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애경, ‘배상’ 아닌 ‘피해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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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메이트 제조·판매 둘러싼 형사재판에서 법적인 책임 피하려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이 가습기 살균제 ‘가습기메이트’ 단독 사용으로 인한 폐 질환 피해자 11명 전원과 ‘피해지원’에 합의한 사실이 확인됐다. 흡입 독성이 있는 가습기메이트는 SK케미칼이 제조하고 애경산업이 제조·판매에 관여했다.

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 회원들이 지난 2018년 6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 회원들이 지난 2018년 6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은 옥시가 피해자와 합의한 액수·조건과 거의 유사한 수준에서 피해지원액을 책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옥시는 흡입 독성이 있는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을 넣은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판매했다. 옥시가 지급한 피해자 1인당 평균 합의액은 7억1000만원이다. 사망자는 9억9000만원, 상해를 입은 피해자는 5억2000만원이다. 상해를 입은 피해자는 추가 치료비 발생 시 옥시 측에 청구할 수 있다.

기업 측은 실리 챙기려 ‘피해지원’?

피해지원금은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이 2 대 1 비율로 분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 측 합의는 삼성전자와 삼성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사이 중재를 맡았던 법무법인 지평이 담당했다.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은 재판에서 가습기메이트와 사상자 발생의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두 기업은 형사재판에서 가습기 살균제에 흡입 독성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SK케미칼은 옥시의 가습기 원료였던 PHMG 제조사였지만, 여전히 재판에서 “PHMG가 가습기 살균제에 쓰일 줄 몰랐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원료 제작만 해줬을 뿐이어서 법적 책임이 없다는 취지다. 이 때문에 SK케미칼·애경산업은 법적인 제조·판매 책임을 전제한 ‘배상’을 피한 것으로 보인다. 가습기메이트 제조·판매를 둘러싼 형사재판이 진행 중이기에 법적인 책임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대신 SK케미칼·애경산업은 ‘피해지원’을 택해 실리를 챙겼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피해지원이라는 모호한 용어로 법적 책임은 비껴간 이례적인 합의”라고 했다. 그는 “향후 형사재판에서 불리해졌을 때 피해지원을 한 사실을 양형 사유에 반영하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피해자 지원을 하려 노력했다는 점을 강조하면 재판부가 감형 사유로 참작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취재를 종합하면, SK케미칼·애경산업은 합의 과정에서 ‘합의’라는 말을 언급하는 것 자체를 극도로 꺼렸다고 한다. ‘형사 책임 인정’으로 해석될 여지를 최소화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는 게 법조계의 시각이다.

형사 재판과정에서 피해자들의 공개적인 문제 제기가 껄끄러워 서둘러 피해지원 합의를 했다는 견해도 있다. 검찰이 2019년 7월 가습기 살균제 수사를 마무리한 뒤 열린 주요 재판을 가습기메이트 피해자들이 참관했다. 일부 피해자는 재판 때마다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피해자들의 언론 인터뷰와 기자회견도 이어졌다. 가습기메이트 피해자 가족들은 합의 과정에서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측에 언론 인터뷰를 비롯한 공개적 의견 표명 자제 등을 직·간접적으로 요청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이 배상 대신 피해지원 방식을 고집하면서 세금 문제가 발생할 여지도 남아 있다. 기업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에게 지급하는 배상금에는 세금이 붙지 않는다. 다만 피해지원금은 기타소득으로 분류돼 과세당국이 별도 세금을 매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이 폐 손상 피해자 11명으로 피해지원 대상을 제한한 것도 논란이 됐다. 정부 통계를 보면 가습기메이트 단독 사용자 중 천식 환자 28명은 정부 지원금 대상으로 인정받았다.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은 천식 환자를 모두 피해지원 대상에서 제외했다. 정부가 피해인정을 했더라도 폐 손상 외 질환은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책임지지 않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기업들은 피해지원 합의에 대해 구체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SK케미칼 측은 피해지원 합의 과정을 설명해달라는 요청에 별도의 답변을 하지 않았다. 애경산업 측은 “지금은 (피해지원과 관련해) 드릴 말씀과 입장이 없다”고 밝혔다.

배상 적용 질병 확대되나

천식처럼 폐 손상 이외 가습기 살균제 피해 범위를 확장하는 문제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정부가 인정하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 범위가 넓어져야 기업들이 책임져야 할 배·보상 규모도 확대될 가능성이 열린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인정이 안 된 대표 사례가 피부질환이다. 가습기메이트 사용으로 피부질환을 주장하는 피해자는 있지만, 아직 정부는 공식 피해인정을 하지 않았다.

<주간경향>이 최근 입수한 논문 <클로로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MIT)의 건강 영향에 대한 고찰, 가습기 살균제 폐 손상을 중심으로>를 보면 공기 중에서 CMIT/MIT에 노출돼 피부질환을 앓는 해외 사례가 소개됐다. CMIT/MIT는 가습기메이트 원료다. 이 논문은 6월 말 발간되는 한국환경보건학회지에 실린다.

논문에 따르면 유럽에서는 CMIT/MIT 사용으로 인한 알레르기 접촉성 피부질환 유병률을 약 3~8% 정도로 본다. 논문에는 수용성 페인트가 칠해진 벽에서 증발한 CMIT/MIT가 피부에 흡수돼 전신 알레르기 습진, 천식 반응까지 유발한 해외 사례가 나와 있다. 논문은 냉각탑 관리자, 초음파 겔을 사용하는 간호사 등 직업적으로 CMIT/MIT에 노출돼 피부질환을 앓은 사례도 소개했다. CMIT/MIT 제조 공정에서 호흡기 노출로 인해 기침·천명 등 증상이 나타난 천식 환자 2명도 유럽에서 발견됐다.

논문에는 가습기메이트 제품별 농도가 크게 차이나게 제조된 정황도 담겼다. 연구진이 가습기메이트 제품 33개를 비교한 결과를 보면 제품별 CMIT/MIT의 농도 범위는 4.5~263.7ppm이었다. 제품별로 농도 차이가 최대 58.6배까지 발생했다는 의미다. CMIT/MIT의 공기 중 증발 가능성 등을 고려하더라도 제품별 농도 차이가 컸다.

가습기 살균제의 CMIT/MIT 농도는 짙어질수록 인체에 유해하다. 검찰 수사결과를 보면 1994년 9월 가습기메이트 개발 담당 유공 소속 연구원은 제품의 CMIT/MIT 농도 설정 시 인체 안전계수를 고려하지 않았다며 우려를 제기했다. 유공은 SK케미칼 전신이다.

<김원진 기자 one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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