걸릴 확률보다는 높다. 멀쩡하게 생을 마감한다면 그간 낸 보험료는 버리는 돈일 거다. 그런데 그 낮은 확률은 점점 높아지고 있고, 당첨됐을 때 공적 보험만으로 커버 안 되는 구멍들이 크다. 좀 더 좋을 거 같은 약은 보통 보험 적용이 안 될 때가 많다. 좀 더 부작용이 작은 약도 그랬다. 5% 산정특례까지 적용받은 우리 역시 비급여 약들이 추가되면서 약 3000만원이 넘는 치료비가 들었다. 치료 방법을 부담 없이 선택할 수 있다는 안도감을 원한다면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암보험을 드는 게 좋다. 보장은 각자 선택에 따라 다르겠지만 진단비를 높이는 것만큼은 권하고 싶다. 여러 변수를 대비하는 좋은 방법이다. 비급여 약을 선택할 때 치료비로 쓸 수 있고, 가장이 아플 경우 나머지 가족들의 생활비로도 쓸 수 있다. 가뭄의 단비 같은 여윳돈이다.
“수술 잘 됐습니다” 가족들이 기뻐할 만한 이 한마디로 암은 끝나지 않는다. 마치 만성질환 같다. 한 번의 이벤트 같은 수술이나 시술이면 차라리 얼마나 좋을까. 종양을 없애거나 혈액 속 블라스트를 제거하더라도 어딘가 남아 있는 암세포를 마저 죽이기 위해 멀쩡한 부분들도 죽여야 하고, 그 덕에 얻은 후유증이 고통을 주고, 이렇게 버텨내더라도 재발의 두려움을 안고 사는 건 고형암이나 혈액암 환자 모두 겪는 공포다. 긴 고난의 터널을 지나다 보면 암보험이 커버하지 못하는 영역들이 발생하고 그래서 실비보험이 필수적이다.
만약 든다면 평판은 꼭 따져보라고 권하고 싶다. 다행히 우린 별문제 없었다. 보험비 청구를 위해 전화를 해서 “급성골수성백혈병이다”고 말하면 오히려 고객센터 직원이 걱정어린 목소리로 대답했으니까. 하지만 적지 않은 환자들이 보험금 지급을 두고 티격태격하는 것 같다. 보험사가 처음 암보험을 설계했을 때는 아마 몰랐을 거다. 이렇게나 암에 걸린 사람이 많아지고, 게다가 생존하는 사람들도 많아질 거라는 사실을. 그러다 보니 보험금 받을 환자들이 많아졌고 지급여력을 갖춰야 하다 보니 과거보다 지급도 깐깐해지고 보험료는 높아졌다. 지급을 거부하거나 일부분만 줘서 환자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일도 적지 않게 일어난다. 조금만 찾아보면 어떤 보험사를 선택하는 게 스트레스를 덜 받을 수 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주식에서만 헤지(가격변동의 위험을 분산하는 방법)가 있는 게 아니다. 약간의 비용을 내면서 우리 삶에서 가장 큰 리스크를 헤지하는 건 나름 그만한 가치가 있다.
<제이든 칼럼니스트·전 기자(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