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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장과 법원행정처, 그 은밀한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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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장과 법원행정처 또는 대법원의 관계를 정의하기 위한 키워드는 ‘인사권’이다. 대법관 후보 1순위로 거론되는 규모가 큰 법원의 장은 아무나 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반복되는 공식이 있다. 법원행정처를 거쳤는지 여부다.

전국법원장간담회가 열린 지난 6월 7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회의실에서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을 비롯해 각급 법원장이 회의에 앞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전국법원장간담회가 열린 지난 6월 7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회의실에서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을 비롯해 각급 법원장이 회의에 앞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사법행정권 남용 특별조사단이 지난 6월 5일 추가공개한 98개 파일을 살펴보면 두 개의 키워드가 떠오른다. ‘법원장’과 ‘(법원장급) 수석부장판사’다. 법원행정처가 일선법원의 재판개입 방안 및 소장판사들의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한 각종 아이디어를 생산해도 법원장이라는 존재를 무시하고 실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일까. 주요 법원의 법원장은 통상 법원행정처와 교감이 있는 사람들이 주로 배치돼 왔다. 소위 법원행정처 출신 법원장이다.

지난 2월 김명수 코트에서 임명된 민중기 서울중앙지법원장은 법원행정처 경력이 없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 임기 내 양승태 코트에서 이뤄진 법원장 인사는 대부분이 법원행정처 경력을 가진 판사들이다. 민중기 원장의 전임인 강형주 전 서울중앙지법원장(59·사법연수원 13기)은 법원행정처 법무담당관, 기획조정실 기획담당관을 거쳐 2014년 8월~2015년 8월까지 1년간 법원행정처 차장을 역임한 뒤 곧바로 서울중앙지법원장에 임명돼 지난 2월까지 약 3년간 법원장직을 맡았다. 전형적인 ‘법원행정처-법원장’ 코스를 밟은 셈이다.

10년 만에 반복되는 사법행정권 남용

실제 특조단이 공개한 98개 파일 가운데 꽤 많은 문건에 ‘법원장’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2016년 3월 14일 법원행정처 기획 제2심의관실이 작성한 <판사회의 순기능 제고방안>을 살펴보면 법원행정처가 법원장을 사실상 가장 강력한 행정권 행사 ‘루트’로 사용하려 한 정황이 드러난다.

‘세부적 방안 검토’ 가항 이하에 나오는 ‘법원장 주도의 의견수렴 및 안건 설정’을 비롯해 문건 전반에서 묘사되는 법원장은 법원행정처의 수족 노릇을 하며 판사들의 동향을 보고하도록 하는 역할이다. 문건에 적시된 내용은 ▲안건 제출, 선정, 판사회의에서의 논의 진행 등 판사회의 관련 전 과정에서 법원장이 헤게모니 장악 ▲‘법원장-일선판사’ 사이의 소통 강화→우회수단(내부 판사회의 등)을 통한 소통 무력화, 내부 판사회의 활성화 명분↓, 내부 판사회의 중요도 감소, 법원장 논의 주도 ▲‘법원행정처-법원장-일선판사’ 사이의 일관된 소통의 흐름 형성 ▲이미지 싸움에서 우위 차지→부당한 요구 제기하는 판사: 오히려 선동적·감정적·조직적·독선적·불법적 등 부정적 이미지 낙인/ 의연하게 대처하는 법원장: 포용적·합리적·노련함 등 긍정적 이미지 획득 등이다.

일선 판사들 사이에서는 이번 사법행정권 남용사태를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 사건과 비교하는 목소리도 있다. 신영철 전 대법관(당시 서울중앙지법원장)의 사법행정권 남용사태 이후 많은 판사들이 바꾸려 노력했던 잘못된 행태가 또다시 반복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지적이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년 전이다. 2008년 5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가 서울 광화문 광장을 중심으로 확산됐다. 검찰은 집회 참가자들을 일반교통방해죄·집시법 위반혐의 등으로 무더기 기소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단독에 접수된 촛불집회 사건만 106건. 단일 집회에 이렇게 많은 인원이 기소된 것은 처음이었다. 이 가운데 62건은 일반 전산 방식으로 무작위 배당됐고, 25건은 몇 개의 재판부 내에서 소위 ‘뺑뺑이 돌리기’식 배당이 이뤄졌다. 나머지 19건은 특정 재판부에 직접 배당이 이뤄졌다. 44건이 사실상 ‘임의배당’된 셈이다. 얼마 뒤 임의배당받은 한 재판부에서 촛불집회 참가자에 대한 형량이 과하게 내려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판사들 사이에서 나왔다. 그해 10월 박재영 당시 형사7단독 판사가 야간 옥외집회를 금지한 집시법 제10조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안진걸 광우병대책회의 조직팀장이 낸 위헌법률심판 신청을 받아들여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다. 법원이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하면 해당 법에 따라 기소된 사건은 당연히 심리를 할 수 없다. 다음날 엄상필 형사3단독 판사가 촛불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된 박석운 진보연대 상임운영위원장의 보석신청을 받아들이며 공판을 연기했다.

