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사람답게 사는 것을 ‘웰빙(Well Being)’, 사람답게 죽는 것은 ‘웰다잉(Well Dying)’이라고 한다. 보통 20세까지는 신체적으로 성장 단계, 이후는 나이를 먹는 완숙·퇴행 기간, 다시 말해 ‘웰에이징(Well Aging)’ 기간으로 본다. 한 노인 심리학자는 “인생의 4분의 1은 성장 기간이고, 나머지 4분의 3은 늙는 기간”이라고 했을 정도다. 태어나고 성장해 사회에 나설 때까지를 인생의 제1기(20대까지), 사회인으로서 일하며 자녀를 키우는 시기를 인생의 제2기(50대까지)로 보고, 60대 이상을 인생의 제3기, 웰에이징 시기로 표현한다.
보통 이 기간을 남은 인생이라는 의미인 ‘여생’이라 불렀지만, 요즘은 ‘액티브 시니어’라는 말이 낯설지 않고 관련 산업도 번창하고 있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민간기업에서 웰에이징을 위해 다양한 자기계발, 자기실현 프로그램을 실시하지만 똑 부러지는 성과를 내는 것은 별로 없다. 그나마 많은 사람이 자연과 더불어 사는 귀촌·귀농을 선망하지만 선뜻 용단을 내리기 어렵다. 막대한 자금이 들고, 연고가 없는 곳에서, 농사도 지어보지 않은 사람이 살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공무원연금공단에서 운영해 인기를 끌고 있는 ‘은퇴자 공동체마을’은 일반 국민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남준 공무원연금공단 이사장(64)을 2월 21일 서울 강남구 상록회관에서 만났다.
경쟁률 높은 ‘은퇴자 공동체마을’
-연금공단의 ‘은퇴자 공동체마을’에 들어가기 위해 20 대 1이 넘는 경쟁률을 뚫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다. 얼마 전 KBS 다큐를 보니 공동체마을 참여자들이 매우 만족하는 분위기더라. 이 제도를 도입한 계기는 뭔가?
“나 자신이 이사장에 부임하기 전 9년 동안 은퇴자 생활을 했다. 그때 주변의 많은 사람이 귀촌·귀농을 생각하지만 결심하지 못하는 것을 봤다. 부동산 구입에 상당액을 투자해야 하고,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곳에서 살 수 있겠느냐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래서 ‘잠시 살아보기’가 좋다는 생각을 했다. 이사장으로 와서 2018년 농촌 유휴자원을 활용해 귀촌·귀농을 체험하는 계획을 2019년 업무계획에 넣었다. 널려 있는 자원을 공유하는 ‘웰셰어’, 공유복지 개념이다. 전국 빈집조사를 하고 우선 제주 모슬포에 있는 폐교를 개조해 은퇴자 공동체마을을 시범 실시해 봤다. 16~18명이 같이 살면서 마을 청년회장 등 조직과 연계해 지역 일손돕기로 작은 용돈도 번다. 지역 보건지소가 1주일에 한 번씩 건강체크도 해주고, 지역 문화센터에서 같이 어울리는 등 성과가 좋았다.”
-현재 은퇴자 공동체마을은 어느 정도 확대됐나.
“이미 2018년 경북 문경, 충북 제천, 강원 홍천, 전남 구례 등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2019년에는 전남 신안, 경남 거창 등 9개 시군 13개 마을로 확대했다. 금년에는 15개 시군, 20개 마을(제주 강정·하원, 강원 영월·홍천, 충북 제천, 경북 문경·영천, 경남 거창, 충남 예산, 전북 고창, 전남 신안·여수·구례)에서 실시할 예정이다. 341명 정도가 정원인데 제주 강정의 경우 경쟁률이 23.4 대 1에 이르고 있다. 올해 공단에 아예 공유복지실을 만들었다.”
