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이야기

남녀가 스치기만 해도 ‘메갈’ 대 ‘한남’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극단으로 치닫는 대결 프레임에 피로감… 소모적 논쟁보다 성평등 공론화돼야

‘메갈’과 ‘한남’의 진흙탕 싸움. 서울 동작구 이수역 인근의 한 술집에서 벌어진 폭행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여론전은 겉으로만 봐서는 성별 대결의 장이 되고 있다. 양쪽으로 갈라선 두 진영 사이의 논쟁에 상대방 성을 비하하는 표현이 난무하면서 ‘페미니즘’ 대 ‘반 페미니즘’ 프레임은 점차 강화되는 모양새다. 여기에는 이미 인터넷과 SNS 같은 온라인 여론공간에서 정착된 ‘남초’ 커뮤니티 대 ‘여초’ 커뮤니티 간의 대결구도가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극단으로 치닫는 양측의 대결 프레임에 피로감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소모적 논쟁 뒤에 가려진 여성과 남성 모두의 안전과 성평등 요구가 무엇보다 공론화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11월 3일 서울 중구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열린 스쿨미투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지금까지 들었던 혐오발언을 적는 퍼포먼스에 참여하고 있다. / 연합뉴스

11월 3일 서울 중구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열린 스쿨미투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지금까지 들었던 혐오발언을 적는 퍼포먼스에 참여하고 있다. / 연합뉴스

남녀 화장실 변기 숫자 놓고 논란

남녀 대결 프레임이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모습은 온라인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최근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한 학교 남녀 화장실의 사진이 올라왔다. 화장실 리모델링 후 남자화장실의 소변기가 2개밖에 설치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남자화장실의 대·소변기 수의 합이 여자화장실의 대변기 수를 넘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이라는 내용이었다. 해당 학교에는 대변기만 설치할 수 있는 여자화장실에서 공간적인 이유로 5개의 대변기가 설치됐으니 남자화장실에는 소변기를 더 놓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도 비워둘 수밖에 없었다. 남성 중심 커뮤니티에서는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이용자들은 사회 전체의 흐름이 성평등을 내세우면서 오히려 남성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성토했다. 반면 여성 중심 커뮤니티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상대적으로 화장실 이용시간이 길 수밖에 없는 여성의 특성상 형평성을 맞춘 규정인데도 이 사례 하나만으로 남성이 피해를 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던 것이다.

남녀 화장실의 변기 수를 동등하게 맞춰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공중화장실 등에 과한 법률’은 ‘공중화장실 등은 남녀 화장실을 구분하여야 하며, 여성화장실의 대변기 수는 남성화장실의 대·소변기 수의 합 이상이 되도록 설치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제도상의 허점일 수도 있고, 적용과정에서 불가피한 현실적 이유일 수도 있기 때문에 해석은 남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남녀 대결 프레임이 전제가 된 상황에서는 어느 한쪽이 희생을 강요받는 ‘제로섬 게임’으로 논의의 지형이 바뀌어버리는 것이다.

논의 프레임에 따라 서로 상충되는 의견을 갖고 있는 양 진영의 주장이 극단화되는 문제는 전문가들도 지적하고 있다. 윤상철 한신대 교수(사회학)는 자신의 가정 내에서도 젠더 이슈에 따른 의견 양극화가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쌍둥이인 아들과 딸이 있는데 성평등과 차별에 관한 주제로 대화를 하다보면 아들은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수적 남성 중심의 주장에 가까워지고, 딸은 ‘워마드’ 등의 페미니즘 주장으로 기우는 모습을 가까이서 본다”고 말했다. 젠더 문제를 둘러싼 의견의 양극화가 일상에서도 쉽게 재연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사회적으로 양측의 의견과 주장을 중재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없다보니 갈등이 벌어지는 사안마다 의견이 양쪽으로 극단화되기 쉽다”면서 “대표적인 성차별 문제인 일자리 문제나 임금 문제 등 다양한 사안들이 제각기 사안의 특성에 맞는 논의가 필요한데, 이를 젠더 문제로만 국한하면 오히려 해결해야 할 핵심 문제를 덮어버리게 된다”고 지적했다.

젠더 문제를 둘러싼 의견의 양극화

윤 교수의 지적은 최근 젠더 논의가 양측의 대결구도로만 흘러가는 데 대해 적지 않은 피로감을 보이는 여론이 늘고 있다는 데서도 확인된다.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올라가 청원 참여인원이 36만명을 넘겨 답변 요건을 갖춘 ‘이수역 폭행사건’ 관련 청원에 관한 인터넷 반응도 마찬가지다. ‘흔히 벌어지는 폭행사건에 언론이 남녀 대결 프레임을 과도하게 적용해 오히려 안전과 성평등 문제에 관한 남녀 모두의 공감대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내용이다.

페미니즘 입장의 연구자들도 이 문제에는 동의하고 있다. “첫 번째 문제는 언론”이라는 것이 이나영 중앙대 교수(사회학)의 지적이다. 문제의 근본에는 여성들이 그동안 역사적·경험적으로 체감해온 남성의 폭력에 대한 불안감과 해결책 요구가 자리잡고 있지만 폭행사건의 세부적인 사항에만 시비를 따지는 보도행태로 주목을 끌려 한다는 주장이다. 이 교수는 해법으로 보다 전면적인 공론화를 제안했다.

