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군박물관 한국 비행기 역사의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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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 공군사관학교에 위치, 문화재로 지정된 항공기 4대 등 각종 물품 전시

“찾았다!”

2004년 1월 대구 경상공업고등학교. 한국항공학교가 폐교된 뒤 세워진 이 학교 지하창고에서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비행기 기체가 발견됐다. 오랫동안 방치돼 녹까지 슬어버린 기체에는 희미하게 ‘復活(부활)’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국산 1호 항공기 ‘부활호’가 40여년 만에 다시 세상에 나온 순간이다.

3월 14일 안태현 공군박물관장이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공군사관학교 공군박물관에서 관람객들에게 입구에 전시된 F-51D 비행기를 설명하고 있다. / 이삭 기자

3월 14일 안태현 공군박물관장이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공군사관학교 공군박물관에서 관람객들에게 입구에 전시된 F-51D 비행기를 설명하고 있다. / 이삭 기자

부활호는 한국전쟁 직후 실의에 빠진 우리나라에 희망을 심어준 비행기다. 이 비행기가 만들어진 것은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랐던 1953년 6월. 우리나라 기술로 항공기를 만들자는 목표 아래 27명의 공군 정비사들이 모였다. 이들은 공군 사천기지의 허름한 막사에서 설계도를 제작했고, 미 공군기지를 샅샅이 뒤져 부품을 모았다. 같은 해 10월 11일 2시간의 시험비행에 성공한다. 당시 공군의 훈련기였던 L-16 연락기의 엔진과 프로펠러 등을 사용했지만 비행기의 70%를 차지하는 동체와 날개 등은 우리 기술로 설계·제작됐다. 4기통 엔진을 가진 이 비행기의 최고 속도는 시속 180㎞. 다른 나라가 개발한 비행기보다 성능은 떨어졌지만 당시 국내 기술로는 획기적이었다.

이듬해인 1954년 4월 이 비행기는 부활호라는 이름을 달았다. 부활호가 하늘을 비행하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활호는 빠르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비행성능이 타국에서 개발한 비행기보다 현저하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1960년 한국항공학교로 보내진 부활호는 정비실습용으로 활용되다 자취를 감췄다.

3월 14일 안태현 공군박물관장이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공군사관학교 공군박물관에서 관람객들에게 입구에 전시된 F-51D 비행기를 설명하고 있다. / 이삭 기자

3월 14일 안태현 공군박물관장이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공군사관학교 공군박물관에서 관람객들에게 입구에 전시된 F-51D 비행기를 설명하고 있다. / 이삭 기자

공군 염원 이룬 국산 1호 항공기 ‘부활호’

2004년 10월 이 비행기는 50년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부활’했다. 2008년에는 ‘등록문화재 제411호’로 지정됐다. 안태현 공군박물관 관장은 “광복군이자 공군 창설의 주역인 최용덕 장군(1898~1969)은 ‘우리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기는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며 “성능으로 인해 활약한 기간은 짧았지만 부활호는 최 장군과 공군의 염원을 이뤄준 소중한 기체”라고 설명했다.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공군사관학교 공군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보관돼 있는 L-4연락기. 우리나라 최초 항공기로 등록문화재 제462호다. / 이삭 기자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공군사관학교 공군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보관돼 있는 L-4연락기. 우리나라 최초 항공기로 등록문화재 제462호다. / 이삭 기자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공군사관학교의 공군박물관에 가면 부활호처럼 한국전쟁 전후를 기점으로 활약한 4대의 비행기를 볼 수 있다. 모두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부활호가 전후 바닥으로 떨어진 우리나라의 자존심을 세워줬다면 F-51D 무스탕은 한국전쟁에서 우리를 지켜준 비행기다. 이 비행기는 공군이 최초로 도입한 전투기이기도 하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이 시작됐을 때 우리나라에는 전투기가 없었다. 미군으로부터 받은 연락기와 훈련기 20여대가 전부였다. 무서운 기세로 남하하는 북한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공군사관학교 공군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보관돼 있는 국산 1호 항공기 ‘부활호’(등록문화재 제411호). / 이삭 기자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공군사관학교 공군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보관돼 있는 국산 1호 항공기 ‘부활호’(등록문화재 제411호). / 이삭 기자