-이 제도가 성공할 수 있던 것은 ‘두세 달 한 번 살아보기’라는 부담 없는 매력 때문인 것 같다. 농림부·자치단체 등 귀농·귀촌 프로그램이 많지만 성과를 내지 못하는 이유도 그 때문 아닐까.
“귀농자 중심의 직업교육과 지원에 치중하면 지역사회 공동체와 소통할 기회가 없다. 귀농교육이 수익창출을 위한 하드웨어적 지원이라면 우리는 아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사람은 농사를 잘 못 짓는다. 우리는 간단한 농업기술을 배우면서 지역사회에 어울릴 수 있는 관계 형성 프로그램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제도를 시행하면서 귀농·귀촌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요소는 뭔가.
“어울림이 굉장히 중요하다. 베이비붐 세대는 농촌 출신이 많아 귀향본능이 있다. 그러나 혼자 농촌에 가는 것에 대한 고립감 내지 두려움이 크다. 그래서 우리는 지역공동체와 잘 어울리라고 마을잔치 정도를 주선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공무원 출신이라 갈등을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귀촌자 중에는 손녀를 데리고 간 사람도 있다. 너무 잘 어울린다.”
우리나라 노인빈곤율 세계 1위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초고령사회에 진입하고 있다. 34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7% 이상을 차지하는 고령사회로 진입하는 속도가 1위다. 하지만 중위소득(2020년 현재 연간 170여만원)의 절반도 안 되는 수입으로 사는 노인빈곤율 역시 세계 1위다. 노인 두 명 중 한 명은 빈곤에 시달린다. 결국 노인자살률도 압도적 1위로 나타나고 있다. 언론에는 연일 ‘요양병원 비리’는 물론 ‘고독사’, 심지어 ‘간병살인’ 등 암울한 소식이 장식한다. 앞으로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한 사회문제가 될 것이다.
특히 이 문제는 한정된 자원으로 ‘늙은 세대’를 돌봐야 하는 점에서 ‘세대갈등’의 주요 쟁점으로 대두되고 있다. 이미 사회보장의 역사가 긴 유럽은 연금문제가 주요 정치 쟁점으로 등장한 지 오래다. 아마 빠른 초고령사회 진입, 노인빈곤·자살률 세계 1위인 우리에게 웰에이징 문제는 안보(국방), 환경(기후변화), 교육문제보다 훨씬 현실적인 문제로 우리 앞에 닥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정된 자원으로 최선의 웰에이징을 만드는 것은 ‘미래지향적 시도’다.
요즘 우리는 자동차는 물론 옷(패션)·사무실 등 온통 ‘공유경제’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귀농·귀향(휴양시설)을 함께 쓰는 ‘공유복지’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 ‘농촌 빈집을 활용한 은퇴자 귀농·귀촌 지원-100세 시대 새로운 복지모델 제시’ 사업이 2019년 정부혁신 우수사례 경진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실제 이 사업이 총리상을 받은 데는 유휴자원(폐교·빈집 등)을 활용해 도시와 농촌의 상생을 도모하고 은퇴자들의 행복한 노후를 실현하는 복지모델을 제시한 점이 높이 평가됐다고 한다.
공무원연금 대상자는 많은 연금과 다양한 레저·복지 혜택 등으로 일반 국민에 비해 높은 수준의 웰에이징을 누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보통 국민은 이를 부러워하거나 비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 국민 복지의 선도적 모델을 시험해보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도 있다.
은퇴자 공동체마을은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다. 정 이사장은 “이 사업은 최소한 가재도구로 생활하는 ‘미니멀라이프’도 실천하고 있다”면서 “방 한 칸에 샤워부스·화장실·소형냉장고·가스레인지 등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 가재도구만 비치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니멀라이프답게 방값도 싸다. 무료도 있고 보통 월세가 15만~20만원 선이다. 제주만 35만원을 받고 있다. 여기서 한 달 생활비는 70만~80만원 정도밖에 안 든다. 물론 같이 어울려 골프도 치고, 술도 마실 수 있다.