5월 17일 서울 강남구 신논현역 앞에서 페미니즘 단체 회원들이 모여 강남역 살인사건 2주기 추모집회를 열고 있다. / 이준헌 기자

5월 17일 서울 강남구 신논현역 앞에서 페미니즘 단체 회원들이 모여 강남역 살인사건 2주기 추모집회를 열고 있다. / 이준헌 기자

이 교수는 “폭력사건에서 가해자의 대부분은 남성인데도 가해자로 남성을 지목하는 표현은 드문 반면, 오히려 가해자가 여성일 때는 물론 피해자가 여성일 때조차 여성이라는 점만 부각되는 관행만 보더라도 논의지형이 기울어진 것을 보여준다”며 “결국은 정치권을 비롯해 사회 전반이 갈등을 조장하는 방식 대신 근본적으로 성평등을 논의하기 위한 지속적인 공론장을 만드는 쪽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젠더 대결구도를 조장하는 온·오프라인 움직임에 피로감을 느끼는 문제와 현실에서 실질적인 불평등을 경험하고 있는 문제를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는 문제는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도 뒤따랐다. 이 교수는 “공론화를 위한 전제조건은 오랜 역사 동안 남성 중심으로 기울어진 논의지형에서 여성이 실제 겪고 있는 문제를 거리낌없이 표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라며 “여성이 제 목소리를 내는 데 대한 일시적 반동이야 충분히 예상할 수 있고 실제 나타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논의를 포기하기보다는 장기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진옥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도 “이수역 폭행사건에서 나타난 젠더 대결 중심의 여론전이야말로 현실의 여성들이 겪고 있고 해결을 요구하는 문제를 덮어버리는 장치가 되고 있다”며 “표면적인 폭행 내용 대신 여성이 제 목소리를 낸다고 해서 조롱과 비하를 당하게 된 배경의 문제를 개선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으로도 확산된 남녀 양쪽의 혐오와 비하 문제가 서로 상대방을 적으로 오인하면서 나타난 문제일 수도 있다는 분석도 있다. 온라인 여론을 주도하는 연령층이 상대적으로 젊은 청년층을 비롯해 청소년층으로도 확장되는 상황에서 이들 세대가 갖고 있는 사회적 불만이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상대 성에게로 향하는 ‘오인 사격’이 심심찮게 벌어진다는 것이다. 피아 식별을 위해서는 양쪽이 모두 공유할 수 있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일종의 ‘암구호’가 있어야 하는데도 정치권과 언론 모두 이 공통의 키워드를 파악하는 데는 소홀했던 탓이다.

상대방을 적으로 여겨 ‘오인 사격’

설동훈 전북대 사회과학연구소 소장의 눈으로 볼 때 이번 이수역 사건은 세 가지 층으로 읽힌다. 사건 당일 일어난 폭행이 첫 번째, 사건 이후 당사자들이 각각 사건을 두고 경찰 수사과정과 언론 인터뷰 과정에서 달리 해석해 각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끄는 상황이 두 번째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네티즌들이 벌이고 있는 대리전쟁인 세 번째 사건이다. 사건 당사자 양쪽의 의견이 엇갈려 당장 사실과 결론을 확인할 수 없는 문제임에도 성급하게 전쟁에 뛰어들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 소장은 “어떤 사건이 발생하고 그 원인이 밝혀지기도 전에 지레 예단을 해놓고 한쪽에서 또 다른 한쪽을 비난하다 보니 결국은 근거 없는 대결이 계속해서 되풀이되고 소모적인 논쟁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젠더 대결 이슈가 확실히 가장 주목을 끄는 주제임에는 분명하다. 여기에 관심을 쏟게 될 정도로 일자리나 사회적 지위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하는 젊은층의 현실 또한 배경에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해법은 더욱 복잡해진다는 것이 설 소장의 분석이다. ‘메갈’이나 ‘한남’이라는 딱지를 붙여 상대방을 공격하는 문화는 어찌 보면 양쪽 모두 스스로를 피해자라 여기고 있고 실제로도 피해를 입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설 소장은 “분명히 우리 사회에 성차별이 있고 대부분 여성들이 피해자에 해당하지만 경우에 따라 권력관계가 작용해 개별 사안으로 가면 여성이 가해자가 되고 남성이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며 “성뿐만 아니라 권력이나 재산 등 여러 기준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현실에서 피해자가 되는 사람들은 ‘약자들이 가지는 무기’인 언어로 자신의 불만을 해소하는 경향이 나타난다”고 말했다.

결국 차별이 나타나는 현실은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기 때문인데 젠더 문제로만 접근하다보면 원인 분석부터 해법 도출까지 꼬일 수밖에 없다. 정부도 최근 늘고 있는 젠더 이슈에 관해서는 해법을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행정안전부가 올해 9월 연구용역을 맡겨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가 10월 제출한 ‘불법촬영 관련 시위 원인과 해석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보면 젠더 문제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응방안이 제시돼 있다. 진흙탕 싸움에서도 보다 진전된 사회적 합의라는 연꽃을 피워낼 수 있으려면 피해를 입고 있다고 생각하는 집단들 모두가 제 목소리를 가감 없이 낼 수 있는 공론장이 필요하고 정부가 이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보고서의 주된 내용이다.

보고서는 “공개적 발언 기회는 자신들의 주장과 요구를 내부적으로 정제시키게 만드는 기회가 된다”며 남녀 대결에서 일반화된 혐오발언을 자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한다고 지적했다. 또 “갈등 중재자(정부)는 공존, 배려, 인정 등의 통합적 언어로 사건과 그 해결방안을 정의해야 한다”는 것이 연구진의 제언이다. 결국 책임질 수 있는 제도권 영역에서의 선택은 이러한 공개적 발언을 공론화할 수 있는 장을 정부가 만들 것인지에 달린 셈이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