이때부터 신영철 원장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강국 당시 헌법재판소장을 만나 위헌법률심판 제청사건을 신속히 처리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또 형사단독 판사들과의 자리 및 세 차례의 이메일을 통해 위헌제청이 있었더라도 재판 진행을 신속하게 해야 한다는 취지의 문제 발언을 했다. 사건을 배당받은 판사들 사이에 동요가 일어났다. 일부 판사가 언론을 통해 신 원장이 보낸 이메일 전문을 공개했다. 엄연한 재판권 침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자 현직 법관으로 구성된 대법원 진상조사단이 꾸려져 “사법행정권 남용으로 볼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용훈 당시 대법원장은 신 원장을 법관징계위원회가 아닌,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에 회부했다. 윤리위는 ‘엄중 경고’라는 경징계로 결론지었다. 신 원장은 이듬해 2월 18일 고현철 대법관 후임으로 신임 대법관에 임명됐다.

당시에는 법원행정처와 신영철 중앙지법원장 사이에 어떤 교감이 있었는지를 밝히지는 못했다. 대부분 추측만 할 뿐이었다. 다만 사태 이후 법원장에 의한 자의적 사건 임의배당을 할 수 없게 된 것은 하나의 성과로 평가되기도 했었다.

법원장과 법원행정처. 법원장의 제1 책임은 소속 판사들이 재판을 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한 전직 법원장은 “법원장은 법원 행정직원과 판사라는 두 조직을 모두 조화롭게 이끌어 가는 것은 물론이고, 요즘같은 날씨라면 판사들이 덥지 않게 재판할 수 있도록 에어컨 상태를 살피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드러난 문건들에서 묘사되는 법원장들은 보신을 위해 법원을 운영하는 존재로 비춰진다. 차기 대법원장 0순위인 법원행정처장은 대법원장의 눈치를 보고, 차기 대법관 0순위인 2차(규모가 큰) 법원장과 법원행정처 차장은 법원행정처장의 눈치를 보는 이상한 행태가 관행처럼 이뤄져 온 것이다.

[표지 이야기]법원장과 법원행정처, 그 은밀한 관계

유력 후보군의 공통점은 법원행정처

법원장과 법원행정처, 대법원의 관계를 정의할 수 있는 키워드는 결국 ‘인사권’이다. 서울중앙지법이나 수원지방법원 등 규모가 큰 법원의 장이 매번 대법관 후보 1순위로 거론되는 이유는 애당초 아무나 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반복되는 공식이 있다. 법원행정처를 거쳤는지 여부다.

한 지방법원 부장판사의 설명이다. “행정처 출신+수석연구관 출신 법원장 또는 고등부장은 대법관 후보 0순위다. 예를 들어 사법연수원 기수 17기에는 항상 거론되는 선두주자가 있었다. 이번에 대법관 후보로 올랐었던 한승 전주지방법원장과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조실장이다. 판사들은 이번 사태가 불거지기 전까지는 한승 원장과 이민걸 전 실장이 당연히 대법관 두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봤다. 유독 17기에 유력후보가 많았다. 임성근 서울고법 부장판사, 윤성원 광주지법원장 역시 후보군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경력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전부 법원행정처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한승 전주지법원장은 총 네 차례의 법원행정처 경력을 갖고 있다. 법원행정처 사법정책담당관, 기획조정심의관, 인사1심의관, 사법정책실장이다. 사실상 법원행정처 내 주요 보직을 두루 거친 셈이다. 윤성원 광주지법원장 역시 법원행정처 법정국 법정심의관, 민사정책총괄심의관, 사법등기국장, 사법지원실장 등 법원행정처 내 보직을 두루 경험했다. 양승태 코트의 사법행정권 남용에 관여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이민걸 전 기조실장 역시 17기 판사 가운데 행정처 경험이 가장 많은 판사로 꼽힌다. 실제 법원행정처와 재판부를 주기적으로 오가면서 ‘법관과 판사’라는 서로 다른 직무를 두루 경험하는 것은 대법관으로 가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자 극소수에게만 열려 있는 루트였다.