공군 소속의 F-51D가 전장에 등장한 것은 전쟁이 시작된 지 일주일이 지난 7월 3일이다. 안태현 관장은 “전쟁 발발 다음 날인 6월 26일 10명의 공군 조종사들이 일본의 미국 공군기지에 파견돼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며 “짧은 훈련을 마친 이들은 7월 2일 10대의 F-51D를 몰고 대한해협을 건너 다음 날 바로 전투에 나섰다”고 말했다. 공군에서는 7월 3일을 ‘조종사의 날’로 정해 이들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 초기 10대에 불과했던 공군의 F-51D는 전쟁 기간 동안 133대까지 늘어났다. 전장에 출격한 횟수는 8500여 차례나 된다. 1952년 1월 15일에는 유엔군 공군이 500차례나 실패했던 평양 승호리 철교 차단작전에 성공해 북한군의 보급로를 끊기도 했다.

1953년 공군 정비사들이 공군 사천기지에서 국산 1호 항공기인 ‘부활호’를 제작하고 있다. / 공군사관학교 제공

1953년 공군 정비사들이 공군 사천기지에서 국산 1호 항공기인 ‘부활호’를 제작하고 있다. / 공군사관학교 제공

한국전쟁 때 맹활약한 F-51D 무스탕

공군박물관 F-51D 기체에 새겨진 ‘信念의 鳥人(신념의 조인)’이라는 문구는 공군의 상징이기도 하다. 한국 공군의 조종교관으로 참전한 미군 딘 헤스 대령(1917~2015)의 좌우명인 ‘By faith, I fly(나는 신념으로 하늘을 난다)’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헤스 대령은 자신의 좌우명이 새겨진 우리 공군의 F-51D를 타고 250차례나 출격해 북한군을 격파했다. 또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돌봐 ‘전쟁고아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에 남겨진 F-51D는 모두 2대로 공군박물관과 용산 전쟁기념관에 각각 보관돼 있다. 2016년 10월 20일 등록문화재 제666호로 지정됐다.

한국전쟁 초기 전투기가 투입되기 전 전투능력이 없었던 연락기와 훈련기도 전장에 나선다. F-51D의 뒤를 이어 등록문화재 제667호로 이름을 올린 것은 T-6 건국기다. 광복 후 자본이 없었던 우리나라가 10대의 T-6 건국기를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국민들 도움 덕택이었다. 미국에 비행기 원조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우리나라 정부는 1949년 9월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학생, 회사원 등 각계각층이 모금에 참여해 목표액인 2억원을 훨씬 뛰어넘은 3억5000만원을 모금했고, 캐나다에서 T-6 10대를 구입했다. 이 비행기는 조종사를 양성하기 위한 2인승 훈련기였지만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전장에 투입됐다. 별다른 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뒤에 탑승한 조종사가 수류탄 등의 폭탄을 품에 안고 있다가 저공비행하며 수류탄을 투하하는 방법으로 북한군에 피해를 줬다.

등록문화재 제462호인 L-4 연락기도 T-6 건국기와 같은 방법으로 전투에 참전했다. 이 비행기는 1948년 9월 공군의 전신인 육군항공대가 미 육군 7사단 항공대로부터 인수한 항공기다. 최고 시속 137㎞, 순항 시속 74㎞인 2인승 경비행기로 비행속도가 자동차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전쟁 초기에 적진을 비행하며 폭탄을 투하했고, 전투기가 도입된 이후에는 정찰기로 활약했다. 안 관장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4대의 비행기들은 공군 역사는 물론 우리나라 항공 발전에 기념비적인 문화재들”이라고 말했다.

1985년 문을 연 공군박물관에는 항공기류, 총포류, 장비류 등 1000점의 물품이 전시돼 있다. 관람료는 무료이며 매주 수요일에 문을 닫는다. 이 곳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2주 전 예약이 필요하다.

<청주·이삭 전국사회부 기자 isak84@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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