현재 이 은퇴자 공동체마을에 지원할 수 있는 대상은 공무원·군인·사학연금 수급자 등 71만 명이 대상이다. 하지만 대상을 일반인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정 이사장은 “다양한 직업 출신자들이 같이 체험하는 차원에서 올 5월 모집(9월부터 시행)부터 정원의 10~15% 정도를 일반 국민에게 할애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 이사장은 공무원연금공단이 계획하고 있는 ‘공유복지’의 큰 그림을 이렇게 말했다.
행정고시 출신 행안부 2차관 지내
“첫 번째가 이 은퇴자 공동체마을이다. 두 번째는 우리 공단이 가진 골프장과 리조트도 같이 활용하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전국 공공기관이 소유한 연수·휴양시설을 모두 네트워크화하는 것이다. 국가 예산이 투입된 공공시설, 이를테면 산림청 휴양시설, 교육부·우정사업본부·농협·KT 연수시설이 많다. 이런 시설은 한 철 사람이 몰리지만 평소에 그대로 놀린다. 1년 이용률이 60일도 안 된다. 이런 시설을 네트워크화해 공동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마지막 네 번째 단계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 등과 연계해 은퇴자와 청년을 멘토와 멘티로 연결해 해외 진출까지 하는 것이다.”
매우 야심 찬 계획이지만 어려움도 있다. 그는 “대통령도 여러 차례 말씀했듯이 휴양시설 공유는 현 정부의 방침으로 장관·청장 등 관리자들은 수용하는데, 노조나 현장 시설 관리인이 업무 과다를 이유로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고 토로했다. 다행히 인근 펜션 업자들의 반대는 거의 없다고 한다. 또 다른 애로사항은 사람이 몰리면서 해당 지역 자치단체장은 귀촌자의 주민등록 이전을 서두른다. 주민등록 인구 한 사람 늘면 그만큼 중앙정부가 지원하는 교부금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는 “서두른다고 해당 지역에 귀촌·귀농하지 않는다”면서 “해당 지역에서 소비하고, 생산된 농산물을 친척과 주변에 보내주는 것만 해도 지역경제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 이사장은 1956년 광주광역시 출신으로 광주서중·일고를 나왔다. 한양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79년 제23회 행정고시에 합격, 총무처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미국 남가주대(USC)에서 행정학 석사·박사 학위도 받았다. 김대중 정부 때 청와대 행정관, 노무현 정부 때 행자부 공보관, 광주시 행정부시장, 정부혁신본부장을 맡았다. 당시 정부문서정보관리 시스템인 ‘온나라시스템’ 이름을 직접 짓는 등 노무현 정부 전자정부사업을 마무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행안부 2차관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나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행정개혁시민연합 공동대표 등 시민운동도 했다.
2018년 2월 은퇴공무원 복지·지원사업을 전담하는 공무원연금공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이번에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각 기관에 산재한 휴양시설을 네트워크화하는 아이디어는 전자정부를 통한 정부혁신본부장과 행안부 2차관 경험이 밑바탕이 됐다는 평가다.
적잖은 국민은 연금도 많고 복지혜택도 다양한 공무원의 웰에이징에 부러움을 넘어 ‘질시’까지 하는 경우가 있다. 세금으로 과도한 혜택을 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직업공무원 제도에서 공무원연금과 사회보장 제도로 국민연금은 의미도 다르고, 개인 연금부담액도 다르다”면서 “2015년 공무원연금개혁으로 젊은 공무원은 국민연금과 차이가 10~15%밖에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공무원연금은 현재 8조~9조원 정도를 운영하고 있지만 민간투자업체와 달리 위험이 큰 사업에 투자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지난해 9.7%의 수익을 올렸다. 하지만 수입보다 지급하는 돈이 많아 기금이 줄 수밖에 없고, 이를 정부에서 보조하는 구조다. 이에 정 이사장은 “국민의 상대적 박탈감, 따가운 시각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서 “360개 1만3000명 상록봉사단원이 자원봉사에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사진·권호욱 선임기자 biggu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