이 과정에서 부작용도 나타났다. 신영철 중앙지법원장 사태 이후 노골적으로 특정 재판부에 주요 사건을 밀어주는 등의 방식은 사라졌지만 대신 교묘한 방식이 부활했다. 소위 법원장의 말을 잘 듣는 특정 판사를 주요 사건이 주로 배당되는 몇 개의 재판부 중 한 자리에 배치하고, 외관상으로는 무작위로 배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건이 특정 재판부에 갈 수 있도록 작업을 하는 식이다. 양승태 코트에서는 수석부장 자리를 놓고 모종의 작업도 벌어졌다. 예를 들어 통상 서울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는 법원장으로 나가지 않은 고등부장 가운데 최고 선임이 자동으로 수석부장이 되는 게 관례였다. 그런데 양승태 대법원장 임기 중 법원행정처가 주요 사건에 대한 재판 진행 경과 등을 알아보려는 과정에서 기존 수석부장이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법원행정처 입맛대로 따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자 ‘최고 선임 고등부장판사=수석부장’이라는 공식이 깨졌다. 법원행정처 출신에 법원장을 거친 판사가 최고 선임 부장판사를 제치고 수석부장 자리에 앉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이나 수원은 특히나 법원행정처장이 좋아하는 인물이 수석부장으로 많이 갔다. 사무분담이나 근무평정권은 법원장의 고유권한이지만 대부분 수석부장에게 위임하는 경우가 많았고, 법원행정처 출신에 1차 법원장을 거친 부장판사가 있다면 그 사람이 수석부장을 하는 게 아무래도 법원행정처가 사법행정권을 잡음없이 행사하는 데 도움이 된 게 사실이다.”(A지방법원 부장판사)

법원행정처 정책의 통로는 법원장

현실적으로 대법관 후보 1순위 지역의 법원장은 제청권을 가지고 있는 대법원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김명수 코트 이전 사법부는 ‘인사권’으로 엮인 수직적 구조였다. 대법원장은 대법관 지명권으로 법원장의 코를 꿰고, 법원장은 근무평정권 및 사무분담권을 통해 판사들을 컨트롤해 왔다. 법원행정처에서 제안된 각종 정책을 가장 효율적으로 하달할 수 있는 통로 역시 법원장이었다.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이 2016년 8월 작성한 <각급 법원 주기적 점검방안> 문건을 살펴보면 행정처가 어떤 방식으로 각급 법원장을 평가하고 관리했는지가 나타난다.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심각한 상태라는 검토 배경에 따라 기조실이 내놓은 아이디어는 ▲(해당 법원 내 사법 불신 목소리가 나올 경우) 사안의 경중에 따라 처장님 또는 차장님께서 법원장에게 통지 ▲해당 법원장→차회 점검시 개선사항을 보고하여 피드백하도록 함 등이다. 거기에 법원장의 근무의욕을 고취하는 방안으로 ‘법원장의 업무수행능력 평가자료로 활용: 2차 법원장 적격 검증시 적임자 보임의 기초자료로 활용’을 제시한다. 법원행정처가 ‘인사권’을 쥐고 법원장을 입맛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김명수 코트에서는 더 이상 법원행정처 출신이라는 교감요인이 법원장 임명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한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전국 판사회의에서 논의되는 안건 가운데 대법원장의 법원장 인사권을 판사회의에 넘겨 일종의 ‘경선’으로 뽑는 방식이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더 이상 대법원장이 임명하는 구조는 없어질 것”이라며 “김명수 대법원장은 장기화되고 있는 사법행정권 남용 파문에 동요하는 일선 판사를 달래는 방법으로 자신의 인사권을 내려놓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국회는 7월 26일 본회의를 열고 김선수·이동원·노영희 대법관 후보자의 임명동의안을 가결했다. 이들은 모두 법원행정처 코스를 거치지 않은 정통 판사 또는 순수 재야 변호사다. 한 고등부장판사는 “김선수 대법관은 재야에서는 대법관 후보로 거론된 적은 있지만 이동원 대법관은 오히려 17기 중 대법관 후보 후순위였던 사람”이라며 “행정처를 거치지 않았다는 것이 대법관이 되는 데 장애요인이 되지 않는 현상이 관행으로 자리잡으면 재판에 충실한 판사, 법원행정처의 눈치를 보지 않는 법원장이 앞으로 많이 등장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 법원에 남아있는 법원장들의 현실인식은 달라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법원장들은 지난 6월 7일 전국 법원장 간담회를 통해 “조사 결과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사법행정권 남용행위가 법관의 독립과 사법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했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하고 책임을 통감한다”면서도 “합리적 근거 없는 이른바 재판거래 의혹 제기에 대해 깊이 우려한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양승태 대법원장 임기동안 법원행정처를 거치거나 법원장 자리에 오른 법원장들은 설령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각종 문건 작성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더라도 도덕적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법원행정처가 법원장을 입맛대로 통제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게 방치한 것만으로도 공범으로서 비난을 받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한편 법원행정처는 7월 26일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정황을 담은 문건 410건 중 아직 공개되지 않은 228건을 비실명화 작업을 거쳐 추가공개하기로 결정했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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