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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압에 맞선 사법파동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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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차 파동 때 주요보직 법관들 사법 행정권 남용 주역으로 떠올라

사법부의 독립이 헌법에 명문화된 것은 불과 70년밖에 되지 않는다.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이 처음으로 제정, 공포된 이후 사법부는 끊임없는 외압에 시달려 왔다. 헌법에는 사법부의 독립이 명시돼 있지만 여전히 사법부는 군사정권의 시녀 노릇을 해야만 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자를 석방하거나 무죄 판결을 한 판사들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을 피해 친척집으로 피신을 다녔다. 군사정권은 사법부를 정부의 한 부(部)로 만들려는 시도를 계속해 나갔다. 정보기관 요원이 법정 방청석에 앉아 재판을 받아쓰기하던 시절도 있었다. 사법부 스스로 개혁을 하려는 노력도 존재했다. 1993년 사법제도발전위원회를 처음으로 설치한 데 이어 사법개혁위원회 등을 만들어 각종 사법개혁을 위한 내부 노력도 펼쳤다. 그러나 2009년 촛불재판 개입으로 불거진 제5차 사법파동은 제대로 된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제5차 사법파동의 주범인 신영철 전 대법관이 일선 법관에게 “사법파동이 일어나봤자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한 말과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그때 법원행정처에 있었거나 주요 보직에 있었던 법관들은 2018년 현재 사법행정권 남용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다.

전두환 정권에서 임명된 김용철 9대 대법원장이 1988년 사법부의 독립을 주창하는 소장 판사들의 집단 반발을 수용, 대법원장을 내려놓았다. 사진은 사퇴 후 청사를 떠나기 전 판사들과 작별인사를 하는 김 전 대법원장 모습. / 경향 DB

전두환 정권에서 임명된 김용철 9대 대법원장이 1988년 사법부의 독립을 주창하는 소장 판사들의 집단 반발을 수용, 대법원장을 내려놓았다. 사진은 사퇴 후 청사를 떠나기 전 판사들과 작별인사를 하는 김 전 대법원장 모습. / 경향 DB

제1차 사법파동 1971년 8월 28일 새벽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가 서울형사지법 이범열 부장판사, 최공웅 판사, 이남영 서기 등 3명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반공법 위반 항소심 사건의 증인신문을 하기 위해 제주도로 출장을 가면서 피고인 측 변호사로부터 항공료, 숙박비, 술값 등의 명목으로 9만7000원 상당의 금품을 받았다는 혐의였다. 실상은 시국 관련 사건에서 무죄가 잇따르자 판사들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서울형사지법은 그날 오후 법관회의를 열고 유태흥 수석부장을 비롯한 판사 37명이 사표를 일괄 제출했다. 뒤이어 전국 각지에서 판사 150여명이 사표를 제출했다. 당시 작성된 문건이 ‘사법권 수호 건의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검찰에 수사 중단을 지시했다. 판사들은 민복기 대법원장의 호소로 사표를 철회했다.

제2차 사법파동 1988년 2월 소장판사 335명의 서명이 담긴 ‘새로운 대법원 구성에 즈음한 우리들의 견해’라는 성명서가 발표됐다. 노태우 정부가 5공화국 당시 활동했던 사법부 수뇌부를 재임명한 것에 반발하면서 나온 움직임이었다. 전국 200여명의 판사들이 성명서에 서명하고, 전두환 정권에서 임명된 김용철 대법원장의 사퇴를 요구했다. 또 정보부 기관원의 법원 상주를 폐지하고, 판사의 청와대 파견 중지, 유신헌법 철폐 등을 요구했다. 2차 파동은 김 대법원장의 퇴진으로 마무리됐다.

제3차 사법파동 사법부 외부로부터의 독립이 안정을 찾아갈 즈음인 1993년 6월 서울중앙지법 민사단독판사 28명이 ‘사법부 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발표했다. 법관인사위원회의 의결기관화, 전체 법관의 의사를 반영한 법관인사위원회 구성, 법원 인사권 분산, 전국법관회의 설치 등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지만 대부분 반영되지 못했다. 김덕주 대법원장이 퇴진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제4차 사법파동 역대 대법관은 남성 법원장만 임명되는 것이 관례였다. 판사 144명이 연판장에 서명하며 남성, 기수, 서열에 따라 획일적으로 정해지는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에 반기를 들었다. 최종영 대법원장은 전국 판사들에게 이메일을 돌려 다음 제청 때는 일선 법관의 바람을 충분히 반영한 인선을 하겠다는 다짐을 한 뒤 사태는 일단락됐다. 그 결과 이듬해 첫 여성 헌법재판관이 탄생했다. 전효숙 당시 서울고법 부장판사였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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